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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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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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공동: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임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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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리스: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화이트리스: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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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짐: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조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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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파라거스 숲 : 2023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아스파라거스 숲 : 2023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강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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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네 : 2023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그네 : 2023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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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블 : 2023-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테이블 : 2023-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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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42번 접는 날이면 : 2023-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나를 42번 접는 날이면 : 2023-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진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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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편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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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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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 리뷰에는 내 글 실력의 37%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문학은 너무도 많이 죽어버려서 이제는 문학이 살아나면 아쉬울 지경이다.   문학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죽어 있었다. 아니,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죽어 있었다. 문학의 죽음은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가 출간된 18세기에 최초로 언급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때 죽는 이유와 지금 죽는 이유는 전혀 다르다.   ‘문학이 죽었다’는 한마디로 일축하기에는, 우리는 그 사이에 너무도 많은 말을 생략해 왔다. 문학 종언 담론의 대명사가 된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죽음’과 한국문단에서 말해온 ‘죽음’은 전혀 다른 문제로 읽힌다. 문단 안에서도 비평가니, 소설가니, 저마다 다른 식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잠시 다른 얘기지만, 나는 작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운영해본 적이 있는데, 그중에는 허구한 날 ‘이 커뮤니티는 망했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유저들이 있었다. 화무십일홍, 달도 차면 기우나니, 무엇이든 흥하는 때가 있으면 가라앉는 때도 있는 법 아니겠는가. 그런데 유독 그 사실을 과장스럽게 떠벌리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커뮤니티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글을 하나라도 더 쓰고, 이벤트라도 하나 더 여는 사람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문학의 죽음 담론도 그런 거 아니겠는가. 문학의 죽음을 앞 다투어 다루려는 사람일 수록, ‘문학은 바로 나의 시대에 죽어버렸고, 나는 그것을 몹시 안타까워한다’는 식의 태만한 특권의식이 엿보인다. 