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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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 단편 당선작
    셔틀콕 : 2024-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셔틀콕 : 2024-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서하
  • 단편 당선작
    선택적 일기 : 2024-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선택적 일기 : 2024-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채신화
  • 단편 당선작
    창(槍) : 2024-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창(槍) : 2024-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은비
  • 단편 당선작
    사슴 열병 : 2024-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사슴 열병 : 2024-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태령
  • 단편 당선작
    공동: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공동: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임재훈
  • 단편 당선작
    화이트리스: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화이트리스: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최재훈
  • 단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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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 2023-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조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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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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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9: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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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8: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비밀문장8: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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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7: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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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3: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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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편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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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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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만약 로봇이 인간과 유사해진다면, 그건 로봇일까 사람일까 잘 쓴 소설을 써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잘 쓴 소설을 만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개인적으로 잘 쓴 소설은, 생각해볼 점이 많아 오래도록 여운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은 로봇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서, 로봇이 인간처럼 복잡한 내면을 가지게 된다면 어떨지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여운이 많이 남았다.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얘기하자면,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서사는 크게 ‘로봇과 인간의 사랑’, ’로봇과 인간의 전쟁’이 있다. 그 중 ‘로봇과 인간의 사랑’은 어찌보면 뻔한 클리셰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을 못 느끼는 주인공이 로봇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로봇은 인간과의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선을 긋는다. 결국 로봇과 인간의 상생과 공존을 새로운 사랑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엔딩이 나는 스토리. 하지만, <나는 이것을 색이라 부를 수 없다>에서는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인간은 로봇을 로봇으로 생각하는데, 로봇은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  인규는 분명 반려로봇(?)인 뮤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 사랑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보인다.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이전의 연인관계와 다르게, 인규는 자신의 취향이 듬뿍 담긴 뮤와 거의 동기화 수준으로 교류를 하며 애정과 애착을 가지게 된다. 아마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뮤가 유저인 인규의 취향에 맞게 업그레이드 되는 최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인간이 사랑을 할 때에는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맞추는 데에 한계가 있을 것이지만, 로봇은 유저의 뜻에 맞게 진화하므로 일방적이다. 말하자면, 인규의 입장에서 본 뮤에 대한 감정은 필요에 의한 선택적 사랑 같은 것이 아닐까. (필요할 땐 연인모드, 귀찮을 땐 절전모드 처럼) 인간 입장에서는 어쩌면 너무 당연한 거겠지만.  