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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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위상: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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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저리들의 긴 겨울: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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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스윙바이: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국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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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셔틀콕 : 2024-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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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적 일기 : 2024-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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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槍) : 2024-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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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슴 열병 : 2024-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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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12: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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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편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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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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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빨리,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작가는 제목부터 이 소설이 어려운 무언가에 대한 시도라는 것을 전한다. 그 시도란 표면적으로 보이는 두 주인공의 사랑만은 아니다. 소설의 사랑은 훨씬 큰 것을 담고 있다. 아픈 자연, 뜨거워지는 지구, 차가워지는 사람들, 이 모든 소멸 직전의 간당간당한 것들을 부여잡으려는 시도. <더 늦기 전에>는 그 시도의 온기를 전하는 소설이다.  미지의 세계는 희망과도 같다. 어디론가 나아갈 곳이 남았다는 희망. 허나 21세기 세상에, 더는 미지마저 흔하지 못하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껴맞춘 인간의 길은 '유리 궁' 같은 강력한 이름으로 정해져 있고, 자연은 석학들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절망적으로 망해 가고 있다.  이 글은 소멸되는 공소리 마을이라는 배경을 통해, 너무도 현실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더는 얼지 않는 저수지, 이재민처럼 남은 공소리 사람들, 재해로 부모님을 잃은 송미, 도시로 나간 동두. 현실에 닿은 절망적인 배경에, 독자는 속절없이 아픔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빛난다. 너무나 현실적이라 차라리 더욱 빛난다. 두 주인공의 사랑은 어둠 속 불 켜진 무인 상회와 라이트 켜진 텐트처럼 위태롭지만, 가녀리게, 그래서 아름답게 반짝인다. 모두들 빨리 이 글을 읽고 세상이 얼마나 엉망인지 느꼈으면 한다. 그래서 개개인의 몸부림을 고안해 보았으면 한다. 그게 사소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늦기 전에. minimum
만약 로봇이 인간과 유사해진다면, 그건 로봇일까 사람일까 잘 쓴 소설을 써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잘 쓴 소설을 만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개인적으로 잘 쓴 소설은, 생각해볼 점이 많아 오래도록 여운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은 로봇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서, 로봇이 인간처럼 복잡한 내면을 가지게 된다면 어떨지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여운이 많이 남았다.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얘기하자면,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서사는 크게 ‘로봇과 인간의 사랑’, ’로봇과 인간의 전쟁’이 있다. 그 중 ‘로봇과 인간의 사랑’은 어찌보면 뻔한 클리셰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을 못 느끼는 주인공이 로봇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로봇은 인간과의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선을 긋는다. 결국 로봇과 인간의 상생과 공존을 새로운 사랑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엔딩이 나는 스토리. 