이건 사사키 아타루가 조르주 아감벤을 비판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시대에 끝이 찾아오리라는 종말론적 사고관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전두엽 브레이커>에서 말하는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퓨전, 아마도 그것이 현 시대 문인들의 생존전략일 텐데, 생각보다 그것을 능숙하게 해내는 작가를 찾아내기가 힘들다. 그나마 파우스트 계열의 세이료인 류스이, 니시오 이신, 마이조 오타로 등을 언급해볼 수 있겠다. 그중에서도 마이조 오타로의 <쓰쿠모주쿠>를 추천하고 싶다. 문체는 라이트노벨과 크게 다르지 않고, 소재 역시 이야미스(추리소설의 한 장르로, 내용이 끔찍하여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타입의 소설)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비트(beat가 아닌 bit입니다.) 시대의 현실을 첨예하게 폭로했다.   이제 <전두엽 브레이커>에게 묻는다. 잘 퓨전했는가? 사실 장르문학을 “돈은 잘 벌리지만 실상 유치하고 수준 낮은 작품들”로 묘사하는 시점에서, 원만한 퓨전은 힘들어 보인다. 이 소설 전체가 “순문학을 하는 내가 장르문학의 수준에 맞추어 주겠다.”라는 식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더 큰 문제는, “그렇다면, 이 소설은 순문학적인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인간 내면에 대한 치열한 고찰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나, 글쓰기 형식에 대한 문학적인 접근을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존나 쎈데 너희가 어디서 깝침?>과 <내가 글을 쓰는데 힘의 63%를 숨김>의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 걸까.   결과적으로 보아, <전두엽 브레이커>는 장르문학의 수준을 의도적으로 더 낮추어 가상의 적을 만들어낸 느낌이다. 쉐도우 복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따지면 순문학에도 그 정도로 못 쓴 작품들은 널려 있을 텐데. 장르문학의 각종 클리셰들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미 장르문학에서 너무도 충실하게 해온 작업들이다. 이걸 굳이 순문학에서 다루어 내며, 특히 순문학 작가와 웹소설 작가의 소득 차이를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잘 나가는 웹소설 작가들에 대한 질투와 돈이 안 되는 순문학에 대한 비관으로 느껴진다.   너무 비판만 한 것 같아서 첨언한다. 사실 난 이런 류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야,,, 재밌으니까. 문학에 대한 이야기, 문단에 대한 이야기, 문인에 대한 이야기.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메타적인 이야기들을 지나칠 수 없다. 작가가 쓰면서 즐거웠고, 독자가 읽으면서 즐거웠으면 그걸로 ok 아니겠는가?   뭐, 이정도로 해두자.    ​ 요제프k
돌아갈 수 없는 과거는 숙명이었을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고 체념하고, 후회하고 체념하는 과정.이 소설은 이런 감정을 아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장소와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한 증강현실 구성이면서도, 철저히 소설 속 주인공이 현재에 발 딛고서 생생하게 소설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감탄했다. 이렇게 생생한 소설이라니,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주변에 읽어보라고 추천을 하고 링크를 보내기도 했다.  문득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 기법에 감탄하던 것과 달리 두 번째 읽으며 더욱 인물의 입장과 문장 하나하나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제야 소설 소개 글에 작가가 이걸 쓰고 울었다고 하는지 정확히 와닿았다. 나도 알 수 없는 에너지에 사로잡혀서 눈물이 쏟아졌으니까. 절실하고 절박한 무엇.“지친 우리는 그걸 운명처럼 받아들였다.”“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너와 내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결과였다.”소설 속 남자는 운명이라 생각하고 자기 연인의 손을 놓는다. 그는 현재를 추구하기에 너무 현실적이고, 너무 단정한 사람이다.어떤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살갗에 파편을 안고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파고들고, 문득 우리를 아프게 하고, 때로는 일깨우기도 한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증강현실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사람 중 사람이든 무엇이든, 무척 소중하고, 무척 사랑한 것을 현실이라는 벽을 핑계로 놓아본 적 사람이라면 눈물을 쏟으며 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살려줘."소설 속 여자는 주인공과 헤어지고 시체처럼 살았다. 살고 싶어서 주인공을 갈망한다.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어떤 뜻하지 않은 이별이 얼마나 한 사람의 인생을 메마르게 만들었는지. 여자의 당혹스러운 제의가 왜 참을 수 없었는지 소설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그들이 그리 된 것은 숙명이었다. 나주의 명소에서 전생이 겹친다. 전생이 있고, 내가 주인공처럼 전생을 보게 된다면 숙명적으로 찾아온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번 생에 그들이 손을 놓지 않았다면, 조금 더 해명하고 욕심냈다면. 