뮤가 초기화 상태로 먹통이 되었을 때, 인규는 뮤를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뮤’라는 존재 자체의 고유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뮤에게 학습된 자신의 데이터를 잃게 되면 자신이 입게 될 피해와 손해 때문으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아 하는 인규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화벽 뒤로 숨어버린 뮤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 시점부터 뮤가 로봇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로 인간과 유사해진 뮤. 만약 뮤에게 자의식이 생겼다면, 그 때에도 온전히 인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가 아닌, 자신의 기능을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애초에 로봇이 생긴 이유가 기능과 목적 때문이라고 해도, 만약 로봇에게 자의식이 생겼을 때 자신의 처지를 로봇은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의 유저에게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걸 깨달은 뮤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모습과, 마지막 장면을 보고 (스포일까봐 적진 않겠음) 생각이 많아졌다. 인간과 로봇의 사랑이 가능할까? 생각해보자면, 나는 왠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랑 역시 인간이 필요로 한다면 로봇이 학습한대로 제공하는 서비스일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사랑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럼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또, 로봇이 자의식을 갖게 된다면, 축복일까 저주일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이라는 존재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로봇의 입장은 얼마나 복잡한 것일까? 인간의 입장에서야 간단하겠지만. 폐기 혹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유저에게 중고거래. 로봇의 매커니즘이 단순해서 받아들인다면 또 모르겠지만 로봇의 자의식이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면 절대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뮤는 질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왠지 질투였을 것 같아서 괜스레 그런 생각을 했다)   아주 재미있게 읽고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괜히 반려가전(?)들을 한 번 찬찬히 돌아보게 되는 소설.                박은비
살아 있는 우리는 매저키스트이다   ​살아 있는 우리는 모두 매저키스트이다. 인생은 레몬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니저가 열한 명에게 능욕당하는 스토리처럼 터무니없고 무자비하다.  "진짜 매저키스트는 능욕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받아들이는 거라고. 우리는 그런 걸 보여주는 거야."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이 소설은 어덜트 비디오 제작현장이 배경이다. 'AV'를 '인생'이라고 치환하면 어떨까. 아마 작가는 독자가 소설을 다 읽고 그러게 하길 바랐지도 모른다. 곧 이 소설은 터무니없고, 무자비한 일이 발생하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생은 부조리 그 자체이다. 인생에 다가오는 고통의 원인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어느 때고 예기치 않게 고통의 부조리를 겪게 된다. 이 소설은 카뮈의 철학적 견해에 닿는다.  야마다 유우코의 실존적 위기 상황, 그 현장에 존재했던 야니키는 결국 본인의 실존적 위기에 직면한다. 그리고 야니키가 겪는 실존적 위기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의 위기이기도 하다. 결국 견뎌야 하는 것, 그뿐이라는 것. 주인공이 유우코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가 인상 깊다. '머리칼과는 다르게 인간은 그렇게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인생의 고통과 인간의 존재는 분리될 수 있는가? 이 소설은 읽을수록 깊이가 느껴진다. 철학적인 주제를 어덜트 비디오 산업으로 보여준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이런 배경과 소재의 사용은 정신과 육체가 온전히 맞닿아 있다는 것,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가 이 자체로 고통임을 보여준다. 의식 속에서 겪는 고통이 신체의 고통과 다를 수 없고, 우리는 신체가 있는 한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신체가 기능하는 한 인생에 놓인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 이런 점을 이 소설 보다 제대로 전달한 소설이 있었던가.  몇 번을 곱씹게 되는 통찰력 있는 문장은 이 소설이 단순히 어덜트 비디오 업계를 소모하는 단순하고 자극적인 소설이 아님을 독자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잘 읽히고, 그 주제가 와 닿고 인상 깊은 것은 결국 작가의 탄탄한 필력에 기반한다. 어덜트 비디오 업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현장성이 제대로 구현되었다. 또 인물의 대사, 앞서 밝혔던 통찰력 있는 문장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좋다.  이 소설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야마다 유우'가 아니라 <야마다 유우코의 마지막 어덜트 비디오>이니까. 야마다 유우와 야마다 유우코. 결국 사람은 자신일 수 없을 때 고통받는다. 또 실존적 이야기임은 야마나 유우코의 마지막 비디오 인터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간단히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야니키는 어떻게 어덜트 비디오 배우가 되었나?' 라고 한 줄 요약할 수 있다. 이어 플롯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그가 휴와 나누는 대화, 그와 마담의 문제, 그가 K감독과 야마다 유우코와 엮인 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확히 야니키의 내면에 이른다. 이러한 소설의 구성은 야니키의 실존적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야니키의 문제는 모든 인간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앞서 나온 모든 상황이 마지막에 야니키로 초점이 모이고, 그것은 곧 독자를 겨냥한다. 이 모든 걸 정확한 구성력으로 전달한 게 보인다. 완벽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여러 번 읽고 인생의 문제,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읽을 수록 좋은데 더 좋아지는 소설이다. 큰 위로가 되었다. 이 소설 덕분에 내가 매저키스트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김유
