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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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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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범기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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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성호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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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상현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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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주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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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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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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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금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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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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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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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편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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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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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사랑도 조립할 수 있을까 소설가는, 언어를 통해 영감의 바다로부터 전혀 새롭고 낯선 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낯설고 새롭다는 것의 의미는, 인류 공통의 의식을 기반으로 하되,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낚아 올릴 것인가. 이 문제는 작가만의 스타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박은비 작가의 조립 가족을 통해 낯설고 새로운 스타일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바야흐로 가족의 형태가 급변하는 시대이다. 경제적, 사회문화적, 그리고 정책적 요인 등으로 인해, 과거 대가족이 주를 이루던 시대로부터 핵가족 시대에 이르러, 1인 가구의 형태까지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로봇이라는 예상치 못한 존재가 우리의 일상까지 넘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후 우리의 가족 형태는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까.  위 질문과 관련하여, 다시 작가의 스타일로 돌아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의미 있게 와 닿은 지점은 다음과 같다.  (박은비 작가 님의 소설은 매작품마다 독자에게 재미와 의미를 주며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주기에,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는 덤으로 가져간다.)ᅠ그것은 바로 조립 가족이라는 말에서 그 해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는 누구도 사용한 적 없는, 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단어이다.  신기하게도, 조립 가족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마치 앞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할 가족의 형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반려로봇과 AI가 만연한 시대에, 우리의 의식은 조립 가족이 보여주는 일상에, 이미 진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립 가족에서 젊은 부부가 로봇 아이를 대하는 모습은 진짜 인간 아이를 다루는 것과 동일하다. 그들은 로봇 아이에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며 그만큼 '사랑'에 가까워지게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로봇 아이를 흙에 묻는 장면이었다. 기술 진화의 정점에서 '흙'이 주는 의미란 무엇일까. 조립 가족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으로 조립된 가족이 아니다. 오히려 파편화된 사랑을 통해, 가족에 내재하는 사랑의 원형에 대해 말해준다. 누구나 자식을 키우면서 겪을 법한 대내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기술된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가족 사랑의 연대감을, 파편화된 조립 가족의 형태를 역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낚시를 안 해 봐서 잘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소설을 쓴다는 행위가 언어(言語)를 낚는 행위와 유사하다면, 이처럼 유일무이한 언어(言魚)인 '조립 가족'을 낚고 잘 가공하여 독자의 식탁에 올려준, 작가의 독창성에 감사를 보낸다.  솔트
누구세요?   인환은 식사 메뉴 쇼핑 리스트를 들고 마트 계산대에 서 있었다. 전화가 울려 받아보니, 아내인 아영이 재료 목록을 다시 보낼테니 메뉴를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그는 아내의 변덕에 지쳤다. 처가의 멸시와 아내의 허영을 참는다 하더라도 초단위로 널뛰는 아내의 기분은 지겨운지 오래다. 현관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건전지 빼놓은거 모르냐는 둥, 다시 누르니 작동이 되는 둥, 헤프닝이 일어난다. 아이가 경수네 갔다고 하는 말에,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정안은 둘의 과거 음악을 같이 한, 아영이 정안의 중요한 연주회를 망친 아픈 과거가 있는 사람. 그들의 관계는 끝났고, 정안은 독일로 유학. 정안이 이미 집에 와 있고 인환은 어리둥절하다. 부주싸움을 하러 둘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아영의 전화가 울린다. 경수맘이란 전화를 받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문을 열자, 아이를 데리고 온 여자가 엄마와 아빠를 다 닮았다고 한다. 등 뒤로 인환이 다가오고 문 밖의 여자가 누구세요? 하고 묻는다.   초대는 서사에 밀도감이 엄청나다. 이야기가 계속 물고 이어지면서, 그들이 현재 왜 이런지 알게된다. 그 안에 말 못할 사정들이 담겨있다. 치밀한 계획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남자 인환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섬세하고 불안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아내와 정안의 사연이 드러난다. 말 못한 사정들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지만, 말 못함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들이 보인다. 세사람의 인생이 그대로 비춰지는 듯 하다.  또한, 마지막에 부재중 전화가 네 번이나 찍혀 있어 어쩔 수 없이 받은 전화로, 현관을 열어 주었을 때, 문 밖의 타인이 오해를 하고 오히려, 아이 아빠인 인환에게 누구냐고 하는 장면은 소름이 돋는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모두. 이 소설의 백미다. 꼭 읽어 보길 추천한다. 혜섬
아이처럼 자꾸만 지껄이고 싶었다     모든 부모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란다. 아니, 인간이라면, 모든 생명이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도영은 이 부부에게 온 아이다. 도입부에서 무슨 테러 이야기인가 했다. 그런 장치들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전자기기와 심장이란 단어에서 "생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상상했다. '우리 도영이'라는 표현으로 부부의 아이구나, 짐작했고.   하지만, 처음부터, 전자 기기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프로그램, 초기화, 백업 데이터, 복구, 라는 등의 단어로 추측할 수 있었다.   "우리 도영이는 죽는 거예요?" 라는 위트있는 대화에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키드노이드 로봇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보시기 힘드시면 밖에 나가 계세요." 라는 대화에서 일종의 전복 혹은 동일시 하는 사물에대한 인격화를 느낄 수 있었다.   부부가 처음 조립을 하는 장면과 아이에게 작명을 하는 부분에서 진짜 자신이 낳은 아이 같이 하는 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도영이 부부를 관찰함으로써 학습을 해나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자꾸만 떠들고 싶었다." 는 진술에서 아버지의 임종 직전에 나도 그랬다.   생명을 살리고 싶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말하고 싶으니까. 죽지 말라고, 살아나라고.혜섬
