2022년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공모한 <2022-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문학상> 심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안타깝게도 4분기 공모전에서는 소설 부문과 시 부문 모두 당선작을 내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올리는 것으로 결과 발표를 대신합니다. 2023년 1월 1일부터 시작되는 2023-1 공모에서 더 좋은 더 많은 당선작이 배출되기를 기대합니다. 많은 응모와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심사 결과
소설부문 : 당선작 없음
시 부문 : 당선작 없음
● 소설부문 심사평
종합선물 세트를 열어보는 자의 마음으로
올해 4번째 심사평을 쓴다. 3개월마다 메일로 전달 받은 선물 상자를 열고 그걸 보내준 작가들의 사유를 읽고 세계를 더듬어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랫동안 깎고 다듬은 원고를 수취인불분명의 주소로 날려 보낸 작가들의 초조한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종합선물세트를 열어보는 자의 마음은 언제나 설렌다. 거기서 골라낸 당선작이 [스토리코스모스]에 게시되고, 그걸 보내준 작가의 약력이나 당선 소감을 읽고 나면 뿌듯함과 함께 경쟁심이 불타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눈이 어두운 심사위원 때문에 낙선한 자들의 불운을 위로할 방법도 궁싯거리고 있다. 제발 불운의 알리바이를 찾지 마시길. 재능이 없어서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길을 잃어서 재능을 증명하지 못하게 된 것뿐이다. 내년에도 [스토리코스모스]는 계절마다 단축마라톤 대회를 열고 외로운 예술가들을 불러들일 것이라고, 나는 들었다. 그 대회의 우승자는 혼자서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멀리까지 달린 자가 아니라, 여럿을 함께 이끌고 달린 자이거나 기괴한 달리기 방법을 발명한 자,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곳을 발견한 자, 반대 방향으로 달리다가 유쾌하게 넘어진 자, 심지어 달리지 않으면서도 가장 먼저 결승선에 도달한 자가 될 것이다. 미안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미리 엉너리를 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완곡한 격려라고 무작정 우길 작정이다.
이번에 두 번 이상 숙독한 작품은 [물 밖으로], [인간의 조건], [왜사나 씨 이야기] 3편이다. [물 밖으로]에는 무명 배우와 죽어가는 고모, 멀리 떨어져서 겨우 연락이 닿는 아버지, 죽은 새끼를 낳은 암소가 병원과 축사와 호수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퍼즐을 맞춘 뒤에도 모호함이 가시지 않았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의 자궁이 이식된 안드로이드 대리모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의 유전자를 지닌 아이를 출산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기발한 스토리를 빈약한 문장이 완전하게 담아내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말끝마다 ‘왜 사나’라고 구시렁거리는 이사나 씨는 [왜사나 씨 이야기]에서, 자살한 언니와 그녀가 남긴 개 ’문리버‘를 사이에 두고 죽음과 삶을 성찰한다. 오래전에 읽었으나 거의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다시 읽은 것 같았다.
그중 마지막까지 만지작거린 작품은 [왜사나 씨 이야기]였다. 별명과 불평만으로 가득 찬 주인공의 평면적 일상, 언니의 죽음에 집착하지만 정작 절박했던 언니의 내면에는 무관심한 태도, 새롭지 않은 에피소드, 예상 가능한 결론, 그리고 반쯤 다듬어진 문장들 때문에 여러 번 독서를 멈추고 행간을 살펴야 했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마치 안개 낀 마을을 무사히 통과하고 난 것 같은 상쾌함을 느끼고 당황했다. 만약 선자보다 더 젊고 더 넓은 문화적 스펙트럼을 지닌 독자들과 함께 읽었다면 이 글의 가독성과 시의성에 주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양팔 저울의 한쪽에 놓여 있는 언니의 묵직한 죽음과 균형을 잡기 위해 반대쪽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왜 사나’씨를 응원하기 위해 슬그머니 그녀 뒤에 서서 존재감을 더해 주고 싶기도 했다. 풍광이 뛰어난 곳에 아름다운 집을 짓긴 했으나 마감이 부족해서 물이 새고 외풍이 밀려들어와 숙박객들, 즉, 독자들이 그 안에서 아직은 통잠을 잘 수 없겠다는 노파심에 굴복해, 결국 이 작품마저도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좀 더 세심하게 개편을 끝냈다는 소식이 들리면 슬그머니 찾아가 둘러보겠다.