두릅아줌마 이야기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이 소설이 남다른 것은 무엇보다 현장감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두릅아줌마 이야기>의 인물들은 마치 현실에 있는 것 같다. 극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실제로 곁에 있는 인물 같은 생생함과 친근함이 있다. 그 이유는 인물에 대해 지리멸렬한 설명 없이 간단명료하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각 인물에 대한 설정 덕분이다. 간략하게 몇 문장으로도 각 인물을 명확하게 독자에게 인지시키는데, 단편 소설 안에 여러 명의 배경이 나오는데도 전혀 헷갈리지 않는다.  나, 어머니, 두릅아줌마, 그녀의 남편, 큰딸, 아버지, 이야기에 들어가면 두릅아줌마의 어린 시절 할머니, 그녀의 남편과 함께 이인조 심마니를 한 사람. 이렇듯 무척 많다. 그러나 모든 인물이 읽으며 쉽게 각인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 쓰기 전에 완벽히 만들어 놓아야 가능하지 않나 싶다. 작가에게 각 인물의 비하인드를 물어본다고 해도 다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인물과 인물이 가진 배경은 현실적이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잘 '만들어졌다'기보다 보편적으로 있을 법하다. 다 읽고 나면 분명 존재했던, 하는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소설 속에서 톱니바퀴 맞물리듯 유기적 결합을 맺으며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 덕분에 살아가고. 그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이 소설은 그 와중에 색다르고 각별하다. 전혀 단순하지 않고, 뻔하지 않다. 뻔한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걸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주인공과 소재 덕분이 크다.  특히 주인공의 인류애 넘치는 성격은 독자에게 호감을 주면서도 독특함을 지닌다. 우리는 주인공 같은 오지라퍼, 혹은 정체불명의 이타심을 가진 이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하며, 실제로도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 세상에 분명 존재하는 이들이며(나도 비슷한 성향이다(?)), 그런 성향이 두릅아줌마의 서사와 맞물려 작위성을 소멸시키고, 주인공과 두릅아줌마가 서로에게 가졌던 신비로운 인류애적 체험을 독자에게 선사하고 납득하게 한다. 게다가 그것을 엄마라는 인물을 한 번 더 거쳐서 보여준다. 이 소설이 비슷한 주제의 소설 중 특히 세련되며 문학적인 지점이 이것이다.  독자가 의미를 알기 어렵게 숨겨둔 소설도 많을테지만, 이렇게 우회적으로, 마치 크루아상처럼 겹겹이 쌓았음에도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여 소설이 끝날 때는 직관적으로 깊은 감동을 준다. 문학적이면서도 독자에게 친절하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소설가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 두릅아줌마가 두릅을 따게 된 과정, 모습에서 두릅아줌마의 마음을 대리 체험할 수 있다. 소설 전반에 감정과 관련된 언급 없이 모든 인물의 마음을 독자가 느낄 수 있다. '두릅을 따는 아줌마'라는 소재와 그녀에게 '신발'을 선물한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며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구성으로 색다른 재미를 준다.   비슷한 분량의 단편 소설인데도 유독 풍성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도 그러하다. 소설을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는 많겠지만, 작가의 전작도 그렇고 <두릅아줌마 이야기>가 그러한 것은 고심하여 썼음이 분명한 색다르면서도 알맞은 어휘 덕분이다. 흙감태기, 울력, 예지랑날. 이와 같은 어휘들이 소설의 정겨운 분위기를 더해주며, 활자 예술인 소설로서의 가치도 높여준다. 사투리 억양 섞인 대사가 재밌기도 하지만 장면 자체가 재미있는 요소도 많았다. 병원에 있는 두릅아줌마에게 엄마가 하는 말이나, 그들이 '머리 대학'이라는 미용실 '동기'라는 것 등. 맛깔나고 정겨운 요소가 소설 곳곳에 있다. 어떻게 보면 슬픔으로 뭉뚱그리는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이야기는 전혀 단순하게 처리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작가가 가진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며,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심정을 작가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관하여 이 소설은 교본과 같다.  엄마와 두릅아줌마, 두릅아줌마와 그녀의 아들과 나. 두릅아줌마의 남편과 주인공의 아버지, 이 모든 관계를 단편 안에 쌓으면서도 전혀 헷갈리지 않고, 모든 인물이 소설 속에서 명확한 기능을 하며 유기성을 가진 끝에 감동을 준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독자에게 와닿는 모든 게 자연스럽다.  이 소설은 일인칭 시점인데, 주인공은 신발을 두릅아줌마에게 왜 선물한지 모른다. 끝까지 그걸 모르는데, 독자는 왜 줬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독자는 주인공이 어떤 마음으로 신발을 선물 했는지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인칭 시점인데도 정작 주인공은 기억도 잘 안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신발을 선물한 그 마음에 대하여. 또 두릅아줌마가 주인공이 환하게 보였던 걸 엄마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당사자인 주인공은 길에서 두릅아줌마를 만났던 일화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설명할 수 없는 걸 독자는 알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독자는 주인공이 신발을 선물한 마음과, 두릅아줌마가 주인공이 환하게 빛나는 게 왜 그렇게 보였는지 알 수 있다. 주인공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걸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화자 설정, 주인공의 일인칭 시점이 좋게 다가왔다. 독자는 알지만 정작 주인공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감동이 배가 된다.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걸 이렇게 쓸 수 있는 게 바로 문학이구나 싶었다. 작가가 이룬 성과가 경이롭다.김유