어디로든 갈 곳이 필요해... 내가 있는 곳은 예비공간 나는 지난 몇 년간 히키코모리였다. 병원을 가거나 남자친구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일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최선을 다했던 직장생활에서 처참한 적응 실패를 겪었고, 그 충격은 실직으로 이어졌다.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채 방에 갇혔다. 방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어거지로 방 밖으로 나가도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진정제를 입에 털어넣고 심호흡하기 일쑤였다. 처음에 엄마 아빠는 나를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러다가 죽을까 봐 매일 방문을 열어 내 생사를 확인하셨다. 죽은 듯이 자고 있으면 코에 검지 손가락을 가만히 올려보시기도 했다. 정말이지 암울한 시절이었다.  방에 갇힌 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SNS였다. 나는 주변인들의 SNS를 염탐하며 열등감을 채워나갔다. 동창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결혼을 한 친구도 있었고 승진을 한 친구도 있었다. 내 자리는 이 곳, 고작 몇 평 남짓한 작은 내 방 안.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공격적으로 좋아요를 눌렀다면, 나는 좋아요를 절대로 누르지 않았다. 스크롤, 스크롤, 내 밑바닥을 향해 하루종일 스크롤을 내릴 뿐. 점점 밀폐된 곳으로 나는 내몰리고 있었다. 숨을 쉬기 어려운 나날들이었다.   그런 내가 히키코모리 생활을 청산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가상의 회사생활을 하는 청년모임활동과, 남자친구의 아르바이트 청탁이었다. 가짜 회사생활 놀이나 간단한 아르바이트조차 할 힘이 없을 정도로 나는 망가져 있었지만, 다만 내가 가장 간절했던 것은 하나였다. '어디로든 갈 곳이 필요해...' 가상의 출근을 하고, SNS에 출근도장을 찍고, 오늘 하루 무언가를 주절주절 끄적였던 '업무 증빙'을 하고, 가상의 퇴근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댓글을 달아 칭찬해준다. 간단한 규칙이었다. 그 규칙을 3달 동안 지키면 되었다. 처음에는 '이딴 게 무슨 소용이지?'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나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용기가 생겼다. 남자친구가 부탁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비난할 것 같다는 불안과 공포는, 따뜻한 햇볕과 부드러운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에 사그라져버렸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긴장해서 손을 떨고 말을 더듬었지만 끝까지 해냈다.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SNS를 자주 하지는 않게 됐다. 주변인들을 염탐하는 일도 없어졌다.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나왔는지. 내 예비공간은 어떤 곳이었는지. 소설 속의 예비공간의 벽은 무너져내렸다. 주인공이 준비되지 않은 타이밍에 그런 사고가 발생해서 애석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준비가 되어도 힘든 '탈출'을 강제적으로 하게 되었다니. 그런 마음으로 이입하며 읽자 소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오늘날, 나처럼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낀다. 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서 갇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든 갈 곳이 필요해. 주인공에게는 그게 예비공간이었던 것이리라.   언젠가, 준비가 되면, 스스로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예비공간의 본질이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하며 독서를 마친다. 단정하면서도 정확한 문장으로, 예비공간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잘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작품을 완전히 오독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오독도 꽤 괜찮다고 제멋대로 생각해보려 한다.     박은비
[단독] 그레고르 잠자가 외계인?! ⋯ 변신 예비된 현대인들 대충격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          전지적 ‘실직 경험자’ 시점으로 작성한 리뷰임을 먼저 밝혀 둡니다. 소설을 얼마간 오독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그 오독 덕에 이 작품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용케도 영어로 된 노랫말을 다 외우는 어느 팝송 리스너처럼요. 「예비공간」을 읽으며 오래전 제 실직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재취업 기간 동안 외출도 잘 안 하고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했었습니다. 그때 『변신』을 다시 봤습니다. 고등학생 때 ‘세계 명작 필독서’라는 이유로 어거지로 완독한 이후 첫 재독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고 출근 준비를 하려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해 있다, 그래서 자기 방 안에 갇혀 버린다, 동거하는 식구들이 문자 그대로 그를 ‘벌레 취급’ 한다는 설정. 세계 명작 필독서라서 억지로 읽었던 시점엔 느끼지 못했던 압도적 몰입감에 책을 쥔 양손이 후들거렸습니다. ‘이거 내 얘기네?’ 재취업에 고전 중인 실직자. 이 사회에 아무 쓰임이 없는 무직, 무소득. 하루아침에 사람에서 벌레로 변해 버린 존재.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 #세계명작 #필독서 #카프카 같은 해시태그를 다 걷어내고 오로지 ‘이야기’ 자체에 완전히 몰두한 읽기 체험. 실직 후 정독한 『변신』​은 제게 큰 위로였습니다.(역시나 카프카 본인도 직장 생활을 하며 소설을 썼다고 하지요.) 「예비공간」의 ‘예비공간’이 그 시절 저의 작은 방,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오도 가도 못하는 방과 겹쳐 보였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비공간」 속 주인공이 인스타그램 중독자라는 점입니다. 이 소설은 예비공간 이용자들—실직자(전직 방송국 PD), 게임 중독자, SNS 중독자—을 “외계인”으로, 그들과 정확히 대비되는 자들—멀쩡히 경제 활동 잘 해 나가는 이들—을 “현대인”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외계인 눈으로 보면 현대인들도 외계인일 테지요. “상단에 나열된 스토리들, 화려한 띠 둘러쳐진 개개인의 행성을 검지 하나로 탐사하겠다.”는 서술로 짐작할 수 있듯, 주인공에게는 인스타그램 속 “프라하의 전경, 파인다이닝 코스, 주식 수익 인증, 갈아치운 애인과 네 컷 포토부스 사진들⋯⋯” 등속이 전부 외계/이계의 삶입니다. “불행이 거세된 외계에 친히 좋아요를 하나하나 눌러주겠다.”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인처럼, 주인공은 자신이 갖지 못한 현대인/지구인의 삶-이미지마다 ‘하트’ 공격을 가합니다. 마치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삶들을 모조리 취할 수 있다는 듯이. 이런 손장난은, 소설 속 방송국 PD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같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리얼을 표방한 페이크’. 이를 소설은 대단히 시각적인 연출로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킵니다. “필터가 적용된 류는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기에, (⋯) 내버려 두었다. (⋯) 아이폰을 내렸다. 거기엔 그냥 류가 있었다. 도로 올리자 류는 단번에 괜찮은 류가 되었다. 괜찮은 류에게 좋아요를 누르기 위해 그의 이마를 연달아 두 번 찔렀다.” 그렇습니다. 가상의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나 먹히는 ‘손가락 하트 공격’ 따위, 현실에선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필터가 적용된 (⋯)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 그야말로 ‘사람다운 모습’을 ‘공유’해 오는 데 실패한 주인공. 이러나 저러나 무직, 무소득의 외계인일 뿐입니다. ‘이거 내 얘기네?’하는 생각이 또 불쑥 생겨 버리면서 순식간에 「예비공간」을 읽었습니다. 일부 게으른 기자들이 쏟아내는 ‘팩트 노체크’ 기사들과 제목 낚시, 유튜브의 과다한 ‘어그로’ 콘텐츠와 섬네일, 인스타그램의 각종 ‘자의식 과잉’ 게시물들이 전부 「예비공간」이 이른 ‘필터’와 ‘리얼 표방 페이크’의 사례 아닌가 싶습니다.  올해가 제2의 IMF가 될 것이라는 경제 전문가들의 전망을 자주 접합니다.(부디 리얼이 아니라 페이크이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현대인들은 모두 ‘변신이 예비된’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적 박탈감 유발’ 이미지들을 경계해야겠다는 각성을 문득 해 봅니다. ‘저렇게 살아야 사람다운 건가, 저렇게 안 살면 난 벌레인가.’ 하는 자격지심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겠습니다. 소설 속 예비공간에 제 발로 들어가지 않도록, 그러니까 스스로 만든 마음의 밀실에 갇히지 말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예비공간」을 통해 제 실직 경험과 그레고르 잠자의 신세를 떠올렸고, 그러다 보니 영화 ⟨맨 인 블랙⟩에 나오는 바퀴벌레 외계인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새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짤 중에, 고전 소설 제목을 웹소설 느낌으로 바꾼 게 있더군요. 가령 『인간 실격』은 ‘재벌집 폐급 아들’, 『파우스트』는 ‘​S급 악마에게 집착당하고 있습니다’ 같은 식입니다. ‘그레고르 잠자가 외계인이었다는 썰 푼다’ 「예비공간」의 제목을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하며 혼자 피식했습니다. 최악의 구직난, 실업 대란이라는 요즘. 저를 비롯한 모든 분들의 일상에 필터링 없이 순수 지구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날이 도래하길 바랍니다. 아무도 외계인으로 변신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임재훈
