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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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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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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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금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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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위상: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달의 위상: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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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저리들의 긴 겨울: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머저리들의 긴 겨울: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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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스윙바이: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마지막 스윙바이: 2024-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국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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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셔틀콕 : 2024-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셔틀콕 : 2024-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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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적 일기 : 2024-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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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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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13: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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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문장12: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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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편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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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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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한 편의 영화로 읽는 팔월극장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솔직히 첫 문장부터 좀 막히는 지점이 있었다. 몰입이 안 된다라기 보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소 소설에 진입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의문점을 갖고 소설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부족하나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시점의 문제와 연결되어 보인다.  팔월 극장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흔히 접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과는 사뭇 결이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일인칭 주인공으로서 기능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 밖에서 비춰지는 카메라 감독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첫 문장에 진입할 때 가져야 할 시선은, 흔한 일인칭 시점보다 한참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게 맞을 듯싶다. 읽는 독자가 시선을 주인공에 맞추기보다, 한발 물러나 소설 밖에서 소설을 비추는 (보이지 않는)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는 효과는, 철저한 객관성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토록 철저하게 객관성을 계산하고 유지하려 했을까? 부족하나마, 나름 짐작해 보기로는 아마도 그것이 주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사실, 자살이라는 소재는 다소 무겁고 어두운 주제이다. 자칫 거리두기가 실패할 경우, 대책 없는 감상에 빠지거나, 밑도 끝도 없이 독자를 끌어내릴지 모른다.  그런데 팔월극장에서는 그런 면에서, 시점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관성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중이다.  그렇게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소설이 비추는 장면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작동되기 시작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의 시놉시스와도 같다. 마치 영화를 보듯 각 장면을 따라가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샐러리맨 장면이 가장 좋았다.  샐러리맨 장면은 마치, 사형수가 집행 직전에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어진 유예의 시간, 주인공은 샐러리맨 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가방에 든 수면제와 내면에 계획된 자살이 그 순간만큼은 사라지고 없다. 