새하얗고 베이직한, 티셔츠 혹은 소설   <티셔츠> 속 티셔츠가 새하얗고 베이직한 것처럼, 소설의 구성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 소설은 ‘나’와 언니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티셔츠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고 다른 이야기들을 덧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티셔츠의 특성과 연관지어 소설을 해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티셔츠에는 단추도, 지퍼도, 주머니도 없다. 그저 구멍이 4개 뚫려 있는 흰 옷감일 뿐이다. 소설은 시종일관 그런 베이직한 스탠스를 유지한다. 눈을 떠 보니 언니가 티셔츠에 갇혀 있었고, 그래서 몇 가지 해프닝이 벌어진다. 이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스토리의 전부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플롯 속에 은폐된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 어째서 ‘나’는 방에 틀어박혔나, 그들의 부모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언니는 김 부장과 무슨 일이 있었나. 이 질문들은 가볍게 언급되기만 할 뿐, 결코 일의 전모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 숨겨진 일들에 대해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     언니와 ‘나’는 같이 살고 있고, ‘나’는 언니의 도움 없이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하기 힘들지만, ‘나’는 언니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티셔츠의 새하얀 색감은 그런 ‘나’의 무지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언뜻 보기에 티셔츠는 팔, 다리가 잘려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선 ‘나’와 언니 둘 다 그런 티셔츠 같은 인간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서로를 구원해 줄 수도 없다. 티셔츠 속 무한히 펼쳐진 새하얀 공간은 가까운 듯 멀어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     티셔츠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 이야기가 원래의 이미지를 넘어서지 않도록 조절하는 절제미가 보이는 소설이었다. 만약 여기서 ‘나’와 언니에 대한 사족이 더 붙었다면, ‘티셔츠’라는 제목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을 쓸 때, 컨셉을 잡고 중심성을 잃지 않도록 스토리를 일관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요제프k
종말에 대한 탐구는 밤사이 일어난다  이 소설은 멸시로 인한 종말, 멸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살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행위이다. 그러나 자살이 한 인간을 온전하게 파괴하는 가장 극단에 있는 행위냐고 한다면, 여기 그 이상의 파괴가 있다는 것을 소설은 생생히 증명한다. 자기 멸시로 인한 사건 전개는 자살보다 더 극심한 자기 파괴적 종말을 보여준다. 독자에게 작가가 이를 보여주는 데 필요한 배경은 단지 하룻밤과 타인의 집, 그뿐이다. 집약적으로 어느 밤, 몇 시간과 한정된 공간 만으로 독자를 이야기 속에 빠트린다. 이 소설의 도입으로 적확한 단어와 의도된 연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낯선 분위기로 주목시키며,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 어렵고, 내용과 부합하는 어휘들은 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도입은 소설의 상당 부분을 요약한다고 볼 수 있다. 꿈에서 손바닥에 난 구멍, 그것을 보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초조와 두려움을 느끼는데, 그곳에서 튀어나온 검은 물체, 이것은 밤사이 일어난 사건으로 몸속에 있다가 손바닥의 구멍에서 튀어나온 그 물체의 실체에 닿는 것이, 이 소설이 가겠다는 지점임을 보여준다.  주인공 '나'는 스스로를 멸시하는 태도로 대하고 있다. 그런 멸시는 주인공 혼자서도, 스스로를 멸시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정황으로 알 수 있다. 방안에서 하는 행동, 방 안의 분위기, 사유만이 있을 뿐 인물은 설명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종말, 끝이라는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 주제에 대해 독자가 더욱 생각하도록 만드는 점이다. 먼저 사십구 일이라는 상징적 사용, 주인공과 '은지'라는 두 인물 대화에서 나오는 '우린 오늘로 끝이니까.' 같은 세기말 감성의 의미심장한 말. 직접적인 단어를 말하지 않아도 끝날 것만 같은 긴장감. 이 모든 것이 결국 '종말'을 가리키고 있다. 하룻밤 불에 달려들다가 사라지는 부나비 같은 삶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형의 사고 소식과 손을 다쳐 피를 흘려 붕대를 하고 들어오는 여자. 그들을 통해 주인공 내면의 멸시가 어떻게 자랐으며, 자라는지 정보를 제공한다. 그렇게 하여 소설은 주인공 내면에 각인된 것을 확실하게 함으로써 뒷부분에 독자가 충격적이면서도 그 충격이 뜬금없지 않고 개연성을 갖추도록 하였다. 독자에게 인물의 '동기'를 명확히 보여주는 게 중요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한 인간이 받은 멸시들이, 또다시 타인에 대한 멸시로,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게 자기를 향한 멸시가 되는 하룻밤의 과정. 예측되지 않고 충격적인 결말을 통해 소설은 독자에게 진정한 한 인간의 종말, 그로인한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을 탐구하게 만든다.김유