비어 있음이 쏟아져 내려, 어느 존재로 완성되었다 되도록 배제했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마, 킴>은 실존적 주제에, ‘나’의 이야기로 일인칭 시점을 채택했음에도, 독자로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자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여러 ‘너’를 통해 나에게 가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척 댄디한 도구들과 특색 있는 인물들을 징검다리 삼아.‘나’란 존재는 어떻게 발산하는가, 내뿜는가. 주인공은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결혼, 직업, 남녀, 부모, 문화, 유교, 위계질서 등 여러 사회적 제도가, 주인공 김가영에게는 그저 이상했다. 비문증과도 같은 의아감으로. 허나 그런 의아감이 그녀의 삶에 커다란 비중이 있지는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일 터이다. 모르고 지나친다면, 딱히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닌 그런 느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수긍한 채 살아간다.김가영에게 그런 ‘이상함’은 두 번 선명해진다. ‘김가영’이라는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을 만난 일이다. 주인공 김가영은 청소년기에 만난 ‘김가영’에게 크게 동요했다. 반발심, 그리고 열정이었다.허나 설마흔에는 달랐다. 무신경과 허무. ‘나’는 유일무이하지 못하고, 그것은 온당하다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 ‘이상함’이 두 번째 김가영의 ‘사라짐’으로 다르게 선명해진다. ‘비어 있음’에 대한 감각. 주인공 가영은 그것을 ‘공물감’이라 칭한다.그녀는 뭐가 이상했을까. 의아했을까. 독자로서 추측해 보건대, ‘타인과 제도만으로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인공 김가영은 삶으로 꾸준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왔다. 허나 그것은 ‘번역사’라는 그녀의 직업과 마찬가지로, 주관을 최대한 배제한 타인과 제도를 통해서였다. 남으로 내가 서고, 남으로 내가 행위하고, 남으로 내가 생각하고. ‘나’는 비어 있던 것이다. 그런 비어 있음이 두 번째 맨땅의 헤딩 김가영의 사라짐으로, 이물감에서 공물감으로 진화했다고 해석해 본다.타인으로 완성되는 삶, ‘나’가 비어 있는 삶, 때문에 상처받고, 상처 주는 삶. 허나 그것이 주인공뿐이랴. 남편을 잃고 그의 차를 타고 다니는 어머니도, 미네소타 출신으로, 동향 사람 중 아무도 모르기에 광양을 선택한 마마 킴도, 나머지 두 김가영도 똑같다. 모두 제대로 된 정체 없이, 공물감과 함께 거한다.그런 세 인물이 소설의 주 배경이 되는 마마 킴의 카페에서 만난다. 속의 장면도, 대화도, 서로를 연결하는 방식도, 아주 절묘하며, 댄디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를 위로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쿨하게 건넨다. 아마 서로의 ‘공물감’ 그대로를. 그런 ‘건넴’이 합주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 도구의 사용이 세련되었다. 모두 직접 읽고 그런 합주를 느껴 보면 좋겠다.종국에는 여러 인물의 ‘비어 있음’ 그 자체가 독자인 내 앞에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보랏빛 비처럼 쏟아지는 그 ‘비어 있음’은 독자인 내게 말하고 있었다. 널 아프게 하려던 게 아니라고, 서로의 ‘비어 있음’은 서로에게 고통을 주려던 게 아니라고.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독자인 나를 포함한 인물 모두가 합일되니, 주인공 ‘김가영’과 엄마, 마마 킴 셋의 존재가 노래 <Purple Rain>과 함께 제각각 독창적으로 발하는 듯했다. ‘완성’이란 말을 작가가 좋아할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무언가가 완성된, 낯선 아우라로 다가왔다.‘나’란 어떻게 발산하는가. 내뿜는가. 비어 있는 서로의 소통,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지각, 그러다 이따금 ‘나’가 하는 의역의 하모니가 아닐까 싶다. 작중 <Emanate> 작품처럼, 모작 끝에 ‘나’가 태어나듯이.작가만의 아이러니가 낯설다. 독창적이고, 댄디하다. 없음으로 있음을 직조해 나가는 방식이 놀라웠다. minimum
창작의 숲, 쓰고 잊고 다시 쓰는 계절  [스포일러 주의] 소설 줄거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독자인 제게 이 소설은 ‘창작자’의 ‘창작 기간’을 근사한 상징과 은유로 빚은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주인공을 이해해 보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다음의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① 숲속 목조 주택에서의 임시 거주, ② 글쓰기 모임 참여, ③ 난임. 셋 다 문자 그대로의 정보라기보다는 상징과 은유로 느껴졌습니다.나무들이 빼곡한 숲에, 그 나무들을 재료로 만든 집에 혼자 머무는 주인공. 이제 막 창작을 시작해야 하는 이의 처지 같습니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이미 수두룩한 작품들로 둘러싸인 현시점에서 자기만의 ‘새로움’을 써 내야 합니다. 음악가도 비슷합니다. 수많은 기존 히트곡들을 레퍼런스로 참고하되, 표절 시비에 걸리지 않을 완연한 신곡을 뽑아 내야 합니다.소설 속 주인공의 글쓰기 소재가 왜 하필 ‘나무’인가. 그녀의 임시 거처가 ‘숲속 목조 주택’이기 때문일 거라 짐작합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이 만든 ‘나무의 집’에서 나무에 관한 글을 쓴다는 설정은, 창작자가 나무-레퍼런스 속에서 자기만의 나무-독창성을 짓는다는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주인공이 참여하는 글쓰기 모임에 “출간 작가”가 소속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혹은 되고 싶었으나 끝내 실패한) 롤모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동시에 주인공이 자기다움-독창성을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내면의 불안과 의심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아닐까요. 일테면 이런 대목도 등장하지요. “출간 작가인 그녀”가 주인공의 나무 소설에 대해 평가하는 장면 말입니다.“뭐 나쁘지는 않은데 너무 순한 맛이에요. 좀 더 선명하게, 펀치라인을 살려보세요. 등장인물들도 더 유용하게 활용하시고.”이 단평을 주인공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소설 안에 굳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독자로서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출간 작가한테 저런 소리를 듣던 시점에 주인공은 이미 창작자로서 자기 창작물과 ‘대화’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따라서 누가 뭐라고 하든 크게 ‘마상’을 입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검토 의견을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닐 테고, 취할 것을 취하되 창작자로서의 자존감을 쉽게 잃지 않는 건강한 패기를 갖추었다랄까요. 제가 읽은 「숲」의 주인공은 그런 창작자인 것 같습니다.주인공의 난임은 「숲」 이야기가 ‘창작자의 창작 과정’으로 다가오게 된 결정적 단서였습니다. 흔히 창작의 고통은 산고에 비교되고는 합니다. 창작물을 ‘내 새끼’라 표현하는 창작자들도 더러 있고요. 오랜 난임 치료로 결국 ‘혼자’ 남게 되었다는 주인공의 사연은, 마치 지난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대표작을 갖는 데 실패한 비운의 예술가를 연상시킵니다.소설 속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친구 ‘미영’은 특별합니다. 어쩌면 ‘나무 씨’보다 더. 결혼 전에 덜컥 임신을 했고, 수염 기른 남편과 살며, 혼자 사는 친구를 각별히 챙기는 인물 배경 설명과 행동 양상이 제법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좀 과한 감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인공의 ‘베프’ 미영은 「숲」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문자 그대로’인 캐릭터로 보였습니다. 상징, 은유,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를 기르고 남편과 살며 친구를 아끼는 존재, 그러니까 외로운 창작자에게 꼭 필요한 ‘실체적 위로와 격려’의 제공자랄까요. 아이를 가졌고, 남편과도 화목한 미영을 주인공이 부러워하거나 시샘하는 묘사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제게는 큰 감동이었습니다.소설은 벌목의 계절이 도래하면서 절정으로 흐릅니다. 풍요로웠던 창작의 숲이 점점 허허벌판이 되어 갑니다. 그즈음 주인공의 나무 소설도 완성이 된 듯한데, 작품의 영감이 되어 준 ‘나무 씨’도 소멸합니다. 주인공 스스로 그것을 없앱니다. 땔감으로서 마지막 몫을 하는 ‘나무 씨’의 정념과도 같은 불길 속으로, 주인공은 자기 원고를 던져 태웁니다. 한 작품을 다 끝내고, 그다음 창작의 단계로 나아가는 결연한 의지처럼 읽혔습니다. 신성한 제의 같기도 했습니다.창작의 숲에서 보낸 쓰고 잊고 다시 쓰는 계절. 「숲」이 선사하는 감동과 메시지가 소설 속 적송처럼 우람하기 그지없습니다. 주인공은 또 어디를 찾아 홀로 머물게 될까. 그곳에서 만나고 또 이별하게 될 ‘○○씨’는 어떤 모습일까. 베프 미영이는 주인공에게 무슨 반찬을 해 가지고 놀러올까. 다 읽고 나니 ‘나만의 ○○씨’보다는, 언제나 곁에 있어 줄 ‘미영이’가 더 절실해집니다. 임재훈
