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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명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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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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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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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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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주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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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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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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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무감각이라는 허방 위에 서 있는 우리에게 싱크홀 사고로 남편 휘를 잃은 주인공은 그와 함께 살기 위한 준비를 했던 시골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오래되고 위태로운 그 집은 허방 난 도로와 인접해 있어, 큰 차가 허방을 치고 지나갈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주인공의 일상을 자꾸 흔든다.민원을 부탁한 마을 이장은 '그 곳은 가정집보단 기사 식당 하기 좋다'며, 집을 팔라고 은근히 압박해오는 상황.무심하고 무감각한, 거대한 안전불감증 같은 허방에 흙을 채우고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주인공의 결심을 응원하며 독서를 마쳤다.'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고는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남에게만 일어나라는 법도 없다. 유난스럽게 굴지 말자. 다들 이런 사연 하나쯤은 튀어 오르지 않게 눌러두고 별일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 부서진 얼굴로 휘가 아픔 없이 나를 본다. 아무것도 모른 척 웃는 얼굴을 집게 손가락으로 사납게 문지른다. 잔금이 간 얼굴에서 그날처럼 피가 흐른다.' - 작품 중에서 작품 속에는 우리 사회를 관통한 여러 비극적인 참사들을 나열하며, 그 사건들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유난스럽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남편 휘를 잃은 주인공의 슬픔과 고통이 어떻게 '유난'이 될 수 있는가. 그걸 스스로 '유난'이라고 자조하며, '다들 이런 사연 하나쯤 눌러두고 별일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며 스스로를 억누를 수 있는가.주인공이 감당해야 할 현실을 묘사하는 이 문장에서 먹먹해지고 말았다. 담담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역설적으로 그 '유난스럽지 않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들'의 무심함과 무감각을 꼬집는 것 같았다.도로에 난 허방에 부딛쳐 오는 차들 때문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집에 사는 주인공의 민원 같은 건 문제도 아니라는 듯 '기사 식당 하면 딱 좋을 자리'라며 집을 팔라고 종용하는 마을 이장 같은 사람들을. 작가는 '언제 갑자기 우리 삶을 푹 꺼지게 만들지 모를 사고들이 정말 남의 일 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균열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섬세하게 조명하고 불편과 불통의 감각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 주인공이 결심하고 움직이는 장면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감각이라는 허방 안에 서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작가의 메세지를 잘 포착해야 할 것 같다. 허우적거리면서도 끝까지 이야기를 완성해준 작가에게 감사와 존경을 전한다.   박은비
우리는 모두 길 위에서 되도록배제했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고급하게 잘 쓰인 잔잔한 소설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천천히 산책하듯 독자에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길 위에서>의 서사를 정리하자면, 무척 간단하다. 고독한 여인이 길 위에선 이야기이다. 걷는다는 건 무엇일까. 일축할 수 없지만, 널널한 표현으로 대체해 본다. 살아가는 것.어느 삶의 풍경화처럼 다가오는 이 소설은 구별된 자기만의 매력으로 가득하다.홀로 미용실을 운영하며 딸아이를 키우는 주인공이 어떤 힘듦에 갇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달받지 않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구구절절 토로하지 않는다. 작가도 그 힘듦을 선정적으로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납득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담담한 듯 보이는 주인공에 절로 마음이 아파져 온다. 그녀의 무게를 전달받게 된다.