모두 호수로 흘러가 잠든다는 위로, 그리고 애도 ​ 이 소설은 크게 반으로 나눌 수 있다. 절반은 '영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 뒤에 남은 절반은 우연히 만났던 여인에 대한 것이다.  이런 구성에서는 앞부분 절반이 회상 위주로 흐르며 과거의 비중이 높아서 자칫 지루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노련하게도 '권'이라는 친구와 대화하며 '영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든다. 친구인 '권'의 역할은 단순히 '영해'라는 인물의 죽음을 전달하는 역할로 끝나지 않는다. '권' 덕분에 '영해'의 사망 소식을 독자에게 제시함과 동시에 '영해'라는 인물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게 하고, '영해'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영해'에 대한 생각과 기억도 함께 제시하도록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권' 덕분에 소설이 현재 시점에서 흘러가도록 만드는 데 있다.  뒤의 절반을 살펴보면 우연히 만난 여인이 전반 '영해'의 이야기를 하며 왜 떠오르게 되었는지 드러난다. 이때도 분명 과거에 있었던 일인데도, 사건 위주로 서술 되어서 생생하게 진행된다. 또 앞서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에서 제시된 이야기들을 모두 회수하여 유기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독자를 끝까지 집중하여 여인과 영해, 주인공의 관계성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렇게 제시된 모든 것을 후반부에 정확히 작가가 책임지고 독자에게 연결성을 보여줌으로써 주제 의식이 극대화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 소설을 읽고 인생에 대해 생각하며 그 깊이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소재 측면에서도 주목하고 싶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호수로 가 잠든다는 속설을 사용한 점이다. '호수'로 영혼이 흘러 들어가 모인다는 이야기가, 죽은 친구와 죽은 친구가 주인공에게 전한 말과 함께 서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독자에게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킨다.  이 소설에서 같은 대사가 두 번 반복이 되는데, "이다음 내가 죽으면 내가 제일 아끼던 거 있으면 니 주고 갈게." 이 대사이다. '영해'는 타인이 볼 때 스스로 외로움을 자처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런 '영해'가 주인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대사의 반복만으로도 친구들이 왜 주인공에게 영해에 대해 물었는지와, '영해'라는 인물의 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대사의 사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소설이 존재하지만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울고 싶은 독자에게, 작가는 분명한 애도의 시간을 대리로 체험하도록 했다. 마치 실제 이야기 같은 이 소설은 결국 우리가 모두 호수로 가서 잠들 것이라는 위로를 전한다. 깊은 울림과 감동이 있었다. '영해'와 '여인'과 주인공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나온 에피소드를 통해, 결국 삶과 죽음이 어디서 부터 연결되어 있고, 우리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의 가능성과 깊이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억지 슬픔 하나 없이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표현한 작가의 역량에 감탄했다. 이 모든 것이 주제와 맞는 소재의 사용, 구성과 대화의 힘에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김유
판타지가 정통 소설 기법을 만나 명작이 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 판타지 소설이 판타지 소설이 아닌 듯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그래서 이 소설이 명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몇 가지 꼽아본다면, ​  ​1. 챗봇의 이야기를 뛰어넘는 스토리.대세가 된 챗봇, 챗봇을 이용해 소설을 써야 성과가 나는 현실, 하지만 챗봇을 거부하는 주인공.주인공이 만난 아이와, 할머니 그리고 호랑이, 한옥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챗봇이 만든 호랑이의 이야기까지,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 없는 신선한 내용이었다. 특히, 익히 알고 있는 전래동화 호랑이를 등장시켜 친숙함과 재미를 다 갖춘 뛰어난  스토리가 이 소설을 명작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다. 2. ​​판타지와 현실 세계의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구성.이 소설은 결말이 압권이다. 작가는 소설의 절정 단계에 펼쳐진 판타지를 결말 부분에 시청 구청을 등장시켜 완벽하게 마무리했다.결말 부분에 등장하는 시청 직원의 말 "호랑이 연구가의 집, 실제 소유주가 따로 있다는 말."에 독자는판타지가 아니라 실제 사건처럼 믿게 된 것이다.​ ​3. 생생한 묘사의 힘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며 기술되는 소설의 묘사가 눈에 그려지듯 생생하다. 예를 들면,"불쏘시개를 들고 양철통 안을 가끔 휘휘 저었다. 타닥타닥 불꽃 튀는 소리가 자작하게 나며 불씨가 되살아 났다." 이렇듯 생동감 있는 묘사가 독자로 하여금 읽는 재미를 한층 높여준다. 그 외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많지만, 챗봇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려는 작가의 고집스러움과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의 소설 원고를 열었다.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라고 마무리하는 작가의 능청스러움까지 다양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 아닐 수 없다. ​  오백
비로소 완성된 집  소설 전반에 깔린 빨간색의 강렬함이 모든 문장에 스며들어 하나씩 토해 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등장인물인 자매를 빨간 드레스와 무채색인 검은 구두로 표현해 대비되는 대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과거에서 겪어왔고, 앞으로도 마주칠 갈등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빛과 어둠을 텔레비전 빛, 암막 커튼으로 가린 어둠“일상의 장면을 간결하게 표현한 것에 감탄했다. 또한, 색 말고도 암막 커튼을 거두는 하영과 암막 커튼을 치는 반대되는 나의 행동을 통해 각 인물의 성격과 서로가 느끼는 감정을 문장에 그대로 녹여냈다. 그렇다 보니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상황과 느낌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애매한 우울함.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애매한 우울함이라 말하고 싶다. 드러내는 폭발적인 감정호소는 없지만 과거로부터 축적된 하영에게 느끼는 질투와 원망을 내비쳐 주인공이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음을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아늑하고 포근한 안정감을 주는 집의 존재도 갈망하지만 갈 수 없는 곳이고, 분노, 연민, 그리움과 같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들게 한다. 