나만의 롯.소.코.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 아는 동생이 한동안 '도파민 디톡스'를 하겠다며 설쳐대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도파민이 뭔지도 잘 몰랐는데,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 호르몬의 일종이라고 했다. 그걸 왜 '디톡스' 해야 되냐고 동생에게 물으니,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도파민에 취해 있기 때문에 행복을 잘 못 느끼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도파민을 절제함으로써 사소한 일에도 크게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상태, 즉 '도파민 디톡스 상태'가 되어야 인생이 행복해질 거라고 말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도파민 디톡스'에 집착하던 아는 동생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 동생의 도파민 디톡스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그 동생이 행복해보이느냐. 아주 행복해보인다. 내 생각에는 '도파민 디톡스'를 하는 행위 자체에 도파민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소설에서 도파민은 마치 사람 같다. 롯데, 소맥, 코인 파트로 나뉘어 마치 회사의 부서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 주요 소비층인 남자가 어느 날 도파민 중단 선언을 하면서 비상 사태가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주 흥미로운 전개다. 다 읽고 나서 내 머릿속의 롯, 소, 코 같은 파트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를 흥분하게 하는 것들이라. 문학, 쇼핑, 게임 정도?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도파민이 과다해지면 일상 생활이 약간 뭉개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뭐, 나는 주인공처럼 도파민 탓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는 동생의 말처럼 우리는 너무 많은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상의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는 걸지도.   도파민을 특정 인물처럼 묘사하는 것이 특징적이고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읽어보시고 내 머릿속의 롯, 소, 코는 뭘지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박은비
아 맞다, 취재 대상은 ‘제물’이 아니라 ‘동제’였지 ​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          “살해 현장을 방불케 하는 처참한 광경과 냄새”라는 소설 초반부의 직접적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의 결말, 즉 ‘제물’의 실체를 예측해 보도록 만듭니다. 셀프 스포일러인 셈인데, 저는 이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느꼈습니다.[자, 잊지 마세요. 취재 대상은 ‘제물’이 아니라 ‘동제(동신제사)’라는 걸.]작가가 이런 안내판을 세워 둔 것 같았습니다. 안내에 따라 읽어 나갔습니다.「동제」의 줄거리를 아주 간략히 요약하면 ‘군내(郡內​) 소규모 월간지 기자의 취재 후기’입니다. 주인공이 현장 취재를 나서면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기사 작성의 기본 요소는 육하원칙이지요. 그래서 주인공은 질문을 많이 합니다. 동제 준비에 한창인 마을 노인들에게 이것저것 묻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답을 못 듣는다는 거죠.— #1“우리는 제사 때 정종 안 쓰고 감주 쓴다 아입니꺼.”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랬다는 막연한 대답만 돌아왔다.#2“신위를 묻는 과정이라예. 원래 동제 끝나고 쓴 신위들은 제물의 일부랑 같이 서낭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서 묻습니더.”“그렇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옛날부터 그래 해왔기 때문에 그라지예. 특별한 이유는 잘 모르겠네예.”#3동제가 아직 남아 있다는 건 과연 좋은 것일까. 미지근하게 식은 감주를 마저 들이켰다.—#1과 #2는 취재원들과의 문답, #3은 주인공의 자문입니다. 제주(祭酒)로 왜 감주를 써야 하는지, 제를 마친 후 신위(神位)를 왜 성황나무 앞 구덩이에 매장하는지, 동제에 참여하는 사람들 누구도 답을 못합니다. 제주(祭主) 역할인 ‘주 씨’ 노인조차 이유를 모르고요. 하기야, 동제의 대상인 신주(神主)부터가 이미 미지의 존재입니다.이쯤 되면 이 취재는 망한 겁니다. 기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3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는지 아무도 이유를 모르고 단지 전통이라는 이유로 남아 있는 이 동신제사, 대체 뭐지⋯?해체된 제물의 살점이 마치 소설 속 ‘껍데기만 남은’ 허례허식 동제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소설의 내용을 곰곰 곱씹을수록 소름이 돋는 것이, 동제 준비 과정 중 ‘이유가 명확한’ 것은 제물 해체가 유일했습니다.과연 주인공은 추가 심층 취재를 이을 것인가. 진짜로 그 마을이 행해 온 동제란 일종의 ‘하드고어 고려장’이란 말인가. 독자는 알 수 없습니다. 기자가 취재를 중단했으니까요. 다만 소설에 기록된 전지적 기자 시점의 ‘팩트’를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해 볼 따름입니다.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무엇에게 죽음을 맞았는지도 불확실하고, 심지어는 시신도 없이 장을 치르는 마을. 거주민들의 관심사는 죽음의 대상이나 연유가 아니라, 그저 ‘제사’뿐인 것 같습니다. 제사-전통을 계속 잇기 위해 죽음을 반기는 게 아닌가 하는 섬뜩한 감상도 해 보게 됩니다.상여소리 인간문화재 추천을 받을 만큼 죽음을 큰소리로 만방에 알리던 ‘배 회장’. 그의 사라짐이 독자인 제게는 ‘죽음의 음소거’, ‘죽음의 익명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기묘한 밸런스입니다. 제사를 전통으로 간직한 마을에, 정작 사람의 죽음은 소리도 이름도 없이 몰래 발생한다는 것이.「동제」 후속편을 기대해 봅니다. 제대로 각성한 주인공이 목숨 걸고 ‘빡센’ 르포르타주를 쓰는 이야기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임재훈
‘인 서울’도 ‘인 사평’도 포화 상태라니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서울 인구가 포화 상태라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고, 수험생들과 부모들의 입시 스트레스를 부추기는 교육 정책 혼선 또한 자주 듣는 소식입니다. ‘인 서울’ 러시만이라도 중단되어야 인구 밀집도가 조금은 낮아질 것 같은데, 그럴 일은 왠지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을 읽다 문득 궁금해져서 통계청 지표누리 사이트를 들어가 봤습니다. 인구 밀도가 높은 ‘시’와 낮은 ‘도’의 차이가 극단적입니다. 서울 15,533명/㎢, 부산 4,258명/㎢인 반면에 강원 91명/㎢, 경북 137명/㎢입니다.(2023년 기준, 출처 — https://bitl.to/3nJR) 참고로 서울 면적은 605㎢, 총 인구는 2022년 기준 941.1만 명으로 집계되어 있었습니다.수도 서울을 ‘터져 버리기 일보 직전’인 공간으로, 그곳에서 ‘인 서울’을 목표로 공부하는 고등학교 3학년생들을 ‘터져 버린 아이들’로 설정한 작가의 의도에 크게 공감합니다.단지 ‘터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소설은 수험생들의 육체를 풍선처럼 부풀려 말 그대로 ‘날려보내는’ 상상력을 추가합니다. 그리고 약간의 변주까지 더합니다. 주인공인 국어교사 임지환의 반 학생 ‘준영’이의 머리가 터질 듯 부풀었다가 다시 줄어드는 장면을 보여 준 것이죠.‘역시, 학생을 아끼는 선생의 존재가 아이들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는구나.’ 하고 안심을 하였으나, 결국 준영 학생도 풍선이 되어 날아가 버립니다. 서울의 인구 포화와 ‘인 서울’ 러시는 과연 스승의 은혜 정도로 막아지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준영 학생이 날아가는/사라지는 장면이 독자인 제게는 ‘각성 포인트’였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 따위가 아니라, 오랜 시간 연구와 정책 입안이 요구되는 사회적 문제임을 자각했다랄까요. 그리고 국어교사 임지환도 곧 풍선이 되어 날아간다는 점에서, 이 사태의 피해자가 학생들뿐만은 아니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작가가 제시한 해법은 ‘리셋’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실제로 지구 대격변의 조짐이 그려집니다. 독자로서, 그리고 서울시 거주민으로서 ‘리셋’이라는 해법이 썩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왜 리셋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서사를 지지합니다.서울에서 머리가 터져 버릴 듯 괴로워하던 이들이 부유하여 모이는 곳이 바로 ‘사평’입니다. 소설 속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래빗 홀’ 같은 환상의 시공간입니다. 또한 치유의 성소이기도 합니다.‘사평’마저도 이제 포화 상태라는 ‘래빗’의 하소연. 이 부분이 소설 「사평」의 절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 서울’의 낙오자들을 달래려고 조성된 곳인데, 여기도 인구 밀집도가 만만찮은 겁니다. ‘인 서울’에 진학하는 학생들 수만큼, ‘인 사평’으로 낙오되는 아이들도 많다는 사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조만간 터져 버릴 게 명약관화하다는 전망. 그러니 유일한 방법은 리셋일 수밖에 없다, 라는 이야기.미주(尾註)까지가 이 소설의 완전한 분량입니다. 본문의 이야기가 끝난 뒤 마치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 주석의 내용이 서늘합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제목인 ‘사평(沙平)’이 한강의 옛말일 뿐 아니라, ‘서벌’과 ‘서라벌’처럼 서울을 이르는 또 다른 본딧말 중 하나라는 설명. 즉 ‘사평’도 실은 ‘서울’이었다는.소설을 다 읽고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퓨리오사가 몇 날 며칠 사막을 질주하여 ‘녹색의 땅’에 도착했지만, 이름만 ‘녹색’일 뿐 그곳도 결국 모래의 일부였음을 알고 절규하는 장면 말입니다.「사평」이 웹툰으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 보았습니다. 시각화된 ‘사평’의 이미지와, 별안간 머리와 몸이 부푸는 학생들의 모습이 무척 강렬할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웹툰이 나온다면 꼭 챙겨 보겠습니다. 임재훈