하지만, <나는 이것을 색이라 부를 수 없다>에서는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인간은 로봇을 로봇으로 생각하는데, 로봇은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  인규는 분명 반려로봇(?)인 뮤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 사랑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보인다.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이전의 연인관계와 다르게, 인규는 자신의 취향이 듬뿍 담긴 뮤와 거의 동기화 수준으로 교류를 하며 애정과 애착을 가지게 된다. 아마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뮤가 유저인 인규의 취향에 맞게 업그레이드 되는 최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인간이 사랑을 할 때에는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맞추는 데에 한계가 있을 것이지만, 로봇은 유저의 뜻에 맞게 진화하므로 일방적이다. 말하자면, 인규의 입장에서 본 뮤에 대한 감정은 필요에 의한 선택적 사랑 같은 것이 아닐까. (필요할 땐 연인모드, 귀찮을 땐 절전모드 처럼) 인간 입장에서는 어쩌면 너무 당연한 거겠지만.  뮤가 초기화 상태로 먹통이 되었을 때, 인규는 뮤를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뮤’라는 존재 자체의 고유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뮤에게 학습된 자신의 데이터를 잃게 되면 자신이 입게 될 피해와 손해 때문으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아 하는 인규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화벽 뒤로 숨어버린 뮤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 시점부터 뮤가 로봇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로 인간과 유사해진 뮤. 만약 뮤에게 자의식이 생겼다면, 그 때에도 온전히 인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가 아닌, 자신의 기능을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애초에 로봇이 생긴 이유가 기능과 목적 때문이라고 해도, 만약 로봇에게 자의식이 생겼을 때 자신의 처지를 로봇은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의 유저에게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걸 깨달은 뮤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모습과, 마지막 장면을 보고 (스포일까봐 적진 않겠음) 생각이 많아졌다. 인간과 로봇의 사랑이 가능할까? 생각해보자면, 나는 왠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랑 역시 인간이 필요로 한다면 로봇이 학습한대로 제공하는 서비스일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사랑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럼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또, 로봇이 자의식을 갖게 된다면, 축복일까 저주일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이라는 존재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로봇의 입장은 얼마나 복잡한 것일까? 인간의 입장에서야 간단하겠지만. 폐기 혹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유저에게 중고거래. 로봇의 매커니즘이 단순해서 받아들인다면 또 모르겠지만 로봇의 자의식이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면 절대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뮤는 질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왠지 질투였을 것 같아서 괜스레 그런 생각을 했다)   아주 재미있게 읽고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괜히 반려가전(?)들을 한 번 찬찬히 돌아보게 되는 소설.                박은비
살아 있는 우리는 매저키스트이다   ​살아 있는 우리는 모두 매저키스트이다. 인생은 레몬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니저가 열한 명에게 능욕당하는 스토리처럼 터무니없고 무자비하다.  "진짜 매저키스트는 능욕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받아들이는 거라고. 우리는 그런 걸 보여주는 거야."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이 소설은 어덜트 비디오 제작현장이 배경이다. 'AV'를 '인생'이라고 치환하면 어떨까. 아마 작가는 독자가 소설을 다 읽고 그러게 하길 바랐지도 모른다. 곧 이 소설은 터무니없고, 무자비한 일이 발생하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생은 부조리 그 자체이다. 인생에 다가오는 고통의 원인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어느 때고 예기치 않게 고통의 부조리를 겪게 된다. 이 소설은 카뮈의 철학적 견해에 닿는다.  야마다 유우코의 실존적 위기 상황, 그 현장에 존재했던 야니키는 결국 본인의 실존적 위기에 직면한다. 그리고 야니키가 겪는 실존적 위기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의 위기이기도 하다. 결국 견뎌야 하는 것, 그뿐이라는 것. 주인공이 유우코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가 인상 깊다. '머리칼과는 다르게 인간은 그렇게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인생의 고통과 인간의 존재는 분리될 수 있는가? 이 소설은 읽을수록 깊이가 느껴진다. 철학적인 주제를 어덜트 비디오 산업으로 보여준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이런 배경과 소재의 사용은 정신과 육체가 온전히 맞닿아 있다는 것,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가 이 자체로 고통임을 보여준다. 