어쩌면 숙명이 아닐 수도 있었을까. 나주를 가본 적이 없는데도 비가 내려 촉촉한 나주의 모습이 소설을 읽는 내 눈 앞에 선명하게 펼쳐진다. 또다시 이번 생은 죽는 날까지 이별하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또 만날 그들의 숙명적 아픔이 풀리기를.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나의 인생의 숙명도 부디 이번 세상에서 해소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제 이 둘은 잘 될 수 있는 걸까. 다음 생에? 다다음 생에? 얼마나 이 아픔을 더 겪어야 이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크게보면 전생과 현생이겠지만, 한 사람이 인생을 살며 겪는 반복되는 아픔과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본 적 있다면, 한 번쯤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하고 싶다. 김유
한 편의 영화처럼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한 편의 영화처럼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추적추적 비 내리는 11월, 나는 나주역에 도착한다. 평생 나주에 와 본 적 없는 내가 나주에 온 유일한 목적은 바로 ‘너’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이 소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니, 이보다 더 상투적일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간 그런 사랑에 관한 소설이 왜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금 깨닫게 된다.  솔직히 그런 사랑에 대한 허다한 이야기들은 질릴 법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누구나 한 번쯤은 첫사랑이니, 짝사랑이니, 금지된 사랑이니, 기타 등등 비록 종류는 다르겠으나 그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경험했을 법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보편적이면서도 솔직한 감정을 다룬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한편 독자에게 스토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소설은, 영화 혹은 드라마와는 다른 조건을 갖는다. 영화나 드라마는 보다 입체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영상 기술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며 유명 연예인의 인기와 시각뿐만 아니라 사운드처럼 청각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그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는 여러 추가적인 옵션들을 통해 독자들의 감동을 배가시킬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는 셈이다.  그와는 달리 소설에서는 활자와 평면적인 지면에 한정된다. 시각적인 차원에서만 보자면, 언뜻 출발선부터 다른 불리한 조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주에 대하여, 너에게만 하는 말>을 다 읽고 난 이후에, 그러한 나의 통념이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  작가는 소설의 조건에 해당하는 평면적인 지면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모든 시각적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온전한 이야기성을 구축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듯 여겨졌다. 그리하여, 나지막이 대화체로 읊조리는 듯한 나의 독백은 오로지 ‘너’라는 존재 하나만을 향한다. 무엇보다 소설 속에서 모든 요소들은 적재적소하게 제 위치 값을 지닌다.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 허투루 쓰이는 법이 없다. 그로 인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그에 담긴 감성이 독자에게 온전하게 전달되어진다. 발걸음에 따라 숨소리의 여백조차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고 투명한 감성으로 와 닿았다.  뿐만 아니라, 낯설고 독특한 증강현실 구성법이 매력적이었다. 현재 서사를 중심으로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나는 너를 만나고 또 만나고, 만나고 또 만난다. 인생 윤회와 환생 프로그램을 보여주듯, 너와의 인연과 관련된 나의 전우주적 서사는 눈물겹도록 뭉클하다. 이를 통해, 인연이란 무엇인가, 또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이 열리는 것 같았다.  소설에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상투성이란, 소재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혹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관한 방식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감히 해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한 자리에 정체되지 않고 늘 새로움과 독창성을 추구하려는 작가적 마인드에 박수를 보낸다.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솔트