완성이 아닌, 과정 그 자체로 사유하는 인생과 우주  완성되는 무언가가 아닌, 과정 그 자체로 사유하는 인생과 우주:‘스토리코스모스’라는 비밀   1. 읽는 이보다 쓰는 이가 더 많은 시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깜빡한 이들이 많겠으나, 우리는 무척 흥미롭고도 괴이한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의 발명과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은 SNS, 유튜브, 네이버 블로그, 브런치 등 수많은 개인 플랫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내 멋대로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세계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너도 작가, 나도 작가, 옆집 아저씨도 작가이다. 누군가는 지금을 나르시시즘 전성시대라 부를 수도 있다. 검증도 거치지 않은, 틀린 맞춤법에, 비문, 오문으로 가득한 글이 찬사를 받는다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혹은 21세기 디지털 세상 속 이야기의 데이터가 너무 많이 쌓여, ‘상투적’의 범위가 넓어져, 조금 투박하지만, 개성 있는 개인적 이야기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세상이 왔는지도 모른다. 마음의 우울과 심적 가난, 애정 결핍 등, 깊어진 개인의 힘듦과 표출 욕구 역시 이 현상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겠다. 자기의 것을 쓰는 행위는 어쨌든, 마음의 치유에 근접해 있다. 이런 글쓰기 홍수 시대는 수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우선 가짜가 진짜가 되기도, 진짜가 가짜가 되기도 한다는 것.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하여, 이 인터넷 세계 속 믿을 만한 공신력 따위는 없다. SNS 속 개인의 목소리가 역으로 공중파 뉴스, 혹은 유명 포털의 메인을 장식하는 일도 빈번하다. 수준 이하의 글이 버젓이 책이 되어 교보문고에 진열되기도 한다. 100만 원 주고 책을 자가 출판한 뒤, ‘책 출간’만으로 강연을 펼치고 다니는 책기꾼도 생겼다. 또한 종이책과 글쓰기 전선의 최후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문학은 자기들 권위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독자와의 소통은 배제한 채, 작가와 작가 지망생끼리 서로의 일기장만 훔쳐보고 있는 꼴이다.   자못 개판인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공신력의 부재가 21세기에는 자연스럽다 한다면, 이 개판이 개인의 자유이며, 아픈 이들의 치유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문제를 제기하고픈 마음이 없다. 화두를 던지고 싶지 않다. 내가 안 읽으면 그만이니까.   ‘내가 안 읽으면 그만이니까,’라는 귀결이 이 리뷰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이유이다.   읽는 이보다 쓰는 이가 더 많아진 시대가 쓰는 이의 증가로만 이어진다면, 이 현상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나, 이 증가는 독서 인구의 감소와 동행한다. 대표적으로 필자가 그렇다. 읽을거리는 많아졌지만, 제대로 쓰는 이가 없다 여겨진다. 좋은 글인 줄 알고 구매 후, ‘속았다’ 생각하며 집어던진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글쓰기 홍수와 공신력의 부재, 자의식 과잉 작가들로 인한 소통의 단절은 소비자의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소비자인 필자가 오랜 시간 피부로 느낀 점이다. 쓰는 이만 늘고, 읽는 이는 없어진 세상, 이런 공급 과잉은 종국에 ‘독서’라는 삶의 가장 귀중한 요소의 멸종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듣는 이는 없고, 소리치는 이만 가득한 세상. 독서의 종말은 곧 문화의 종말을 의미하며, 나는 그게 조금 무섭다. 따라서 이 개판을 소비자, 독자의 입장에서 탐구하고 정리할 필요성을 은연중에 감지하고 있었다. 감지만 했다. 가설은 위에 적었듯 다양하니까. 다양하기에, 또 그 목소리 하나하나 모두 그럴듯하기에, 쉬운 문제가 아니니까. 나는 이 본질에 대한 이해에 쭉 목말랐고, 역행적 구조의 탐구를 원했다. 참신한, 신선한 그런 담론의 소설. 이 현상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중심을 잡아 화두를 던지는, 또 그에 대한 해소의 씨앗이 담긴 소설을 원했다. 그렇게 수없이 헤매다가, 마침내 찾게 되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리뷰를 쓴다. 책을 만난 곳은 교보문고가 아니다. yes24나 알라딘도 아니다. 독립책방도 아니다. 우연히 만난 소설집을 통해 찾게 된,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이라는 플랫폼에서였다.   박상우 소설가의 <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단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작가인 세상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위로한다. 그러면서 세상은 원래 작가로, 이야기로 이루어졌다는 역행적 구조로 거대담론을 제시한다.   2. 쓰는 이의 심리   <비밀문장>은 문필우라는 어느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이다. 모나미 출판사 직원인 필우는 서른이 되기 전까지 작가가 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결심한 인물로, 유미주의(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는) 성향이 강하다. 문필우는 자신의 ‘쓰는 이’로서의 결심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변명도 없다. 그저 ‘그래야만 한다’고 자각했다 서술한다. 문필우가 서른이 되는 시점에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니, 자살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써니마저 <제로>라는 의문의 소설을 남기고 필우를 떠난다. 완전한 혈혈단신이 된 필우는 서서히 삶의 끝을 준비한다. 그런 문필우의 앞에 문필수라는 학교 선배가 나타난다. 그는 등단 후 다섯 편의 단편을 발표한 뒤, 잠적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필우는 책 출판 회유라는 상사의 종용에 그를 만난다. ‘영혼이 없는 사람,’ 필수를 보고, 필우는 그런 인상을 받는다. 물론 곧 생을 마감할 필우에게 그를 종용할 마음은 없다. 다만 잠적한 소설가인 문필수가 궁금했을 뿐. 문필수는 후배로서 필우를 대한다. 소설이 그저 소통의 도구라는, 소설가의 길은 죽으려 환장한 인간의 길이라는 문필수의 소설론에, 유미주의적 성향 필우은 동의하지 못한다. 욕지거리를 뱉기도 한다. 필우에게 소설은 신이며, 종교이다. 선배 문필수는 그런 필우를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쓰기’에 사로잡힌 후배를 이해한다. 그러면서 소설 속 큰 역할을 하는 니체 마운틴 위 ‘초인의 집’을 넘겨줄 것을 제안한다. 그곳에서 좋은 글을 많이 쓰라며. 초인의 집은 낮은 산 정상의 공기 좋은 것에 자리한 주택이다.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필수 역시, 선배에게 대대로 물려받은 공간이다. 문필수는 네팔로 떠나 히말라야 등반가들을 돕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준비하고 있다. 필우는 ‘초인의 집’ 제의를 승낙한다. 허나 필우는 그 공간이 사라지듯, 증발하듯 ‘죽기 좋기에’ 승낙한 것뿐이다. 필우는 이미 자기 운명을 자각했다. 그는 서른이 되었다. 죽어야만 한다. 거대한 에고를 가진, 의연한 캐릭터이다. 그렇게 죽기로 한 날, 비가 내린다. 필우의 죽음을 막으려는 듯이. 허나 필우는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다. 폭우와 안개로 도로에 멈춘 택시에서 내려, 목을 매달기 위해 초인의 집으로 향한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산에 오른 필우. 그곳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기이한 에너지. 또 인지되는, 입력되는 어떠한 느낌. 열다섯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인간도, 귀신도 아닌 에너지체가 필우 앞에 있다. ‘쿄쿄... 쿄쿄..’   자살을 향해 가는 작가 지망생의 모습이 애달프다. 그 젊은 나이에 왜 꼭 그래야만 하나, 왜 작가라는 험한 산길을 선택했나, 그건 도대체 어떤 연유의 운명이란 말인가, 보는 이의 마음이 문드러진다. 소설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필우의 ‘작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자각은 여러 가지 결핍에서 시작되었다. 20대의 필우는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한 채 작가를 지망한다.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 느낀 이유만으로. 그런 운명은 에고에 의해 심어졌다 해석할 수 있겠다. 그 에고의 문제는 소설 초반 써니에 의해 드러난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쓰지는 못하는 필우의 모순. 어쩌면 강제적으로 써야‘만’ 하는, 세상과 홀로 맞장을 떠야‘만’ 하는 게 작가들이다. 가혹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솔직히, 멋지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는 이들에 대한 환상이 남은 독자인가 보다. 그들이 나라의, 이 시대의 지성에 마지않다는 믿음은 여전히 굳건한가 보다. 한국에 문필우는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쓰는 이가 더 많은 시대, 필히, ‘아, 이거 내 이야기인데,’하며 이 소설의 독서를 시작할 쓰는 이가 많으리라 짐작한다.   3. 구원으로서의 창작과 자해로서의 창조-선자들은 어쩌다 자신에게 잡아먹혔나   앞에 소개한 내용은 13부로 나뉜 소설 중, 3부까지에 해당한다. 작가는 속에 작가 지망생의 심리를 더없이 핍진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작가가 절묘하게 펼치는 아이러니는, 필우의 ‘작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자각이 서서히 그의 목을 죈다는 것이다. 또한 필우의 글에 대한 사랑이, 주변 관계, 실제 물질적 사랑, 일 등 다른 소중한 것들의 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일본 근현대 시대 작가들의 이야기를 잠시 덧붙이고 싶다. ‘유미주의’를 표방하던 소설가들. 그들이 하던 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었다. 유미주의 작가들은 문학에 삶을 전부 바쳤고, 그 열정을 통해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허나 그들의 작품이 아닌, 삶으로 렌즈를 넓혀 보면, <비밀문장>의 초반 아이러니와 그대로 겹친다. 