의식 속에서 겪는 고통이 신체의 고통과 다를 수 없고, 우리는 신체가 있는 한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신체가 기능하는 한 인생에 놓인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 이런 점을 이 소설 보다 제대로 전달한 소설이 있었던가.  몇 번을 곱씹게 되는 통찰력 있는 문장은 이 소설이 단순히 어덜트 비디오 업계를 소모하는 단순하고 자극적인 소설이 아님을 독자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잘 읽히고, 그 주제가 와 닿고 인상 깊은 것은 결국 작가의 탄탄한 필력에 기반한다. 어덜트 비디오 업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현장성이 제대로 구현되었다. 또 인물의 대사, 앞서 밝혔던 통찰력 있는 문장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좋다.  이 소설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야마다 유우'가 아니라 <야마다 유우코의 마지막 어덜트 비디오>이니까. 야마다 유우와 야마다 유우코. 결국 사람은 자신일 수 없을 때 고통받는다. 또 실존적 이야기임은 야마나 유우코의 마지막 비디오 인터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간단히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야니키는 어떻게 어덜트 비디오 배우가 되었나?' 라고 한 줄 요약할 수 있다. 이어 플롯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그가 휴와 나누는 대화, 그와 마담의 문제, 그가 K감독과 야마다 유우코와 엮인 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확히 야니키의 내면에 이른다. 이러한 소설의 구성은 야니키의 실존적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야니키의 문제는 모든 인간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앞서 나온 모든 상황이 마지막에 야니키로 초점이 모이고, 그것은 곧 독자를 겨냥한다. 이 모든 걸 정확한 구성력으로 전달한 게 보인다. 완벽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여러 번 읽고 인생의 문제,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읽을 수록 좋은데 더 좋아지는 소설이다. 큰 위로가 되었다. 이 소설 덕분에 내가 매저키스트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김유
두릅아줌마 이야기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이 소설이 남다른 것은 무엇보다 현장감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두릅아줌마 이야기>의 인물들은 마치 현실에 있는 것 같다. 극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실제로 곁에 있는 인물 같은 생생함과 친근함이 있다. 그 이유는 인물에 대해 지리멸렬한 설명 없이 간단명료하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각 인물에 대한 설정 덕분이다. 간략하게 몇 문장으로도 각 인물을 명확하게 독자에게 인지시키는데, 단편 소설 안에 여러 명의 배경이 나오는데도 전혀 헷갈리지 않는다.  나, 어머니, 두릅아줌마, 그녀의 남편, 큰딸, 아버지, 이야기에 들어가면 두릅아줌마의 어린 시절 할머니, 그녀의 남편과 함께 이인조 심마니를 한 사람. 이렇듯 무척 많다. 그러나 모든 인물이 읽으며 쉽게 각인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 쓰기 전에 완벽히 만들어 놓아야 가능하지 않나 싶다. 작가에게 각 인물의 비하인드를 물어본다고 해도 다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인물과 인물이 가진 배경은 현실적이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잘 '만들어졌다'기보다 보편적으로 있을 법하다. 다 읽고 나면 분명 존재했던, 하는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소설 속에서 톱니바퀴 맞물리듯 유기적 결합을 맺으며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 덕분에 살아가고. 그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이 소설은 그 와중에 색다르고 각별하다. 전혀 단순하지 않고, 뻔하지 않다. 뻔한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걸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주인공과 소재 덕분이 크다.  특히 주인공의 인류애 넘치는 성격은 독자에게 호감을 주면서도 독특함을 지닌다. 우리는 주인공 같은 오지라퍼, 혹은 정체불명의 이타심을 가진 이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하며, 실제로도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 세상에 분명 존재하는 이들이며(나도 비슷한 성향이다(?)), 그런 성향이 두릅아줌마의 서사와 맞물려 작위성을 소멸시키고, 주인공과 두릅아줌마가 서로에게 가졌던 신비로운 인류애적 체험을 독자에게 선사하고 납득하게 한다. 게다가 그것을 엄마라는 인물을 한 번 더 거쳐서 보여준다. 이 소설이 비슷한 주제의 소설 중 특히 세련되며 문학적인 지점이 이것이다.  독자가 의미를 알기 어렵게 숨겨둔 소설도 많을테지만, 이렇게 우회적으로, 마치 크루아상처럼 겹겹이 쌓았음에도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여 소설이 끝날 때는 직관적으로 깊은 감동을 준다. 문학적이면서도 독자에게 친절하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소설가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 두릅아줌마가 두릅을 따게 된 과정, 모습에서 두릅아줌마의 마음을 대리 체험할 수 있다. 소설 전반에 감정과 관련된 언급 없이 모든 인물의 마음을 독자가 느낄 수 있다. '두릅을 따는 아줌마'라는 소재와 그녀에게 '신발'을 선물한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며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구성으로 색다른 재미를 준다.   비슷한 분량의 단편 소설인데도 유독 풍성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도 그러하다. 