내년에도 모두 안녕히 문학 하시길, 아니 무난하시길. 송구영신, 모두에게 송구하다는 뜻이다. (김솔)
단내가 스며 있는 문장을 기다리며
나는 심사를 하며 위에서 고르는 작품 말고 옆에서 곁들 작품을 기다린다. 곁들 작품? 단어를 맞게 썼나 싶어 사전을 뒤진다. "곁들다: 곁에서 함께 붙잡아 들다. - 그는 할머니의 짐을 곁들어 머리에 이어 주었다." 다행이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그대로 적혀 있다. 나는 작가의 옆에 서서 독자 앞에 작품을 함께 들어올리는 그런 장면을 상상하고 있으며 그래서 지금까지의 심사에서 작가만큼이나 큰 영예를 느꼈다.
이번 심사에서는 작품 말고 조금 다른 것을 곁들게 됐다. 섣부른 조언처럼 보일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글 쓰는 수고를 곁드는 마음으로 한마디 남긴다. 부디 자기가 쓴 글에 자기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고 매 단어, 매 문장에서 바짝 긴장하시길 바란다. 잘못 사용한 단어, 서툴고 억지스런 문장은 모든 걸 망친다. (나는 이게 정말 무서워서 '곁들다' 정도의 단어도 굳이 사전을 찾아보고 쓴다.)
아마 다들 스스로 어느 정도 다듬어지지 않았나 싶어 투고했을 것이다. 단언컨대 '어느 정도'로는 안 된다. '어느 정도'는 아무나 할 수 있다. 무수히 갈고 다듬느라 일어난 단내가 문장에 은은하게 스며 있어야 한다. 정격과 파격의 문제가 아니다. 단내가 스며 있는 문장과 그렇지 않은 문장이 있을 뿐이다. 정격이라도 수련을 거쳤다는 믿음은 덜 가고 심심하기만 한 문장이 있고, 파격이라 흥미롭지만 곧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도 계속해서 그것만 더 보여주고 있는 문장이 있다. 그런 작품을 만나면 헛헛해진다.
이번 심사에서는 내내 헛헛했다. 좋은 아이디어를 나름대로 풀어낸 작품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가 없는 작품이 있겠는가. '나름대로'가 없는 작품은 가능한가. 공모전 심사자는 그것들이 빼어나고 다르길 애타게 바라며 읽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보기엔 모두가 '어느 정도'와 '나름대로'에 머물러 있었다. 독자들께 소개할 작품을 찾아내지 못해 죄송스럽다. 투고자들은 심사자가 너무 고루(固陋)하고 고루(孤陋)하다고 실컷 욕하시라. 나도 그랬다. 그러고 나서 또 쓰셔야 한다. (김덕희)
● 시부문 심사평
당선작을 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응모작 다수가 시상이 불분명했고 언어적 수련이 모자랐으며, 신예다운 개성과 패기며 뚝심과 열망도 빈약해 보였다. 예외적으로 이재야의 「기억의 궁전」과 「운동가」 등은 눈길을 끌 만한 작품이었으나 함께 응모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아 충분한 신뢰감을 얻지 못했다. 자신만의 언어를 운용하는 능력을 꾸준히 벼르고 사유의 깊이가 내재된다면 후일 개성 있고 튼실한 세계를 구축하고도 남으리라 기대를 건다. 아울러 응모하신 분들 모두의 정진을 빈다. (이학성, 김종태)
■심사위원 명단■
<소설부문 본심> : 김솔 / 김덕희
<소설부문 예심> : 고요한 / 도재경
<시부문 예심-본심> : 이학성 / 김종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