주인공의 무게를 죄책감, 외로움, 부담, 노릇 등의 단어로 일축할 수 있을까. 그건 어려울 것 같다. 그녀의 무게도, 우리 모두의 개인적 무게도 그리 간단히 해석될 것이 아니다.그럼에도 작가가 길 위에서 펼치는 섬세한 부딪힘과 결말로, 나는 길 위에 선 내게 다가오는 여러 이름 붙이지 못할 감정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간단히 해석될 수 없기에, 내 개인적인 경험들이 파고들 수많은 공간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게 작가의 배려이자, 마음씨이며, 지향하는 어떤 세계관이라고 여겨진 순간, 이런 작가만의 톤과 매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개인적으로 주인공을 두 가지 방향으로 응원하게 되었는데, 박 관장과의 관계, 엄마로서의 미래이다. 하지만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런 잔잔한 소설의 여운은 앞으로의 태도를 말해 주는 데 있다.‘괜찮아요.’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마지막 문장.모두 길 위에선 우리 모두 중 ‘지금 괜찮아요?’에 확실히 괜찮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최소한 난 그렇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런 태도가 가야만 하는 방향을 <길 위에서>는 섬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만으로 큰 위로를 받았다. minimum
꼬리처럼 붙은 이상한 것들 <꼬리 치지 마라>는 인간이 꼬리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근현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배경이 흥미로운 소설, 그러니까 작가의 아이디어가 시발점부터 빛난 소설은 대부분 간결한 서사만으로 새로운 감흥과 흥미를 일으키고, 알고 있던 것을 낯설게 다시 보게 해준다. 이 소설도 그런 축에 속하지만, 간결함 이상의 스케일을, 속 시원한 거대 서사를 갖추고 있다.주인공 태윤은 모두가 꼬리를 가진, 꼬리 이식술이 트렌트가 된 세상 속, 꼬리를 가지지 않은 인물이다. 사회의 제도에 따르지 않는 그는 이런저런 무시와 오해에 시달린다. 고집이 세든, 뭔가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라는 등의 속절없는 인식에 갇히기도 한다.그런 태윤이 실은 순혈테일, 그러니 태어났을 때부터 꼬리를 가진 인간이었다는 것, 그 꼬리가 베일에 싸인 엄마라는 인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서사는 전개된다. 태윤은 꼬리라는 제도 안에서도, 테일테크라는 회사에서도 경계에 선 인물이다. 남과 달라 차라리 무결한 인물로서, 그는 현재의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직업은 작고도 개인적인 사건과 버무려져 그 볼륨을 키운다. 전개가 빠르고 시원시원한 이야기이다.꼬리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회를 그려낸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면서, 그 속 아이러니와 어느 면에서는 무척 우스운 소설 속 세태를 즐기며 독서하면서, 섬뜩함이 몰려왔다.우리는 모두 꼬리를 가지고 사니까.사회가 만든 시스템 속 우리에게 따라붙는 것은 무수하다. 그런 제도의 의의는 무엇인가. 뭐든 그럼직하다. 이 소설 속 꼬리의 기능만큼. 허나 그 의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던가, 혹은 그저 만들어진 의의에 불과한가. 고민할수록 질문은 구태의연해지되, 인상 하나가 강렬해진다.이상하다.모두가 하기에 따르는 건 이상하다. 어떤 행위가 꼬리처럼 달라붙는 건 이상하다. 다르다고 배척하는 건 잘못되었다. 소설은 그런 이상함을 속 시원히 깨부수어 준다. 그게 작가가 던진 커다란 담론에 대한 해답은 아니라 생각되지만, 최소한 이 소설의 독자로서는 커다란 해소를 선물 받았다.소설을 읽고 모두 자신의 꼬리는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츠지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의 새로운 얼굴   엄마가 죽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부고라는 제목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서사를 만들어간 소설은 새롭다. 부고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 참 신선한 조합이다.  나도 얼죽아였던 시절이 있었다. 치아에 이상이 생기면서 차고 뜨거운 걸 섭취하기가 어려워졌다. 몸이 늙어가는 증거가 군데군데 나타나면서 낳아준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엄마도 나처럼 이렇게 늙어갔겠지. 한번도 내게 그런 표현을 안했을 뿐이었던 거구나, 생각한다.   이 작품에는 엄마의 이름도 내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면, 누구나 다 경험했을 것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직 엄마가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할머니를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누군가가 아파서 요양을 하다 떠났을 수도 있을테니까. 심지어 내가 챙겨주던 음식을 좋아하던 반려동물이라도.  나는 설탕 없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던 아버지를 보냈다. 카페인에 약한 엄마에 비해 커피를 즐겼던 아버지. 그냥 문득 생각나서 인사 드리러 갈때면, 드라이브 쓰루에서 뜨아를 한잔 사간다. 부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내가 사랑하던 누군가를 보낸 사람이면 가슴이 저릿할 것 같다. 작가의 진솔함과 잔잔한 표현들이 요란하지 않게 감동적이다.  어느 것 하나, 맞다 맞어, 맞장구를 치지 않을 장면이 없다. 담백하고 순수하고 또한 아름다운 가족의 이야기다. 물론,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엄마의 쓴 인생을 말하지만, 그것이 슬프다거나 괴롭다고 징징거리지 않는다. 