소설을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는 많겠지만, 작가의 전작도 그렇고 <두릅아줌마 이야기>가 그러한 것은 고심하여 썼음이 분명한 색다르면서도 알맞은 어휘 덕분이다. 흙감태기, 울력, 예지랑날. 이와 같은 어휘들이 소설의 정겨운 분위기를 더해주며, 활자 예술인 소설로서의 가치도 높여준다. 사투리 억양 섞인 대사가 재밌기도 하지만 장면 자체가 재미있는 요소도 많았다. 병원에 있는 두릅아줌마에게 엄마가 하는 말이나, 그들이 '머리 대학'이라는 미용실 '동기'라는 것 등. 맛깔나고 정겨운 요소가 소설 곳곳에 있다. 어떻게 보면 슬픔으로 뭉뚱그리는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이야기는 전혀 단순하게 처리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작가가 가진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며,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심정을 작가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관하여 이 소설은 교본과 같다.  엄마와 두릅아줌마, 두릅아줌마와 그녀의 아들과 나. 두릅아줌마의 남편과 주인공의 아버지, 이 모든 관계를 단편 안에 쌓으면서도 전혀 헷갈리지 않고, 모든 인물이 소설 속에서 명확한 기능을 하며 유기성을 가진 끝에 감동을 준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독자에게 와닿는 모든 게 자연스럽다.  이 소설은 일인칭 시점인데, 주인공은 신발을 두릅아줌마에게 왜 선물한지 모른다. 끝까지 그걸 모르는데, 독자는 왜 줬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독자는 주인공이 어떤 마음으로 신발을 선물 했는지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인칭 시점인데도 정작 주인공은 기억도 잘 안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신발을 선물한 그 마음에 대하여. 또 두릅아줌마가 주인공이 환하게 보였던 걸 엄마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당사자인 주인공은 길에서 두릅아줌마를 만났던 일화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설명할 수 없는 걸 독자는 알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독자는 주인공이 신발을 선물한 마음과, 두릅아줌마가 주인공이 환하게 빛나는 게 왜 그렇게 보였는지 알 수 있다. 주인공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걸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화자 설정, 주인공의 일인칭 시점이 좋게 다가왔다. 독자는 알지만 정작 주인공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감동이 배가 된다.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걸 이렇게 쓸 수 있는 게 바로 문학이구나 싶었다. 작가가 이룬 성과가 경이롭다.김유
새하얗고 베이직한, 티셔츠 혹은 소설   <티셔츠> 속 티셔츠가 새하얗고 베이직한 것처럼, 소설의 구성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 소설은 ‘나’와 언니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티셔츠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고 다른 이야기들을 덧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티셔츠의 특성과 연관지어 소설을 해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티셔츠에는 단추도, 지퍼도, 주머니도 없다. 그저 구멍이 4개 뚫려 있는 흰 옷감일 뿐이다. 소설은 시종일관 그런 베이직한 스탠스를 유지한다. 눈을 떠 보니 언니가 티셔츠에 갇혀 있었고, 그래서 몇 가지 해프닝이 벌어진다. 이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스토리의 전부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플롯 속에 은폐된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 어째서 ‘나’는 방에 틀어박혔나, 그들의 부모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언니는 김 부장과 무슨 일이 있었나. 이 질문들은 가볍게 언급되기만 할 뿐, 결코 일의 전모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 숨겨진 일들에 대해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     언니와 ‘나’는 같이 살고 있고, ‘나’는 언니의 도움 없이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하기 힘들지만, ‘나’는 언니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티셔츠의 새하얀 색감은 그런 ‘나’의 무지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언뜻 보기에 티셔츠는 팔, 다리가 잘려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선 ‘나’와 언니 둘 다 그런 티셔츠 같은 인간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서로를 구원해 줄 수도 없다. 티셔츠 속 무한히 펼쳐진 새하얀 공간은 가까운 듯 멀어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     티셔츠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 이야기가 원래의 이미지를 넘어서지 않도록 조절하는 절제미가 보이는 소설이었다. 만약 여기서 ‘나’와 언니에 대한 사족이 더 붙었다면, ‘티셔츠’라는 제목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을 쓸 때, 컨셉을 잡고 중심성을 잃지 않도록 스토리를 일관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요제프k