주인공은 찰나의 희망을 누린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는 윤희를 만나기 직전에 안경 렌즈를 교체하는데, 그것은 삶에 대한 시선이 본격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처럼 작가가 군데군데 심어놓은 떡밥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적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팔월 극장이라는 메타포도 좋았다. 이것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확장되어 보편성을 갖는다. 이처럼 아픈 시대적 상황을 담아내면서도 치우침이 없다. 시점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주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또한 주제를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 단편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좋은 작품이었다.  부족하지만, 리뷰를 적어본다. 좋은 작품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솔트
새빨간 푸에고 로사만의 한 걸음 푸에고 로사라는 화려한 제목은, 표지의 색감은, 섬세하게 묘사되는 푸에고 꽃집의 정경은, 전부 이 소설의 낯선 아우라에 기여한다.   인간은 누군가에 기대어 세상에 나오지만, 성장을 위해 직접 어딘가 다른 곳에 뿌리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꿈과 젊음, 좋아하는 마음 정도로는 부족한 세상이다. ‘자유롭다’는 개념만으로는 개성이 될 수 없고, 자기 꿈만 쫓겠다는 주인공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주지 못한다.   푸에고 로사도 성장소설이다. 허나 여타 성장소설과는 다르다, 주인공의 성장은 플로랄 폼, 플로리스트의 손과 발의 의지, 주변의 도움 정도로 처리되지 않는다. 작가는 한 단계 이상의 성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모두가 가진 유일무이한 토양, 바로 ‘이름’을 통해서이다. 이 소설의 가치는 ‘푸에고 로사’라는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에서 나온다.   작가는 주인공을 성장시키지 않았다. 승화시켰다. 모두가 가진 이름, 하나뿐인 이름, 내게만 주어진 이름을 통하여.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나아가는 주인공의 첫 발걸음은, 그저 무모한, 짧은 울림에 의한 성장이 아니다. 푸에고 로사로서의, 주인공‘만’의 한 걸음이다.   커다란 울림으로 끝나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로서 나만의 한 걸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구름
삶에서 예술은 왜 필요할까 이 소설에는 소설을 창작하고 가르치는 AI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의 배경인 미래, AI가 예술 창작의 온전한 주체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본다. 예측컨대, AI와 인간의 예술은 별도의 장르로 구분될 것이다. 작가는 인간이 쓰는 소설을 휴먼 장르라 상정했다.  주인공 AI는 인간을 대상으로 소설을 가르친다. 인간이 창작한 소설은 소위 휴먼 장르에 속한다. 주인공 관점에서 인간의 소설은 AI의 창작 알고리즘 내에서 모두 예측이 가능한 설정과 주제일 뿐이다. 더 이상의 낯섦과 새로움이란 없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철저한 거리 두기를 통해, 주인공인 AI의 입장에서 소설(예술)을 향한 인간의 처절한 고뇌를 마주할 수 있었다.  휴먼 장르에 목을 매는 인간들은 말 그대로 후지다. 인간이 창작한 소설은 전혀 낯설지 않다. 자신들의 감성에서 추출했다고 하지만. 너무 유치하고, 너무 지루하고, 너무 징징거린다. 작가든, 독자든, 습작생이든 마찬가지다. 오롯이 인간의,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쓰인, 휴먼 장르라는 소설 또한 후지다. 인간들은 감성 운운하며 종이책을 고수한다. 정말 골동품 같은 존재들이다.  대충 이러하다. 웃프지만 조목조목 반박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인간 본연의 ‘후짐’이 반전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아마, 소설을 창작하는 ‘주체’에 대한 역발상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체의 비틀림은, 주체가 소유한 언어에 대한 비틀림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언어는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예술은 무엇인가? 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예술을 하던 AI가 요리하는 AI로 기능을 달리하는 부분이었다. 이 지점은 마치 환생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한 절묘한 지점을 잘 묘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설정으로부터 어떤 경로를 거쳐 심도 있는 주제로 나아가는지. 한편 독자에게 재미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고심했는지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언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창작자로서 언어를 생산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많은 공감이 갔다.  삶에서 예술은 왜 필요할까?  이러한 화두는 결말에 이르러 무한 확장되기에 이른다. 개인적으로는, 글 전반에 던져진 화두가 결말 부분에서 좀 더 수렴되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AI라기보다 한 개체에 가까운 존재의 예술적 세계관을 엿보게 되었으니, 그것이 그러한 한 존재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필연적 요소를 갖는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좋은 소설이었다.  솔트