나는 작가의 그런 덤덤함을 끌어 안고 싶다. 나도 차갑거나 냉정한 자식이라 늘 마음에 죄스러움을 안고 산다. 아직 노모가 나를 간절히 원하는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오늘내일 가봐야 하는 걸 미룬다. 옆집 어른이 그랬다. 엄마가 살아 있을때랑 돌아가시고 나서 집에 올때, 너무 다르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가 오늘내일 하신다. 그래도 보내드릴 준비를 할 수가 없다. 아마 가셔도 나는 보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아, 어쩌란 말인가.  이 작품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또 그들을 보내야 하고.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가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 하기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함께 뭔가 할 말이 많은 그런 작품이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땡긴다. 아니, 내일이라도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드시게 해야 겠다. 당신의 어머니는 무얼 가장 잘 드셨나요?혜섬
곱씹을수록 사무치는 재미있는 소설을 만났다.<두 번째 탄생>은 3기 대장암 환자인 중년의 남자가 자신이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설정부터 기발하며,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상상이 아닐 수 없다. 볼록 튀어나온, 그로 인해 찢어발기는 통증을 담은 자신의 복부를 애틋이 쓰다듬는 평범한 중년 남자의 이미지를 상상해 보면, 이 소설은 이미 낯설고 재미있다.허나 이런 통통 튀는 현재 뒤 감춰진 것들을 생각해 보면, 마냥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는다. ‘도가 나한테서 다시 태어나려나 봐.’고통에도 해맑은 황석과 그런 황석을 여전히 사랑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지원하는 아내. 그사이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도라는 아들이 자리하고 있다.아들이 죽고, 남은 두 부모는 상실과 트라우마, 죄책 등의 무거운 감정들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지탱하고, 방어하고 있다. 황석은 죽은 아들이 자기 배에서 다시 태어나리라 믿고, 아내인 화자는 조금씩 동조하기 시작한다. 황석이 미쳤다는 말에 남동생의 뒤통수를 후려치기도 한다. 그런 두 부부의 이야기에 독자인 나 역시 빨려들게 되었다.곱씹을수록 사무치는 감정들이 도드라지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소설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하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진귀한 경험이었다. reader
손바닥에 바늘로 새겨서라도 기억하고픈 것들에 관하여 손바닥에 바늘로 새겨서라도 기억하고픈 것(출처-브런치, 임재훈 NOWer) 어렸을 때 자주 체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바늘로 손가락 끝을 따 주곤 했다. 쿡, 하고 굵은 바늘이 손가락 끝을 찌르면 금세 검붉은 피가 솟아났다. 이제 곧 좋아질 거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당시 나는 그런 행위와 말들이 다소간의 미신처럼 여겨졌다. 곧 죽을 것처럼 배가 아팠는데 이깟 바늘이 뭐라고. 여전히 바늘이 지닌 마법 같은 신비한 효험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한다. 한편으로 당시에는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린 것 같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심리적인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임재훈 작가의 「바날이 소설」을 읽었다. 바날이 이야기는, 근미래 ‘위안부 피해자 유가족 육필 원고 디지털 복원 사업’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외부 서사는 그러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바늘’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 소재이다.  서사에 들어가기 전, 잠깐 바날이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다 임재훈 작가의 브런치, 임재훈 NOWer에 접속하게 되었다. 브런치 글에서 바날이에 대한 어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신 다른 수확을 얻었다. 작가가 챗gpt로 직접 작업한 바날이 소설 삽화 작업(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날이 소설을 쓰게 된 직접적인 작중 의도 같은 것들을 엿 볼 수 있었다. 손바닥에 바늘로 새겨서라도 기억하고픈 것. 시대는 흐른다. 많은 것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잊혀져 간다. 저절로 잊히는 것들이 태반이다. 반면, 불순한 의도로 인해 ‘망각되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들도 있다. 바날이 이야기는, 후자를 다룬다.  불순한 의도는 강력한 마법을 지닌다. 그것은 마치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썩어빠진 음식과도 같다.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야를 가리고 무의식에 침투한다. 그로부터 기억이 지워지거나, 전혀 다른 기억으로 변질된다. 그것은, 마치 진실을 가장한 망령처럼 집단의 무의식을 떠돌아다닌다. “학생, 배 아프지요?” 바날이 이야기에서 바늘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배가 아픈 주인공에게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한다. 