짐에 대한 단상 간혹 유튜브 알고리즘에 정리 영상이 뜰 때가 있다. 본인 스스로 집을 정리하지 못해 누군가 대신 의뢰인의 짐들을 정리해 주는 것이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하면 다행이다. 때론 정리의 임계점을 넘어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쓰레기 같은 집들도 있다.  미니멀리즘이 대세인 시대, 집을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는 것은 중요한 화두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눈에 보이는 집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소설 <짐>은 그처럼 일상에서 누구나 겪을 법한 일을 소재로 다룬다. 제목도 짐, 내용도 짐, 주제도 짐이다. 이처럼 명확한 초점으로 인해 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재미를 제공해준다. 마치 과녁 한 가운데 짐이라는 포지션을 향해 단 한 차례 활시위를 정확하게 튕기는 느낌이랄까. 그 때문에 한 호흡에 소설이 읽혀지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말하는 짐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짐만은 아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소설적으로 ‘뻥튀기’ 되는 짐의 의미는 애초 소설을 처음 읽을 때와는 달리 나를 넘어서 전우주적으로 확장되어진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좀 재밌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여러 날 동안 짐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그러다 내 기억의 방 한 구석에 쳐 박혀 있던 해묵은 짐 하나가 정리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너무 오래 되어 도무지 짐이라고 조차 여겨지지 않았던, 그런 마음의 짐이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서 풀리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오래 묵은 기억이나 혹은 오래 잊고 지낸 자유나 혹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혹 나처럼 기억의 방을 정리하고 싶은 누군가 있다면, 이 소설을 추천해 본다. 솔트
바바와 야가, 혹은 바바야가의 슬픈 사랑 이야기 바바와 야가, 혹은 바바야가의 슬픈 사랑 이야기 여기,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한 존재가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의 존재성 안에 둘 혹은 셋으로, 그 존재성이 달라지기도 한다. 바로 끝도 없이 펼쳐진 눈의 평원, 러시아 슬라브 족의 민담에 등장하는 바바 야가이다. 바바는 할머니, 야가는 마녀 혹은 마귀할멈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바바 야가는 마녀를 통칭하지만 때론 바바와 야가를 따로 분리해서 둘 이상의 마녀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바 야가는 유럽의 마녀들과는 달리 빗자루가 아닌 절구통을 타고 다니며, 커다란 닭다리가 달린 집(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닭다리 달린 성의 모티브라고 함)에 살며, 아이를 잡아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바바 야가가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외모 때문에 남들로부터 놀림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바바 야가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숲속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화이트리스>에서 다루는 소재는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만의 독특한 이야기 세공법을 통해서, 이 소설은 어디서도 접해보지 못한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로 변모한다.  ‘바바와 야가’이거나, 혹은, ‘바바야가’이거나.  이 소설에는 바바와 야가로 불리는 두 존재가 등장한다. 장소적인 배경은 서울이며, 그들이 사는 곳은 불안정한 거주 공간이다. 흔한 사랑 이야기이다. 그런데 잘나가는 사랑이라면 소설의소재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프니까, 이야기가 되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내재했을 것이다. 그런 바바와 야가의 사랑 이야기가 투명하고도 슬프게 와 닿았다.  한번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묘하게 독자를 매료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러시아 마녀가 걸어놓은 주문에 걸려든 것처럼,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다른 빛깔로 와 닿는다. 첨엔 바바와 야가라는 두 존재의 이야기로, 그 다음엔 바바야가라는 한 존재의 이야기로, 또 뒤돌아서면 실제 바바야가라는 마녀의 이야기로 계속 진화를 거듭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솔 작가님의 ‘절묘한’ 심사평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순수 문학이지만 판타지성이 극대화된 작품처럼 와 닿았다. 그로 인해 주인공의 감정이 원석 그대로 투명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아픈 것을 있는 그대로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절제함이 좋게 와 닿았다.  다만, 그러한 절제함이 때론 문장에서의 결락으로 작용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재차 읽다보니 오히려 그러한 결락들 또한 이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이야기의 판타지성을 자극하여, 이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요소로 작용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사뭇 기대가 된다.  솔트