올 것은 오겠지만, 제목부터 강렬하다. 주인공의 직업은 낯설다. 배경은 이국의 세상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실존적 문제를 담고 있다. 아니키도, 선생도, 아닌 ‘우에다’이고 싶었던 주인공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자기 실존을 지키려는 노력, 긍지를 놓지 않겠다는 열정은, 어쩌면 처음부터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터무니없고, 무자비하다. 끔찍한 정황은 결과에 불과할 수도, 썩 괜찮아 보이는 결과는 한낱 정황에 불과할 수도 있다. 깨끗한 물도 전부 불순물이 섞였고, 완전한 것은 없다. 이런 불합리하고도 불안정한 세상 속, 끝나는 것은 애석하게도 인간뿐이다.   그럼에도 주인공 우에다가 자포자기한, 모든 게 끝난 인간처럼 보이는가 묻는다면,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주제는 현실적이고, 파멸적이되, 작가의 의식만은, 가녀린 희망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에다는 자기 수요를 받아들인, 존재가 거세된 인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휴에게 전하는 조언,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노력, 여전히 ‘변덕’을 고수함으로 벌어진 아내와의 이혼 등은 ‘올 것이 와버린’ 우에다가 여전히 섭리에 반하는 변덕을 부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재는 없는지도 모른다. 작품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는 우에다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필히 모두에게 올 것은 올 터이다. 즐기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버릴 터이다. 그럼에도 놓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마지막 비디오에 본명을 넣은 야마다 유우코처럼. 뭐든 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에다가 여전히 마담의 스낵바에 가듯이. minimum
씁쓸한 어른의 삶의 단단한 공분모 작가는 어른을 보호하는 아이를 그려 보고 싶다고 말한다. 발상부터 무척이나 낯설다. 그런 낯설고도 강인한 이미지를 위해 대단한 인물이 탄생했다. 지진광이 일어났을 때 태어난 아이, 퍼즐처럼 붕괴와 재구축 개념이 공존하는 아이, 머무르는, 좌절한 어른과 다르게 미래를 꿈꾸는, 어른을 안아줄 수 있는 아이. 소설의 주인공 왕곤이다.   남녀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피해자 모임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런 ‘붕괴’의 현장에서도 재구축은 이루어졌다. 사랑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주인공 왕곤은, 신파적인 캐릭터-즉 비운의 부모를 더욱 파괴시키는 상투적인 딸-가 아닌, 시차가 바뀌었어도 부부의 공분모로 존재하는,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성장한다. 곤은 힘든 일이 있어도 퍼즐을 맞추고 평정을 유지하며, 벌하더라도 보상하는 아이이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으로 곤이라는 인물이 완성된다. 그곳에서 독자로서 목도할 수 있던 것은 낯선 보살핌과 잔잔한 위로였다. 붕괴와 재구축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주제의식, 지진처럼 커다란 재앙이 닥쳐도 빛은 존재한다는, 또 앞으로도 하리라는 위로가 지진광처럼 오묘하게 발광한다.   아이를 재앙처럼 여기는 요즘, 꼭 필요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여러 의미로 어른을 보호할 것이다. 어쩌면 언제나 그랬다. 구름
흑인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   김솔 작가가 쓰는 소설은 그냥 소설이 아니다. 독자와 단순하게 소통하는 보통의 소설이라고 하기에 그의 소설은 너무 독자적이고 독창적이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김솔은 태어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쓴다”고 했다. 태어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쓴 소설이니 당대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말은 하나 마나 한 것이 된다. 요컨대 쉽게 잘 읽히는 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들은 김솔 작가의 소설에서 까나리액젓 맛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김솔 표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이 세상 어떤 소설 맛과도 비견할 수 없는 독창적인 맛을 느낄 것이다.   「고독한 순환을 즐기는 검은 유체」는 17살에 갑자기 흑인이 된 H의 이야기이다. H는 의사에게 유전자를 바꿀 수 없느냐고 묻지만 의사는 집에 가서 샤워하고 자라고 응대한다. 결국 17살에 흑인이 된 이 소년은 진정한 흑인으로 존중받기 위한 10가지 조건을 인지하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흑인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인식을 극복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가 흑인인가.    이 소설은 단지 피부가 까만 흑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완전하게 뒤덮고 있는 억압과 부조리, 지배와 피지배의 불가항력적 구조에서 탄생하는 흑인들에 관한 처참하고 섬뜩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흑인 H가 단지 H에서 멈추지 않는 이야기,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당신과 내가 사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당신과 나의 이야기이다.   얼그레이
빨리,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작가는 제목부터 이 소설이 어려운 무언가에 대한 시도라는 것을 전한다. 그 시도란 표면적으로 보이는 두 주인공의 사랑만은 아니다. 소설의 사랑은 훨씬 큰 것을 담고 있다. 아픈 자연, 뜨거워지는 지구, 차가워지는 사람들, 이 모든 소멸 직전의 간당간당한 것들을 부여잡으려는 시도. <더 늦기 전에>는 그 시도의 온기를 전하는 소설이다.  미지의 세계는 희망과도 같다. 어디론가 나아갈 곳이 남았다는 희망. 허나 21세기 세상에, 더는 미지마저 흔하지 못하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껴맞춘 인간의 길은 '유리 궁' 같은 강력한 이름으로 정해져 있고, 자연은 석학들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절망적으로 망해 가고 있다.  이 글은 소멸되는 공소리 마을이라는 배경을 통해, 너무도 현실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더는 얼지 않는 저수지, 이재민처럼 남은 공소리 사람들, 재해로 부모님을 잃은 송미, 도시로 나간 동두. 현실에 닿은 절망적인 배경에, 독자는 속절없이 아픔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빛난다. 너무나 현실적이라 차라리 더욱 빛난다. 두 주인공의 사랑은 어둠 속 불 켜진 무인 상회와 라이트 켜진 텐트처럼 위태롭지만, 가녀리게, 그래서 아름답게 반짝인다. 모두들 빨리 이 글을 읽고 세상이 얼마나 엉망인지 느꼈으면 한다. 그래서 개개인의 몸부림을 고안해 보았으면 한다. 그게 사소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늦기 전에. minim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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