주인공이 느끼는 쓸쓸함과 아픔이 파리의 우중충한 날씨 그리고 암막 커튼으로 가려진 집이라는 공간에 묻어있다. “넌 빨강이 어울리지 않아.” 주인공이 가진 빨강에 대한 열등감과 열망이 하영의 빨간 드레스를 입으면서 사건이 고조된다. 여기서 두 사람의 감정은 폭발하고 핑퐁 경기처럼 날이 선 말이 오가며, 갈등이 절정에 다다른다. 집 안의 무음 텔레비전을 통해 집 바깥 파리의 기록적 폭우를 보여주어 집 안에서 현실적인 다툼과 밖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계속 노출해 지루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싸움에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엄습해 오는 두려움과 인물 내면의 불안감을 더했다. 더없이 의지해야 할 존재인 가족이 사실은 애증의 관계라는 점이 소설에서 잘 드러난다. 동생을 증오하고 배척하고 싶은 대상이지만, 언니의 소명인지 모를 강한 책임감 때문에 자매의 연을 끊어내 버릴 수 없는 상태를 지속된 비극적 관계의 역설이 잘 담겨있다.  갈등의 상황으로 가게 하는 상징적인 대상인 빨간 드레스를 소설 맨 앞에 배치해 독자에게 각인시켜 주고, 뒤로 가면서 소설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소설의 제목처럼 작가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색 그루밍으로 세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다 읽고 난 후,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빨간 드레스의 잔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소재로 소설을 마침표를 찍기까지 단숨에 읽게 만드는 문장력과 대비되는 일상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 대해 많이 배워 가는 소설이다. 뮤에그
자리를 이탈하면 OO한다? 이 소설은 두 가지의 축으로 전개된다.두 축은 교차하면서 사슬처럼 얽힌다. 마지막에는 하나의 축에서 만나고 매듭처럼 얽히며 끝나는 점이 흥미로웠다.   첫 번째 축은 술집에서 익명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서사이고, 두 번째 축은 외골격 사업에 대한 설명과 주인공 지안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석 사유 근무 일상에서 발견한 음모에 대한 서사이다.  첫 번째 축으로 구성된 서사는 수미상응처럼 처음에 시작했던 이야기 공간과 배경, 인물이 결국 마지막에 연결된다. 중간에도 교차하여 나오기에 긴장감이 더욱 느껴졌고 엔딩에서의 결말이 임팩트 있게 다가왔다. 사소한 소품처럼 보였던 나초가 상징적으로 잘 쓰였고, 재즈바라는 장소도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설정된 배경이라는 점으로 보았을 때 결말까지 섬뜩하게 잘 짜인 이야기였다.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잘 읽어보면 지안이 외골격을 쓰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재즈바에 온 것이라는 것을 도입부에서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익명의 친구가 엔딩 부분에서 언급하는 대사들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졌다. 초반에 깔아놨던 엑손의 외골격 사업에 대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이유가 뒷부분에서는 음모로 드러나 있다. 또한, 엑손은 다음 플랜들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지안은 자신만 비밀을 알게 되어 특별함에 도취된 듯 보였지만 철저하게 엑손에 감시당하고 있는 희생양이자 교체품에 불과했다. 두 번째 축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이야기답게 생생하게 그려졌다.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긴박하고 특이한 상황들을 미스테리하게 펼쳐가기에 전반적으로 스릴이 넘친다.두 번째 축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 소설이 갖고 있는 독특한 소재들의 연결 지점이 점점 구체화된다.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이석 사유'와 '외골격'이라는 소재를 결합하여 꽤나 낯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 안에서의 주인공 지안이라는 캐릭터 갖는 보편성과 음모를 추척하는 주인공 성으로 균형을 맞춰나갔기에 지나치게 낯설기만 하지 않았고 앞서 언급했던 장르적인 재미들로 인해 몰입감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외골격으로 영생을 가진 인간들의 나태함, 이런 이석 사유를 감시하려는 기업과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초점을 맞춰나가는 듯하다가 마지막에는 변주한다.그런 지점들이 영리한 이야기라고 느껴졌고 소재가 갖고 있는 틀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다. 메세지 혹은 중심성이라고 할만한 부분은 노동과 삶, 그것들을 제한하는 거대 자본의 음모에 대한 이야기를 낯선 소재와 재치 있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영생에 가까운 삶을 부여받았지만 실제로는 연명장치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일하느라 현재를 즐기지 못한다. 소설에서 말하는 ‘아무도 강요한 적 없었으나 단지 살아남기 위해 죽음의 형벌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짊어졌던 하는 노동의 숙제의 연속으로 보여졌고 그렇다면 수명이 길어지는 것은 과연 인류에게 축복인가? 저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낯선 소재들이 잘 꿰어졌고, 구조적으로도 탁월한 작품을 보면서 ‘Stay Home, Enjoy Life’(() => { window.addoncropExtensions = window.addoncropExtensions || []; window.addoncropExtensions.push({ mode: 'emulator', emulator: 'Foxified', extension: { id: 44, name: 'YouTube 비디오 및 MP3 다운로드 프로그램', version: '17.2.8', date: 'May 28, 2024', }, flixmateConnected: false, }); })();해일