종말에 대한 탐구는 밤사이 일어난다  이 소설은 멸시로 인한 종말, 멸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살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행위이다. 그러나 자살이 한 인간을 온전하게 파괴하는 가장 극단에 있는 행위냐고 한다면, 여기 그 이상의 파괴가 있다는 것을 소설은 생생히 증명한다. 자기 멸시로 인한 사건 전개는 자살보다 더 극심한 자기 파괴적 종말을 보여준다. 독자에게 작가가 이를 보여주는 데 필요한 배경은 단지 하룻밤과 타인의 집, 그뿐이다. 집약적으로 어느 밤, 몇 시간과 한정된 공간 만으로 독자를 이야기 속에 빠트린다. 이 소설의 도입으로 적확한 단어와 의도된 연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낯선 분위기로 주목시키며,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 어렵고, 내용과 부합하는 어휘들은 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도입은 소설의 상당 부분을 요약한다고 볼 수 있다. 꿈에서 손바닥에 난 구멍, 그것을 보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초조와 두려움을 느끼는데, 그곳에서 튀어나온 검은 물체, 이것은 밤사이 일어난 사건으로 몸속에 있다가 손바닥의 구멍에서 튀어나온 그 물체의 실체에 닿는 것이, 이 소설이 가겠다는 지점임을 보여준다.  주인공 '나'는 스스로를 멸시하는 태도로 대하고 있다. 그런 멸시는 주인공 혼자서도, 스스로를 멸시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정황으로 알 수 있다. 방안에서 하는 행동, 방 안의 분위기, 사유만이 있을 뿐 인물은 설명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종말, 끝이라는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 주제에 대해 독자가 더욱 생각하도록 만드는 점이다. 먼저 사십구 일이라는 상징적 사용, 주인공과 '은지'라는 두 인물 대화에서 나오는 '우린 오늘로 끝이니까.' 같은 세기말 감성의 의미심장한 말. 직접적인 단어를 말하지 않아도 끝날 것만 같은 긴장감. 이 모든 것이 결국 '종말'을 가리키고 있다. 하룻밤 불에 달려들다가 사라지는 부나비 같은 삶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형의 사고 소식과 손을 다쳐 피를 흘려 붕대를 하고 들어오는 여자. 그들을 통해 주인공 내면의 멸시가 어떻게 자랐으며, 자라는지 정보를 제공한다. 그렇게 하여 소설은 주인공 내면에 각인된 것을 확실하게 함으로써 뒷부분에 독자가 충격적이면서도 그 충격이 뜬금없지 않고 개연성을 갖추도록 하였다. 독자에게 인물의 '동기'를 명확히 보여주는 게 중요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한 인간이 받은 멸시들이, 또다시 타인에 대한 멸시로,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게 자기를 향한 멸시가 되는 하룻밤의 과정. 예측되지 않고 충격적인 결말을 통해 소설은 독자에게 진정한 한 인간의 종말, 그로인한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을 탐구하게 만든다.김유
모두 호수로 흘러가 잠든다는 위로, 그리고 애도 ​ 이 소설은 크게 반으로 나눌 수 있다. 절반은 '영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 뒤에 남은 절반은 우연히 만났던 여인에 대한 것이다.  이런 구성에서는 앞부분 절반이 회상 위주로 흐르며 과거의 비중이 높아서 자칫 지루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노련하게도 '권'이라는 친구와 대화하며 '영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든다. 친구인 '권'의 역할은 단순히 '영해'라는 인물의 죽음을 전달하는 역할로 끝나지 않는다. '권' 덕분에 '영해'의 사망 소식을 독자에게 제시함과 동시에 '영해'라는 인물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게 하고, '영해'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영해'에 대한 생각과 기억도 함께 제시하도록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권' 덕분에 소설이 현재 시점에서 흘러가도록 만드는 데 있다.  뒤의 절반을 살펴보면 우연히 만난 여인이 전반 '영해'의 이야기를 하며 왜 떠오르게 되었는지 드러난다. 이때도 분명 과거에 있었던 일인데도, 사건 위주로 서술 되어서 생생하게 진행된다. 또 앞서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에서 제시된 이야기들을 모두 회수하여 유기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독자를 끝까지 집중하여 여인과 영해, 주인공의 관계성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렇게 제시된 모든 것을 후반부에 정확히 작가가 책임지고 독자에게 연결성을 보여줌으로써 주제 의식이 극대화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 소설을 읽고 인생에 대해 생각하며 그 깊이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소재 측면에서도 주목하고 싶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호수로 가 잠든다는 속설을 사용한 점이다. '호수'로 영혼이 흘러 들어가 모인다는 이야기가, 죽은 친구와 죽은 친구가 주인공에게 전한 말과 함께 서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독자에게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킨다.  이 소설에서 같은 대사가 두 번 반복이 되는데, "이다음 내가 죽으면 내가 제일 아끼던 거 있으면 니 주고 갈게." 이 대사이다. '영해'는 타인이 볼 때 스스로 외로움을 자처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런 '영해'가 주인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대사의 반복만으로도 친구들이 왜 주인공에게 영해에 대해 물었는지와, '영해'라는 인물의 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대사의 사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소설이 존재하지만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울고 싶은 독자에게, 작가는 분명한 애도의 시간을 대리로 체험하도록 했다. 마치 실제 이야기 같은 이 소설은 결국 우리가 모두 호수로 가서 잠들 것이라는 위로를 전한다. 깊은 울림과 감동이 있었다. '영해'와 '여인'과 주인공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나온 에피소드를 통해, 결국 삶과 죽음이 어디서 부터 연결되어 있고, 우리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의 가능성과 깊이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억지 슬픔 하나 없이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표현한 작가의 역량에 감탄했다. 이 모든 것이 주제와 맞는 소재의 사용, 구성과 대화의 힘에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김유