대표적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등등, 그들은 모두 직접 생을 마감했다. 소개하고 싶은 것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야기이다. 서른다섯에 음독자살한 아쿠타가와는 강한 자의식으로 인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의 자살 연유는 그가 남긴 몇 편의 미완소설과 수필, 동료 문인들과의 대화로 해석되는데, ‘유미주의’ 성향이 가장 큰 이유로 뽑힌다. 아쿠타가와는 예술을 신처럼 받들며 살았다. 아름다움이 우주의 가장 높은 가치라는 믿음이었다. 그런 그의 성향은 <지옥변> 같은 소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건 20대의 아쿠타가와였다. 30대의 아쿠타가와는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하고, 예쁜 아이들을 낳았다. 가족이란 아쿠타가와의 눈에, 한없이 ‘아름다웠다.’ 아쿠타가와는 그 ‘아름다움’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이 자신의 예술론과 대치되며, 완성된 작품들보다 높은 가치라는 사실이 그에게 더없는 허무감을 안겼으리라는 주장이다. 요약하자면, 20대 유미주의 청년 아쿠타가와가 30대 아버지가 된 아쿠타가와를 죽였다는 논리이다. 이 주장은 <비밀문장> 속 스토리 명상의 순환 구조, 그와 중첩된 윤회의 구조로 더욱 세밀히 해석할 수 있는데, 그건 후에 간단히 서술하도록 하겠다.(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근현대 문학 영웅 중 거의 유일하게 병으로 생을 마감한, 6권밖에 쓰지 않은-일본에서는 샌님 이미지로 독자들에게는 인기가 덜한-나쓰메 소세키를 모든 유미주의 소설가들이 소설의 신으로 우러러봤다는 것이다)   쓰기란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를 표출하고 싶은 욕구로 시작하여, 자기구원을 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일정 선을 넘으면, ‘나’를 위협한다. 이런 아이러니의 키워드는 소설을 통해 찾을 수 있다. 바로 ‘에고.’ 소설의 단어를 빌리자면, ‘나’라는 망상자아이다. 필우 앞에 나타난 쿄쿄는 이 에고란 것의 문제를 우주의 순리와 함께 설명한다. 인간은 마리오네트, 인생은 시뮬레이션. 인간에게는 존재, 자아, 영혼이 없고, 다만 퍼스널리티의 하나, 성장의 프로그램이라는 쿄쿄에, 필우는 발끈한다. 쓰는 이들 모두, 독자들 모두 똑같이 발끈할 것이다. 무언가 찾아 헤매는 구도자들도 발끈할 것이다. 내가 그저 인형이라니, 하며. 허나 이런 분노와 불신의 감정마저 작가의 의도 하에 있다고 사료된다. 여기서 작가가 독자들을 도발하면서까지 선명히 하고 싶은 것은 무분별한 에고의 위험성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나를 위한 나.’ 쓰는 자들의 자의식은 본인을 죽이기도 한다. 필우도, 아쿠타가와도. ‘나를 위한 나’는 칼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나’를 벗어날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필우도, 독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쿄쿄는 정연하게 그런 ‘나’라는 의식과 허무에서 벗어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글쓰기를 통해 에고를 없애는 것이다. 그 방법론은 3부와 4부에서 대사로 우선 제시되는데, 이 부분은 정말이지, 많이 어렵다.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전공자가 와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리라.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그 방법론은 이제부터 작가가 ‘메인서사’로 보여주니까. 기억할 것은 단순명료하다. 쿄쿄에게 불신과 분노로 소리소리 지르는 필우가 의아하게도, ‘스토리코스모스’라는 단어에 가슴으로 반응했다는 사실. 그리고 쿄쿄는 어떠한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닌, 과정, 그러니까 ‘스토리’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비밀문장이다. 우주는 존재가 아닌 스토리로 이루어졌다.   4. 일기와 스토리텔링의 차이   쿄쿄와의 만남 이후, 필우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자아가 없다는, 자신은 다만 하나의 퍼스널리티에 지나지 않다는 지각 후, 필우에게 ‘자살’이 너무도 유치한 개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필우는 감정을 배제하고 쿄쿄의 말을 곱씹는다. 그 내부가 무척 복잡하기는 하나, 소설 속 가장 선명한 상징으로 설명하자면, 3차원 세계는 무대, 영계는 세계라는 무대 뒤 대기실이다. 윤회란 하나의 영체로 이루어져 있고, 현생은 영체의 10퍼센트만 쓰는 윤회의 반복이다. 그 반복은, ‘성장’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그러니 현생의 삶이란 완성되는 것이 아닌, 과정 그 자체, 그러니 스토리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필우는 확신하지 못한지만, ‘스토리코스모스’라는 비밀문장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자신의 미션이라 인식한다. 이후에 무척 중요한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이 스토리를 ‘제대로 쓰는’ 것이다. ‘스토리 명상’ 사이클을 통해.   바로 보기-바로 쓰기다시 보기-다시 쓰기   언뜻 간단해 보이는 사이클이지만, 그 이해가 쉽지 않았다. 필자 역시 이 사이클의 이해를 위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박상우 작가의 에세이를 찾아, 도서관에서 빌려봐야 했다. (그 내용은 다음 챕터에서 이어진다) 필우는 쿄쿄의 도움과 함께 4부부터 7부까지 이 사이클에 도전한다. 그 사이클로 ‘스토리 명상’의 개념을 글로 만든다. 그리고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탄생에 관여한다. 싸한 조력자 신다경 대리와 함께. 여기서 ‘관여’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주인공 필우 역시 자신이 이것을 만들었다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우는 그저 ‘스토리코스모스’와 ‘스토리 명상’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어떠한 ‘느낌’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이 사이클이 얼마나 어렵고도 복잡다단한 일인지는, 소설의 서사에 낱낱이 밝혀져 있다. 극도의 자기 객관화라고 응축해 말할 수 있을 텐데, 이 자기 객관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이다. 스토리 명상 속 바로 보기는 ‘나’의 소멸에 가깝다. 제아무리 어려워도, ‘나’의 소멸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고 쿄쿄는 말한다. 다시 에고의 문제이다.   5. 한국인이 쓴 유일한 작법서   학부생 때 백일장에서 수상을 했거나, 선생님께 글 칭찬을 받아본 이들은 SNS 속 간단한 자기 표출을 넘어, ‘소설’ 혹은 ‘에세이’를 쓰고 싶어 한다. 표출이 표출로만 끝나지 않고, 이야기로 타인과 소통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일기가 아닌, 스토리, 구조를 갖춘 글로써,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어떻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나,’가 많은 이들의 화두가 되었다. 그게 웹소설이든, 본격이든, 장르든, 시나리오든, 글깨나 쓴다는 이들은 하나둘 작법서를 펼치기 시작한다. 텍스트처럼 내려오는 저명한 작법서들이 있다. 스티븐 킹, 데이먼 나이트, 제임스 스콧 벨, 레이먼드 카버 등. 저명한 작법서는 대개 외국 작가의 것이다. 한국에도 작법서가 있지만, 이름도 모르는 작가들, 혹은 문단 경력자들이 구색만 맞춰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웹소설의 경우, 웹소설로 성공 못 한 이들만 작법서를 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한국인이 쓴 작법서 중, 작가로서 성공한 이가 쓴 책은 박상우 소설가의 <소설가>가 유일하다. 1988년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으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고 등단한 박상우 소설가는 1999년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이상문학상 대상까지 수상했다. 간단히 말해, 한국문단의 엘리트코스를 밟아, 소위 ‘순수문학 전업작가’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한 극소수의 소설가 중, 후배들을 위해 작법서를 써준 것은 박상우 소설가가 유일하다는 말이다. 현재는 절판되었지만, 이 작법서는 실전 집필, 창작과 창조의 차이, 작가로서의 마음가짐을 적확히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소설가가 될 수 있나. 이건-<비밀문장> 속 문장을 빌려-말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작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흐름을 빌려 흐르듯 구성된다. 그렇다면 ‘되는가’가 아닌, ‘사는가’로 뒤바꾸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 ‘어떻게 소설가로 사는가.’ 소설가로 사는 것. 박상우 소설가는 그 속에서 사이클 하나를 강조하고 있다. 집필뿐만 아니라, 삶에 가닿은 하나의 사이클.   바로 보기-바로 쓰기다시 보기-다시 쓰기   반가운 대목이다. 박상우 소설가는 자신의 창작론을 그대로 <비밀문장> 속 서사화했다. 5,000만 국민이 전부 작가가 되는 세상, 나 같은 독자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소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허나 대학 교수 자리를 거절하고, 20년 가까이 혈혈단신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박상우 소설가는 <소설가>와 <비밀문장> 속, 그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말하고 있다. <소설가>를 읽고 있으면, 박상우 소설가는 마치 ‘모두 작가’라는 개념을 오래전부터 예견한 듯 보인다. 선자로서 그가 당부하는 것은, 또한 우려하는 것은, <비밀문장>에서 서사적으로 선명해진다. 우리의 주인공 필우에 집중하면 된다. 무분별한 ‘쓰기’와 그것이 쓰는 이를 잡아먹을 뻔한 서사. 