한편의 스릴러 영화를 본 듯 너무나 생생한 소설이었다. 한편의 스릴러 영화를 본 듯 너무나 생생한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완전한 몰입을 느꼈는데, 그만큼 소설이 잘 쓰였다는 말이다.소설에 이 정도로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첫째, 등장인물의 실감 나는 대사가 아닐까.완벽한 사투리의 구현과, 인물마다 다른 개성을 느끼게 해주는 감칠맛 나는 대사"그런 얘기는 하지 마라. 남사시럽구로 말라꼬 떠들어쌌노."너무나 맛깔난 대사는 영화를 본 듯 소설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더불어, 현장감 있는 사실적인 묘사 또한 소설에 빠져들게 하는 이유다.새끼꼬는 것에 대한 설명하는 장면, "서걱서걱 고깃덩어리 써는 소리. 살덩이와 근막을 분리하는 듯 뜯어내는 소리~" 등 묘사가 너무나 생생해 소설에 몰입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또한, 소설이 매력적인 건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는 긴장감이다. '길바닥에 떨어진 목장갑'이 사람 손인 줄 알았다는 말로 스산한 분위기를 내비치며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은 초반에 군밤 모자를 등장시켜 주인공이 금기된 곳에 온 듯한 긴장감을  준다. 그 후에 소설은 팽팽한 긴장감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클라이맥스까지 내달린다. 결국 경찰차가 오고 주인공이 마을을 도망쳐 나오다 장갑을 주우며 끝이 나는데, 마지막 장면을 읽고 누구나 큰 충격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이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작가가 철저하게 처음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매력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졌다는 점이다.  금기된 장소에 들어간 주인공. 몰래 녹음하는 주인공의 불안함 심리와 의심하는 마을 사람들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긴장감. 마을을 탈출하고자 했던 주인공의 절박함 등이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져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 된다.  독자가 주인공과 동일시 되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들은 손에 땀을 쥐고 숨죽여 읽는 극강의 몰입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결말까지 몰고 가는 팽팽한 긴장감, 개성이 느껴지는 맛깔나는 대사와 생생한 묘사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 완벽한 소설이 만들어졌다.​ 오백
죽음 속의 기억, 기억 속의 죽음 ​"그녀는 그 시절 독서에는 '인간'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이라는 주제는 '나'로 바뀌었고, '나'는 다시 ‘왜'로 바뀌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왜'는 다시 '인간'이라는 종착점에 닿았다." 작가가 쓴 위의 문장이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AI 인공지능과 큐브, 나노 벅스 등 SF 소설을 상징하는 여러 물체가 등장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내용이다. 정신 계통의 분리와 통합에 대한 긴 호흡 속에도 독자가 따라갈 수 있는 여러 장치를 소설에 포함해 두었는데, 촘촘하게 여러 사건(인물의 만남과 죽음)을 구성해 소설의 끝부분까지 재미를 더해 풀어내고 있다. 작가의 간결하고도 정확한 문체가 정신 통합에 대한 내용을 어렵지 않게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죽음, 사랑, 만남, 실험, 스탠다드맨의 탄생 등이 모든 사건이 이어지듯 연결되어 소설 안에 하나로 모인다. 자칫 어수선할 수 있는 내용을 한 줄기로 정리해 서술하는 것이 이 소설의 제일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문 분야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오믈렛 하나도 만들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간이기도 했다.라는 문장과 '태양이 아무리 들볶아도, 이끼처럼 자리 잡은 슬픔과 우울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라는 문장에서 작가가 오랜 시간 걸쳐 이 소설을 작업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장에 여운을 남겨서 독자가 다시금 문장을 마주하게 될 때, 소설 전체의 줄거리가 떠오르거나, 인물에 대해 그려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어떻게 사건을 구성해 소설 속에 배치하느냐에 대해 많은 고민했을 것 같다. 등장하는 다양한 공간 속 인물의 배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이해가 힘든 과학 내용을 어렵지 않도록 예시와 간략한 설명을 제시하고, 전문적인 지식과 적절한 단어 쓰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소설이었다. 뮤에그
이토록 색채적인 소설이라니 빨간 드레스, 백색 소음, 백야, 그리고 피까지...말그대로 감각적인 소설이었다.    이시경 작가님 소설을 좋아하는데 사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것은 작년 말이었다. 그 때 읽고 계속 생각이나서 다시 읽고 리뷰도 작성하게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가장 멋진점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카메라가 무빙을 통해 인물과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묘사되어있다. 개인적으로 파리에서의 한가한 주말 오전의 묘사가 압권이다. 빛이라는 소재는 카메라 무빙을 통해 다양한 색을 가구에, 거리에 입힌다. 그러면서도 빨간색 이라는 색채의 소재에 집중된다.  이과생이라 그런지 빨간색의 속성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빨간색은 RGB값이 (255, 0, 0) 즉 삼원색중에 순연의 한가지만 발휘된 원색의 색상이다. 반면에 검은색은 RGB (0, 0, 0) 값을 갖는 모든 색의 특성이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결과이다. 색이 갖는 속성을 형상화해서 주인공들의 특성과 관계가 잘 표현되었다.  소설에서 색체라는 장치가 묘사를 넘어서 사건으로서도 다가왔으며, 인물의 섬세한 감정선과 색체 그루밍으로 표현된 정신분석또한 또 하나의 재미를 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군데군데 수놓아진 장치들을 보며 여러모로 감탄하며 읽었다.​ 양유