걍, 재밌어요!! 무림의 고수가 나타났다. 그가 칼을 한 번 휘두르면 이집트 대피라미드에서 보텍스가 소용돌이치고, 또 한 번 칼을 휘두르면 우주에서 뮤온 입자가 날아든다. 그가 이렇게 칼을 통해 이르고자 하는 경로는, 걍 소설을 쓰기 위해서란다. 덕분에 소설 속의 주인공은, 그의 수련과정을 통해 구축된 고도로 정제된 언어적 에너지를 고스란히 탑재한다.  일단 이 소설에 대해 말하자면 한 마디로, 걍 재밌다!  일체의 군더더기 하나 없다. 소재, 주제, 문체, 심지어는 유머러스한 화법까지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제목으로 내세운 ‘공동’이 주는 울림이 크게 와 닿았다. 공동. 처음 제목을 봤을 때, 이상하게도 계속 동공이랑 혼동되었다. 공동 동공 공동 동공. 이러한 소용돌이처럼, 주인공의 삶에 있어서 공동이 갖는 의미는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 공동체에서의 공동(共同)도 되지만, 한편 보텍스에서의 공동(空洞)을 의미하기도 한다.  ‘언어가 생물이라면 ‘고용 안정성’이라는 말은 멸종 위기종이다‘라는 작가의 말이 꽤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출발한 소설 <공동>에서 ’공동‘이라는 말은, 어쩌면 멸종 위기 종에 해당하는 ’고용 안정성‘이라는 말을 끝끝내 멸종되지 않게 붙잡아 두고자 하는, 작가적 저항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언어에 대한 작가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이야기이지만, 정작 그 의미를 곱씹다 보면 예상치 못한 울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가의 언어적 감각에 감탄을 하며 읽었다. 그냥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듯한 화법이지만, 사유를 세련되게 담고 있었고, 문장 하나하나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리하여 어느새 나 또한 보텍스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재밌는 소설을 만났다.  걍, 읽어 보시기를 추천드리며...!! 솔트
현관이 사라진 방을 읽고 '현관이 사라진 방'이라는 제목에 호기심이 생겨서 클릭했다. 이어지는 작가의 말을 보고 감명받아 읽게 되었다. 작중 가장 좋아했던 장면을 삭제했다니. 그런 어려운 일을 해낸 소설 완성도는 정말 대단하겠다고 생각했다.    다 읽고 나서 다카모리 씨로 겹쳐 보이는 주인공 민준의 아버지뿐 아니라, 나의 아버지, 수많은 다카모리 씨가 줄 선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결국엔 혼자일 수밖에 없는 걸까요?” 민준의 외침은 결국 혼자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느꼈다.   사실은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된 악의를 경멸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주인공. 민준은 결국 자신도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 걸로 보인다. 사야카와 자신이 어쩌면 더 가까운 것은 아닌지 두려워 보였다.   "아팠던 건 아팠던 대로, 싫었던 건 싫었던 대로 분리할 수 있는 요령도 연륜이라면 연륜이라 할 수 있을까?" 현시대의 수많은 다카모리 씨를 떠올려 본다. 사야카의 악의는 싫은 일이기보다는 그에게 아픈 일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와도 겹쳐지는 다카모리 씨에게 나는 정말 사야카보다 덜 나빴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많은 다카모리를 그보다 젊다는 이유로 외로움으로 내몰지는 않았을까.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민준이 다카모리 씨에게 기대한 것은 그럼에도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일본인인 다카모리 씨의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의 IMF시절에 좌절을 경험한 아버지들의 이야기기도 하다. 그들도 여전히 서핑도 타고 싶고 새로운 삶을 꿈꾼다.   충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현관이 사라진 방이 그러지 말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는 기분이다. 사라진 현관을 되돌리려면 이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먼저 갈 사람이라는 말. 나도 누군가에게는 먼저 갈 사람이다. 김유
우리 시대의 모성에 대해 떠올리다 아화는 모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시대의 모성에 관한 화두로 이어진다.  주인공 김유민은 생모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생모의 부재는 곧 모성에 대한 부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에게 생모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금기된 생각, 즉 보이지 않는 것들(-본문 인용) 혹은 너무 많은 생각(-본문 인용)인 셈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한 여자를 집에 데려온다. 그것은 김유민의 인생에 있어서 모성과 관련된 가장 최초의 사건으로 자리 잡는다. 그간 철저히 말라있던 모성에 대한 감성이 그 여자를 통해 최초로 발화되는 것이다.  이후 그 여자는 김유민에게 아이러니한 존재로 남는다. 모성에 대해 접근이 가능한 유일한 통로인 동시에, 또한 모성에 대해 접근이 차단되는 또 다른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 불이 발화되는 지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한 편의 짙은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사막처럼 말라 있던 황룡사 옛터를 향해(-본문 인용) 그 여정은 시작된다. 