일기가 아닌 소설을 쓰고 싶다면,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면, 소통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소통’을 막는 것이 바로, 쿄쿄가 경고하는 에고이다. ‘에고’는 작가의 그늘로 독자와의 소통을 막고, 작품을 망친다. 토카르추크가 말한 ‘서술자의 심리학’이 성립되지 못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막힌 소통 속, 쓰는 이는 이유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비난하게 된다. 왜 다들 내 글을 읽지 않나. 왜 다들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신경쇠약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 구원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구도자들이, 자기가 쓴 글에 다치게 되는 패턴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글을 통한 자기구원의 키는 ‘나’가 아닌 타인과의 ‘소통’에 있다. 그러니, 에고는 작가가 싸워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 방법이 바로 ‘스토리 명상’이자, 박상우 소설가의 창작론이다. 쉽게 이해되는 말은 아니다. 스토리 명상 역시 구조적으로 따지면, 그 복잡함에 눈이 질끈 감길 정도이다. 실은 작법서나 이론서는 대부분 그렇다. ‘이게 뭔 소리야?’ 생각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 복잡함을 조금 더 즐겁게 파헤치기 위해, 다시 <비밀문장> 서사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들의 문필우.   6. 이론이 아닌, 물리적 스토리 명상의 서사   필우는 쿄쿄와 함께 ‘스토리 명상’의 이론적 이해를 끝마쳤다.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필우는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바로 보기, 바로 쓰기 단계를 끝냈다. 그 결과물이 스토리 명상에 대한 정리 글과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탄생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허나 필우는 아직 ‘자신의 글’을 쓰지 못했다. 그의 본래 미션이자, 수많은 ‘쓰는 이’들의 미션일 터이다. 8부부터 11부까지는 필우의 물리적 스토리 명상을 통한 집필에 해당되겠다. 발단은 안시연이라는 인물이다. 유명 배우인 그녀는 스토리 명상을 깨우치고, 자신의 이야기를 스토리코스모스닷컴에 올린 후 자살한다. 부친을 살해한 뒤. 이 사건으로 소설은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이 필우의 의도와 다르게, 법적 사건으로, 한 인간의 죽음으로 전개된 것이다. 또 싸한 느낌을 자꾸만 풍기던 신다경 대리, 자신의 에고와 욕망을 해결하지 못한 그녀는 조력자에서, 악역으로 얼굴을 바꾸게 된다. <비밀문장>은 지금껏 영적 존재를 앞세운 환상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안시연 사건은 그걸 완전히 뒤엎는, 현실이 환상을 잡아먹는 구조의 흥미로운, 낯선 위기이다. 안시연 사건과 신다경 대리와의 불화는 필우를 현실의 자각 속에 감금시킨다. 동시에 실제로 감금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하던 영상이 남은, 스토리 명상의 원리를 집필한 그가 정신병원(그 정체는 그저 정신병원이 아닌, 더욱 복잡한 어딘가이지만, 이 장면은 소설적 형상화의 중대한 부분이니 직접 읽고 목도하기를 바란다. 또 배우 안시연의 스토리 명상 구조가 기가 막힌데, 이 탐미적인 이야기도 꼭 주의 깊게 읽어보기 바란다)에 갇히는 것이다. 그곳에서 필우는 좌충우돌 위기를 겪은 끝에, 조력자 딥퍼플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마침내 써야만 하는 물리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제야 시작되는 ‘필우의 스토리 명상.’ 필우는 지금껏 써니, 쿄쿄, 신다경 대리, 스토리코스모스닷컴, 감금의 이야기를 그대로 서사화하여 소설로 쓰기로 결심한다. 바로 보기, 바로 쓰기, 다시 보기, 다시 쓰기의 물리적 서사 전개이다. 박상우 소설가는 앞서 소설에서 이론적으로 소개하던 복잡한 원리를 서사에 담아 그대로 재현한다. 이론이 물질적 실재로 이월하는 낯선 기술을 창작한 것이다. 공식과 물리적 시도 사이, 모두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통해 복잡한 이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되겠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낯선 가치를 본 까닭은, 작법서와 자신의 창작 이론을 그대로 서사화시킨 소설가를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박상우 소설가를 포함, 소설가들이 쓴 작법서는 대개 어렵다. 활자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의 한계라고 할까, 천재들의 불가피한 비약이라고 할까. 읽는 이의 대부분은 이론만 놓고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허나 이 소설은 작법서임과 동시에, 이야기이다. 작법의 행위 자체를 그대로 서사화하여, 쓰는 이들에게 보여준다. 쉬운 비유를 찾자면, <비밀문장>은 문제집, <소설가>는 해설서인 셈이다.   7. 모두가 작가인 세상-스토리코스모스   필우는 소설 집필을 끝마치고, 감금에서 벗어난다. 등단도 하게 된다. 보통의 메타소설은 이즈음에서 결말을 맺는다. 허나 <비밀문장>은 다르다. 작가는 ‘완성된 것은 없다’를 확실히 한다. 필우는 여전히 혈혈단신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등단은 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없다. 사랑도, 가족도, 일도.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다시 스토리 명상이다. 문필우는 앞으로도 스토리 명상을 지속해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아픈 자기 인식과 에고의 해체, 그리고 다시 보기, 또 다시 쓰기. 필우는 작가로서의 스토리 명상을 단 하나 끝냈을 뿐이다. 아직 미션은 주야장천 남았다. 스토리는 계속된다. <비밀문장> 소설 서사에 한정해 말하자면,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다시 보기, 다시 쓰기’가 남았다. 필우가 감금된 600일 동안 신다경과 모나미 출판사는 스토리코스모스를 빼앗아 키웠다. 필우는 그것을 되찾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필우에게 찾아온 인식은, ‘모두 작가’라는 것이다. 또한 반강제적으로 쓴, ‘소설은 모두 허구다’라는 문장. 필우의 ‘스토리코스모스’ 미션에 대한 스토리는 앞서 나왔던 문필수, 써니, 신다경 대리, 딥퍼플 등의 인물들이 회수됨과 동시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허나 이 ‘대단원’은 주가 아니다. <비밀문장>의 중심 마무리는 ‘문필우’라는 인간의 계속될 스토리의 흐름이다. 소설가이자,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 문필우. 결말이란 상투적인 말은 이 소설에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완성’이 아닌, ‘과정’에 있으니까.   <비밀문장>이 무척이나 신선한 소설인 또 다른 이유는, 마지막의 작가 개입에 있다. 박상우 소설가는 직접 소설에 등장하기를 자처한다. 무척이나 도발적인 시도로, 창작자로서 겁이 날 법도 한 상황인데, 작가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 근원은 필우가 하나의 ‘스토리’라는 것으로 끝을 내야만 했던 작가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이 소설은 어쩌면 어느 결말을 맺어도,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제시하고자 하는 담론과 메시지가 이미 그러하다. 작가는 ‘완성’에 그 어떤 의의도 두지 않았으니까. 그런 결말을 위한 묘수가 12부 속 써니의 ‘건너뛰기’ 개념이고, 그와 이어지는-13부, 의도적으로 인과를 배제한-작가와 주인공과의 만남이다. 박상우 소설가는 끝까지 독자들과 소통한다. 마음껏 쓰라고, 마음껏 살라고, 당신의 배역을 즐기라고, 자기 스토리를 펼치라고, ‘주인공은 너라고.’ 그리고 문필우도, 써니도, 박상우 소설가의 스토리마저도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소설 속 스토리코스모스닷컴마저 그렇다. 내가 <비밀문장>을 읽은 곳이 바로, storycosmos.com 플랫폼이다. <비밀문장> 속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스토리도 현재 진행형임을, ‘지금’임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절묘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8. 어쨌든 써야 한다면   서두에 밝혔듯, 이 리뷰는, ‘내가 안 읽으면 그만이니까’하는 나의 에고로부터 출발했다. 이 에고로 인한 불소통이 수많은 문제의 시발임을,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무섭게 인지했다. 그리고 그 단절과 맞서는 것은 이렇게 소통하는 것뿐임을 인정했다. 읽는 이보다 쓰는 이가 더 많은 시대는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우주는 스토리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완성되는 것이 아닌, 그저 과정들로 가득한 그런 곳. 21세기 인터넷 세계가 그 내면 구조를 선명히 수면 위로 올린 것뿐이다. 스토리 명상(글쓰기이자, 삶)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반복 지속될 것이다. 허나 그 과정으로 우주가 이루어졌다는 ‘스토리코스모스’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소통을 통해 쓰는 이들도, 읽는 이들도 조금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내 것’과 ‘타인의 것’이 다름없다는 것을 깨우친다면, 더욱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원활히 서로 소통한다면, 글쓰기 홍수 시대에 하나의 방주가 태어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스토리를 가졌다. 무언가 쓰고, 완성하고 싶은 욕구, 이따금 과잉되기도 하는 자의식을 가지지 않은 이는 없다. 허나 그 스토리 과정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그 순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완성에만 몰두하는 일은, 죽음을 완성하려는 노력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또한 그런 에고로 완성된 글은, 나 같은 독자, 혹은 미래의 작가 자신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죽으려 작정한 인간의 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떠한 성공이든, 완성이든 쟁취한다고 해도, 순환의 원리 속 칼날은 언젠가 자신을 향할 터이다. 