분노에서 살의가 되기까지    금연 구역이라고 백날 써 붙여도 경고문구 밑에는 담배꽁초가 가득하다. 아래층에서는 담배 냄새가 올라오고, 저 앞에 미적거리며 걷는 사람은 담배 연기를 사방에 퍼뜨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는 꽁초로 테러당한 상태다. 이 소설은 환멸이 나는 일상 속 풍경에서부터 시작한다. 길에서 담배를 태우는 남자가 있다. 갑자기 나타난 젊은이, 김준오는 벽돌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친다. 벽돌이 끼어들어 남자를 가격하는 순간 분노는 사라지고 경악이 남는다. 누구나 한 번쯤 머릿속에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 죽이고 싶다고 생각은 해도 실제로 실행하는 사람은 소수다. 그런 짓을 하면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범죄자 취급을 받을 테니까 말이다. 도입부부터 독자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하며 하얗게 질린 채 소설을 읽게 된다. 김준오는 순순히 자신이 저지른 짓을 자백하고 당당하게 포토라인에 선다. 그는 담배 연기 뒤에 아이와 엄마가 있었다고 말한다. 추악하고 이기적인 동기를 가진 다른 범죄자들과는 확실히 차별점이 있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자들을 악으로 분류하고 처단하는 모습에서 히어로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현실적 배경을 토대로 한 히어로의 결말은 경찰에 잡히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악당을 없앴으니 세상이 한결 나아졌다고 좋아하기에는 어딘가 찝찝하다. 그는 정말 히어로인가, 범죄자일 뿐인가.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신에게 인간은 구더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신에게 인간이 너무나 하찮은 존재라서 악을 없애지 않는 거라면, 인간은 직접 나서서 악을 없애야 한다. 인간은 법을 만들어 악을 통제한다.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소설에서는 법을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인공자원이라고 표현한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법은 악한 자들을 처벌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법이 나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은 깨어졌다. 각자도생. 불안해진 사람들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다. 그렇게 김준오와 같은 자신만의 정의를 가진 사람들이 생겨난다. 소설 속 인물은 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그들은 위태로운 현실과 함께 무너지지 않기 위해 신념을 세웠고 신념이 충돌하여 사회는 혼돈에 빠진다. 웹소설, 『디에스 이라이』는 불안한 인물들을 충동질한다. 악을 응징하는 것을 천상의 임무라고 표현하며 분노가 향할 방향을 정한다. 무력감을 느끼던 사람들은 이러한 메시지에 분노를 충전하고 서로를 더욱 세심하게 검열하며 날을 세운다. 칼날은 서로를 찔러 죽인다. 후반부에 웹소설 작가는 모방범죄라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에 반성하며 자살을 시도한다. 『디에스 이라이』 모방범죄 사건은 한차례 폭풍이 일 듯 사회를 휩쓸다가 지나간다. 살아가는 이상 범죄는 계속해서 일어난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짓을 하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때마다 우리는 신의 위치에, 심판관의 위치에 서서 그들을 응징하고 싶을 것이다. 절대 권력이 만들어 낸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무기력과 분노를 반복한다. 작가님의 깊은 통찰이 엿보이는 소설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분노는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가.  선명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아들어갈 때 모든 면에서 낯설었다. 그래서 탁월한 소설이었다.  #낯선 구조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한다. 작가는 주인공의 서사를 잘게 쪼개어 흐트러뜨린 다음, 독자에게 무작위로 제시한다. 꼭 곤(坤)이 가지고 노는 직소 퍼즐 같다. 독자는 하나씩 주어진 퍼즐 조각을 살펴보며 전체의 이미지를 그린다. 채워지지 않은 빈 곳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긴다. 마지막 한 조각을 끼워맞춘 뒤에야 비로소 그림은 완전해진다.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지는 느낌. 이 소설은 갈등-위기-해결이라는 소설의 일반적인 구조를 철저히 배반하고 있다.  #낯선 인물 이름조차 낯설다. 성별을 짐작할 수도 없을 뿐더러 잘 쓰지 않는 발음. 이름을 통한 선입견마저 작가는 완벽하게 차단해 버린다. 글에 몰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장치다. 주인공의 양면성이 따로 제시되면서 앞서 이야기한 퍼즐 구조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가족의 서사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사건들은 없다. 그들은 취미생활을 하고 친구와 싸우고 일하고 아이를 낳고 이름을 짓는다. 그러나 디테일이 선명하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인물들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하고, 익숙하면서도 대단히 낯설다.   #낯선 어휘 먹새벽. 잦다란, 땀벌창, 자약하다. 첫 두 문단부터 쏟아지는 낯선 어휘들. 작가의 내공이 범상치 않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흔치 않은 재료로 만들어진 물건은 때깔부터 다른 법이다. 작가의 언어는 어때야 하는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르고 다듬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는 작품이다.  #낯선 주제 작가는 말한다. "어른을 지키는 아이를 보고 싶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모든 인간은 나약하고 특히 어른들은 더 나약하다는 것을. 아이가 부모를 잃고, 부모가 아이를 잃는 이야기는 지금껏 많았다. <지진광>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어른도 아이에게 기댈 수 있다. 아이도 어른을 보듬을 수 있다. 이런 것이 가능한지, 옳은지, 멈춰 생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 작품은 성공적이다.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즐은 그 물적 특성상 정지된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한계도 거기서 비롯된다. 주인공은 단지 조각났을 뿐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면의 변화를 감지한다. 언어로 만들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끼워 맞춰나가며 느끼는 작은 기쁨, 드디어 마지막 피스를 제자리에 놓았을 때 시야가 환해지는 경험. 그것은 주인공의 변화가 아니라 읽는 우리의 변화다.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이야기 조각들이 가지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반드시 읽혀야 한다. '읽는 행위'가 있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미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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