주인공의 아픔을 할머니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할머니는 바늘을 꺼내, 주인공의 손을 따준다. “여어기가 제주요- 올라가면 울릉도- 아이고야 잘 왔네- 백길 따라 이백 리- 오옳거니 독도라!” 쿡. 할머니의 바늘이 주인공의 손에 박힌다. 새카만 핏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검불그스름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할머니가 주인공 손에 그려 준 노래의 지도를 따라, 주인공 손에 난 피를 따라, 어느새 서사는 흘러흘러 바날이가 살았던 과거의 시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늘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만일, 할머니가 그날 바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혹은 주인공이 할머니의 바늘을 거절했더라면, 바날이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아주 사소한 바늘 하나를 통해, 주인공의 체기는 물론, 오랜 세월 불순한 의도로 인해 꽉 막혀 있던 주인공 내면의 무의식 통로가, 뻥~ 뚫리는 것이다. 그 통로는, 주인공이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역사적 진실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아주 오래전 한 섬에 살았던 바날이를 만나게 된다. 아주 오래전 대장장이 부녀가 이 마을에 살았다.  바날이 소설 속에, 또 하나의 바날이 이야기가 생성된다. 최초의 바날이 이야기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어느덧 이야기는 흘러 흘러, 주인공이 처한 현재로 되돌아온다. 그 결말 또한 인상적이었다. 바날이 이야기는, 이제 주인공의 몫으로, 더 나아가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오랜 세월 막힌 체기를 뚫어주듯, 작가가 가진 바늘이 한 독자의 무의식을 관통했다. 이 소설을 통해 얻은 질문을 오래도록 곱씹어 봐야겠다.  한 가지 추가적으로 덧붙이자면, 임재훈 작가의 작품은 특유의 매력을 지닌다. 매번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다. 작가가 가진 어휘는 놀랍도록 풍부하다. 서사에 맞게, 주인공에 맞게, 마법의 어휘 팔레트를 가진 것만 같다. 비법이 무엇인지, 담에 작가를 만날 기회가 주어지면 꼭 물어봐야겠다.  바날이.  독자로서의 바람이 생겼다. 바날이가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한다. 고운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서, 주름진 이마와 얼굴에는 행복이 깃든 미소, 그리고 한 손에 든 작은 바늘. 정겹게 불러주는 노래와 손바닥에 그려준 섬의 지도를 따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기억에 이르길 바란다. 이시경
몸으로 하는 사랑을 위하여   '러브체어'는 해석하자면 '사랑을 위한 의자'다. 하지만, 섹스를 위해 고안된 의자니까, 일차원적으로 사랑을 섹스로 혹은 섹스를 사랑으로 말하기는 쉽지않다. 하지만 그건 지금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러브체를 읽으면서 사랑에 대한 혹은 예술을 향한 열정에 대한 소설로 읽었다. 즉, 인간의 고귀한 열망.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해보면, 몸으로 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싶다. 심지어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건데. 이 작품은, 영화감독인 주인공이 시나리오가 잘 되지 않아서 J와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화자의 이야기를 듣는 둘은 별 반응이 없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중학생 시절 ‘러브체어’라는 단어가 적힌 시골 장면을 떠올린다. 거기에서 우리들의 추억이 소환된다. 그 당시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거의 다 구경했을 그 플래카드. 얼마나 생소하고 생뚱맞은가. 나도 봤다. 나는 방성식 작가의 이런 위트에 감동했다. 주인공은 그 이후, ‘러브체어’에 대한 환상이 생겼고, 심지어 지금은 그걸 만든 회사까지 찾아간다. 물론, 출시 후, 5년 즈음 됐을 때, 폐기?되었지만, 섹스와 러브체어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나는 ‘러브체어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웃다가 심각해졌다. 주인공이 꿈꾸는 것은 예술 영화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전혀 못 쓰고 있다. 영화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심난해졌다. 우리는 무언가를 원하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설령, 그것이 별 호응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야기 해본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좋은 결과물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러브체어를 찾아서’ 는 그런 면에서 성공적이라고 본다.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이렇게 소설로 완성되었고 아마, 주인공은 J커플의 체험을 통해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변화를 겪으면, 내가 숨 쉬던 곳의 공기가 달라지듯이, 그가 입에 문 담배 맛이 달라졌으므로. 몸이 바뀌었을까? 확실히,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인 모양이다.  ​ 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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