아화,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된 곳이다. 폐쇄된 역, 그 너머에는 비도 다다르지 못한다. 잿빛의 짙은 운무 속에 가려진 진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의 단서들. 서로 다른 층위의 운무에 실린 기억의 조합들은 모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이미지로 구축된다.  작가의 공력이 상당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유민의 동선을 작가가 탐사하듯 뒤따라가는데 아화의 풍경들과 김유민의 내면이 잘 어우러진다. 그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레 나의 엄마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모성의 부재를 통해 역으로 모성에 대한 화두가 발화되는 지점이다.  우리 시대의 모성에 대해 떠올려 본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엄마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고 건강을 묻는 안부가 전부가 되어버린 엄마를 떠올리며... 왠지 황량한 옛터를 맴돌 듯, 마음 한켠이 쓸쓸해진다.  아화로 향하는 기차를 타야 할 시간, 그 여정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될 모성은 무엇일까. 초록달
감각적인 소설을 읽고 싶은 당신이 선택해야 할 작품 이 단편 소설은 2023년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이다. "그건 태양풍이 너무 뜨거워서 그래. 어쩌다 혜성이 그곳을 지나는 거고, 그래서 그런 거야."(데스밸리 판타지, 이시경)작가는 독자에게 데스밸리에 대해 완벽히 묘사해 마치 그곳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게 해준다.정말 지구상에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자세하고 환상적으로 묘사된, 다른 행성과 같이 느껴지는 장소의 특별한 분위기에 집중해서 읽게 된다.라세르타라는 별과 도마뱀을 통해 아들 현우가 겹쳐가는 장면들을 읽으며 그 적막하고 감각적인 기분에 코가 시큰해졌다.작고 푸른 도마뱀의 이미지가 나타내는 생명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것이 폭우로 생성된 물에서 사파이어 빛이 나는 라세르타가 자유롭게 유영하다가 심연으로 가라앉아가며 물결 너머로 사라지는 장면은 직감적으로 현우를 떠오르게 한다.태양에 가까워진 혜성처럼 주인공에게 나타나 꼬리를 자른 도마뱀이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현우와 겹쳐지는 세련된 필력을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순간에 집중하는 것만이 최선이야. 우리에게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아."(데스밸리 판타지, 이시경) 한참을 라세르타와 대화하며 위기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따라가다가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제 각자의 길을 가야 해."(데스밸리 판타지, 이시경) 이별의 과정을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그릴 수 있을까.나는 이 소설을 읽고 자식이 없음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그렇지만 현우가 태어나 만났던 시간들과 영원히 과거 현우가 건강하던 시점에 존재하는 행복의 순간을 느꼈다.많은 분이 읽어 보셨으면 좋겠다. 데스밸리의 풍경과 소설 속 상징이 보여주는 폭발적인 감수성을 느꼈다. 누군가가 없는 슬픔을 극복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처할지도 생각했다.최근 읽은 작품 중에 이토록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나 생각해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준 이시경 작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김유
'거기'에 대하여 이 소설은 여성의 '거기'에 대하여 쓴 것이다. 방바닥에 거울을 놓고 흰 머리를 뽑다 문득, 정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기'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거울을 내려놓고 일어나 조심스럽게 팬티를 벗었다. (본문 일부) '거기'를 말하기 위해 소설의 도입부에 조지아 오키프의 검은 붓꽃 그림을 불러온다. ​꽃잎의 속살은 은밀하게 감추어진 여자의 성기와 닮았다. 검은 붓꽃은 얼마 전에 본 나의 '거기'와 닮았다. 마음먹고 들여다본 나의 그곳은 신비롭기는커녕 생명력을 상실한 채 황량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곳, 성기, 음부, 버자이너. 버자이너의 원래 뜻은 칼을 넣어두던 칼집이라 했던가? 씁쓸한 기운이 입안에 감돌며 통조림 속의 과일처럼 밀폐된 내 처녀성을 생각한다. (본문 일부) 이와같은 연결고리로 미루어 <검은 붓꽃>의 소설적 도전은 파격적이다.그것을 다루는 작가적 태도도 어물쩍거리거나 내숭를 떨지 않고 직설적이다.<버자이너 모놀로그> 같은 책도 낡은 느낌을 주는 세상이라고 치면소설에서 이 정도 용기를 내는 건 조금도 어색하거나 이상한 일일 수 없다.커다란 중심사건 없이 엄마, 친구를 걸어 '거기'의 문제를 심화하고자기 성찰적 결말에 도달하는 것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후감을 쉽게 정리하여 말하기 어려운 소설이지만이것을 쓴 작가에게 격려와 힘을 주고싶은 소설이었다는 후감을 남긴다.    책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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