판타지가 정통 소설 기법을 만나 명작이 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 판타지 소설이 판타지 소설이 아닌 듯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그래서 이 소설이 명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몇 가지 꼽아본다면, ​  ​1. 챗봇의 이야기를 뛰어넘는 스토리.대세가 된 챗봇, 챗봇을 이용해 소설을 써야 성과가 나는 현실, 하지만 챗봇을 거부하는 주인공.주인공이 만난 아이와, 할머니 그리고 호랑이, 한옥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챗봇이 만든 호랑이의 이야기까지,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 없는 신선한 내용이었다. 특히, 익히 알고 있는 전래동화 호랑이를 등장시켜 친숙함과 재미를 다 갖춘 뛰어난  스토리가 이 소설을 명작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다. 2. ​​판타지와 현실 세계의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구성.이 소설은 결말이 압권이다. 작가는 소설의 절정 단계에 펼쳐진 판타지를 결말 부분에 시청 구청을 등장시켜 완벽하게 마무리했다.결말 부분에 등장하는 시청 직원의 말 "호랑이 연구가의 집, 실제 소유주가 따로 있다는 말."에 독자는판타지가 아니라 실제 사건처럼 믿게 된 것이다.​ ​3. 생생한 묘사의 힘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며 기술되는 소설의 묘사가 눈에 그려지듯 생생하다. 예를 들면,"불쏘시개를 들고 양철통 안을 가끔 휘휘 저었다. 타닥타닥 불꽃 튀는 소리가 자작하게 나며 불씨가 되살아 났다." 이렇듯 생동감 있는 묘사가 독자로 하여금 읽는 재미를 한층 높여준다. 그 외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많지만, 챗봇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려는 작가의 고집스러움과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의 소설 원고를 열었다.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라고 마무리하는 작가의 능청스러움까지 다양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 아닐 수 없다. ​  오백
비로소 완성된 집  소설 전반에 깔린 빨간색의 강렬함이 모든 문장에 스며들어 하나씩 토해 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등장인물인 자매를 빨간 드레스와 무채색인 검은 구두로 표현해 대비되는 대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과거에서 겪어왔고, 앞으로도 마주칠 갈등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빛과 어둠을 텔레비전 빛, 암막 커튼으로 가린 어둠“일상의 장면을 간결하게 표현한 것에 감탄했다. 또한, 색 말고도 암막 커튼을 거두는 하영과 암막 커튼을 치는 반대되는 나의 행동을 통해 각 인물의 성격과 서로가 느끼는 감정을 문장에 그대로 녹여냈다. 그렇다 보니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상황과 느낌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애매한 우울함.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애매한 우울함이라 말하고 싶다. 드러내는 폭발적인 감정호소는 없지만 과거로부터 축적된 하영에게 느끼는 질투와 원망을 내비쳐 주인공이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음을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아늑하고 포근한 안정감을 주는 집의 존재도 갈망하지만 갈 수 없는 곳이고, 분노, 연민, 그리움과 같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들게 한다. 주인공이 느끼는 쓸쓸함과 아픔이 파리의 우중충한 날씨 그리고 암막 커튼으로 가려진 집이라는 공간에 묻어있다. “넌 빨강이 어울리지 않아.” 주인공이 가진 빨강에 대한 열등감과 열망이 하영의 빨간 드레스를 입으면서 사건이 고조된다. 여기서 두 사람의 감정은 폭발하고 핑퐁 경기처럼 날이 선 말이 오가며, 갈등이 절정에 다다른다. 집 안의 무음 텔레비전을 통해 집 바깥 파리의 기록적 폭우를 보여주어 집 안에서 현실적인 다툼과 밖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계속 노출해 지루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싸움에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엄습해 오는 두려움과 인물 내면의 불안감을 더했다. 더없이 의지해야 할 존재인 가족이 사실은 애증의 관계라는 점이 소설에서 잘 드러난다. 동생을 증오하고 배척하고 싶은 대상이지만, 언니의 소명인지 모를 강한 책임감 때문에 자매의 연을 끊어내 버릴 수 없는 상태를 지속된 비극적 관계의 역설이 잘 담겨있다.  갈등의 상황으로 가게 하는 상징적인 대상인 빨간 드레스를 소설 맨 앞에 배치해 독자에게 각인시켜 주고, 뒤로 가면서 소설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소설의 제목처럼 작가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색 그루밍으로 세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다 읽고 난 후,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빨간 드레스의 잔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소재로 소설을 마침표를 찍기까지 단숨에 읽게 만드는 문장력과 대비되는 일상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 대해 많이 배워 가는 소설이다. 뮤에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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