문필우와 다르게 아버지로서의 ‘나’를 견디지 못한 아쿠타가와처럼.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는 절대 틀린 문장이 아니다. 허나 <비밀문장> 소설을 읽은 후에, 인간은 씨앗임과 동시에, 방대한 우주임을, 스토리 그 자체임을 이해한다면, 앞으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자기 목소리는 다르게 자기 귀에 닿을 것이다. 그게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나는 독서 후 독자로서, 문필우처럼 쓰는 모두를 응원하게 됐다. 써야‘만’ 하는, 죽으려 작정한 길을 기꺼이 자처한 그들을-문필우라는 주인공과 내적 친밀감이 가득한 지금-제대로 존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쓰는 이들은 여전히 시대의 지성이다. 또한 죽으려 작정하고 가는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의 길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순고하고도 순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모두의 이야기가 다시 궁금해졌다. 한국의 수많은 문필우들에게는, ‘빨리빨리 한국인은 소설을 읽지 않는다,’ ‘요즘 시대에 누가 글을 읽나.’ 이런 말은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거짓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 싶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 웹소설, 여러 수준 이하 일본 로맨스 작가들의 글이 10-20대들 사이 붐을 일으킨 것만 봐도, 그 사실은 명확해진다. 또 최소한 나는 독자로서 쭉 문학을 읽어 왔고, 앞으로도 읽을 것이라는 진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니, 제대로 써달라. 독자와 소통해달라. 이런 하잘것없는, 그 어떤 공신력도 없는 리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멋진 글을 보여달라. 에고로 인해 당신의 소중한 목소리가 파묻히는 것을 피해달라. 몇십 권이든, 몇백 권이든, 구매해 읽어 줄 테니. 그 키는 소통과 과정에 대한 집중이며, 방법은 <비밀문장> 소설 속 낱낱이, 흥미진진하게 서사로 펼쳐져 있다. 그러니 조금 어렵더라도 읽어 보시기를 당부드린다. 독자든, 작가든, 소통과 스토리란 것의 이해를 위해. 어렵다면 나처럼 도서관에서라도 <소설가>를 구해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그럼 모두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가능한 무언가는 아픈 비밀이 아니다. 다만 모든 과정 자체를 응원하는 따스한 위로이다. 그 가능한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작가의 문장을 빌린다.   뜻하는 대로 펼쳐지는 우주 뜻하는 대로 펼쳐지는 사랑 뜻하는 대로 펼쳐지는 당신 판타 레이, 스토리코스모스!   그대의 삶은 이미 그대의 작품이다.        reader
만일, 남편이 키메라로 변하지 않았더라면 바야흐로 장르의 전성시대이다. 본격 소설을 위시하여, 판타지, SF뿐만 아니라, 보고서, 다큐멘터리 형식을 소설적 장르로 차용하기도 한다. 춘추전국시대처럼, 이러한 장르 팽창 현상은 왜 갈수록 진화를 거듭하는 것일까.  소설에서 이처럼 다양한 장르가 적극적으로 차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은 활자 예술로써 인간의 언어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하지만 그간 인간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언어는 더 이상 인간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총체적인 언어 모델의 관점에서 보자면, AI의 언어 모델 또한 그러한 총체성에 기여한다. 즉,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모델이 AI에게 적용되며,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언어 모델이 창출되며, 그것이 역으로 인간의 언어 모델에 적용되어진다. 흔히,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인터넷상의 모든 언어가 그러한 언어 모델의 범주에 속한다. 이로 인해 인간의 의식은 보다 세분화된 차원으로 확장된다. 정교한 언어와 의식에 갇힌, 진실에 이르는 길은 좀 더 다양한 차원의 낯선 전략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현재 소설의 장르 팽창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어떤 진실에 이르기 위해, 작가는 모험을 감수하고 자기 앞에 놓인 수백수만 가지의 갈래길 앞에서 고군분투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소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객체가 되고, 그것이 전략적으로 택한 길은 하나의 형식이 된다.  정상에 이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저절로 열리는 ‘낯선 길’, 그렇게 ‘스스로 열린’ 길 앞에서, 작가는 낯선 두려움에 맞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현시대의 작가들에게 주어진 사명과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대단한 사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언어 하나만을 통해, 길이 끊어진 시공간에 지극히 사소한 푯대 하나를 꽂는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독자는 재미와 의미라는 두 가지 소통의 키워드를 제공받으며, 이를 통해 독자 또한 언어적 사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박은비 작가의 세 번째 신작을 읽었다. 이 소설은 남편이 키메라로 변신하는 내용이다. 리뷰에 앞서, 다소 장황하게 장르를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가 차용하는 장르가 이러한 점에서 재미와 의미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놓치지 않고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은비 작가의 당선작인 <창>과 <아직 아닐 거라는 착각>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매우 쉽게 잘 읽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쉽다는 의미가 곧 쉽게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작품 모두 가족사를 다룬다. 대외적으로 큰 사건 사고들이 많은 시대이다. 그로 인한 사회적 소통의 부재와 단절은 각 개인의 몫이다. 두 작품 모두 가족사를 다루지만 그것은 가족 내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이 속한 공동체와 밀접한 연결고리를 갖는다. 그러한 연결고리를 통해 작가는 한 개인과 가족, 더 나아가 사회와의 소통의 부재를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 방식에 있어서 작가는 자신만의 장르를 펼쳐 보인다. 흔히 판타지 형식으로 불리지만, 박은비 작가의 작품은 현실에 보다 미세한 초점을 두고 있다. 대개 판타지가 보여주는 상상력이라는 것이 극대화된 망원경일 경우가 많다면, 작가가 보여주는 상상력은 보다 미세한 현미경에 가깝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주인공의 내면에 쉽게 공감을 할 수 있으며, 낯선 이해의 지점에 서서 각자의​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작품 속에서 ‘낯설게 열린 길’로 저절로 동참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남편이 키메라로 변신해야 하는 이유이다.  낯선 상상력과 더불어 쉽고 재밌게 잘 읽히는 소설. 독자를 복잡한 미궁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선명한 의미와 재미를 제공하는 소설. 복잡한 세상 속에서 이보다 더한 소통의 미덕이 있을까. 머리 아픈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힐링할 시공간을 제공해주는,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까닭이다.  솔트
한 편의 극처럼 완성된 청춘 팔월극장은 청춘의 꿈에 대한 소설이다. 실제 있었던 ‘팔월극장’이라는 제목으로, 슬피 완성되어 버린, 그래서 더욱 아픈 이야기이다.   소설을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상징들이 잘 배치되었고, 촘촘하다. 기본기가 무척 탄탄한 작품이다. 청춘의 꿈의 좌절이란 주제, 자살 시도, 여전히 꿈꾸는 인물로의 빠져나가기, 그럼에도 그 모든 걸 아름답게 묘사하는 작가정신, 흔한 이야기지만, 밀도 높고, 소설 속 상징과 이미지들이 좋다. 실제 극장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여 잘 응집되고, 중심성이 선명하다. 그런 극장의 역사를 주인공의 현재와 중첩하여, 시대를 아우른다, 혹은 이월한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고스톱 게임, 라운드1,2, 시놉시스, 시나리오 등으로 서술하며, 주인공의 삶 자체를 하나의 시놉시스, 작품으로 형상하기도 한다. 그게 작가의 자의식과도 연결되는 치밀한 계산은 소름이 돋기까지 한다.   주인공은 어머니가 죽은 것을 발단으로, 부서져가던 꿈을 선명히 느끼고, 자살을 결심한다. 여동생의 회유, 그리고 종교로 꿈의 포기에 대한 유혹이 나타나지만 거절한다. 그리고 살림살이를 줄이고, 윤희를 섭외하는 등 세세히 자살 시나리오를 짜고, 실행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샐러리맨 조형물과의 대화, 엄마가 좋아하던, 살맛나는 딸기, 팥죽, 돋보기안경 선물, 자기 때문에 엄마가 일찍 죽었다는 죄책감 등으로 주인공의 연약하고, 순수하고 선한 속마음이 형상화된다. 그러면서도 윤희라는, 여전히 꿈을 꾸고, 열성정인 인물을 이 극의 관객으로 남김으로서, 다음을 독자에게 넘긴다.   작가는 치밀하게 소설 전체를 계산해 두었다. 절제된 여러 소도구는 마지막 아름다운 장면에 모여든다. 머릿속 그려지는 이미지가 너무나 아름답다. <팔월극장>, 하나의 작품은 소설의 끝에 완성된다. 그걸로 청춘의 꿈의 암울함, 동시에 찬란함과 경쾌함이 부각된다.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첫 문장에 소설이 전부 담겼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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