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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 2025-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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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근하고 복슬복슬한: 2025-3 스토리코스코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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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2025-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은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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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명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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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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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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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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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현상과 이면,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삶 바다는 언제나 고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지각이 움직이고, 그 파장은 예기치 못한 순간 거대한 해일이 되어 삶을 송두리째 흔듭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이죠.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그 이면에는 언제든 터져 나올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변수가 숨어 있습니다.  김수인의 소설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은 바로 이 예측 불가능한 삶의 이면을 정면으로 마주한 주인공, 선이의 이야기입니다. 한때, 방안에 틀어박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던 선이에게,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해 준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해윤이었죠. 그러나 운명처럼 찾아온 비극 속에서 해윤은 세상을 떠나고, 선이는 다시 어두운 동굴로 숨어듭니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불행을 그저 눈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선이는 끝없이 묻습니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은 달라졌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자기 삶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에 가깝습니다.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불행 앞에서, “답 없는 질문을 붙잡는 것”이야말로 삶을 견디는 방법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선이의 목소리 톤이 인상적이었어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점이 호소력을 더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그 건조한 톤 속에서 더 큰 울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미자 할머니’의 등장도 좋았습니다. 선이가 자신만의 동굴 밖으로 빠져나오는 과정이 잘 그려진 것 같아요.  결국, 이 작품은, 누구나 살아가며 맞닥뜨릴 수 있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의 삶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다른 선택 혹은 다른 길은 없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선명한 답은 없을 테지만, 선이와 함께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 이시경
단편소설 ‘멀리서’를 읽고나서 단편소설 <멀리서>는 남을 바라보듯 자신을 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생각하게 한다. 심리학이나 양자물리학 이론에서도 관찰자 기법은 유용하다.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걸  바라볼 수만 있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상황에 빠지지 않고 남의 일처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면 내면의 자기 목소리를 듣고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모자이크 타일 벽화는 멀리서 보았을 땐 무슨 모습인지 알 수 있지만 가까이에서 볼 때는 그저 얼룩처럼 보일 뿐이다. 전체를 보려면 멀리서 봐야 알 수 있는 모자이크처럼 우리네 삶도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극심한 고통을 경험할 때는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꿈꾼다. 오 감독이 그러한 인간의 속성을 그려보겠다는 의욕을 보이는 것은 이 소설의 주제라고 생각된다. 인간이 '자기답게 살지 못하면 무의식도 거든다'라든가, '연속되는 욕망의 좌절을 계기로 무의식이 모험심과 야망을 일깨우는 신호를 보낸다'는 말은 흥미롭다.  이 소설은 나의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는 무엇일까 귀기울여 보게 하는 소설이다. 파도에 잠식 당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파도를 타고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Annie
당신이 기다리는 토끼에 대하여 총체적 난국이다. 회사에서 맡은 업무가 토끼를 잡는 일이라니. 이토록 황당한 설정이 또 있을까 싶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어리둥절해진다. 뭐야, 이거 진짜였어? 이런 부서가 해외에 정말 있었단 말이야? 이야기의 발화는 터무니없는 상상력에서 비롯되었지만, 종착지는 묘하게 현실적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토끼 잡기’라는 소재에 대한 초지일관한 초점 덕분일 것이다. 작가는 치밀한 자료 조사와 탄탄한 플롯을 통해, 시한이 속한 부서가 어떻게 그 일을 수행하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그 과정은 추리 소설을 방불케 한다. 시종일관 긴장감이 이어지고, 독자는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듯 몰입한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의식은 쇼츠의 발달로 더 이상 깊이를 쫓지 않는다. 끝까지 보기도 전에 ‘다음 것’을 보려 손가락을 움직이는 훈련을 받은 세대. 짧은 순간의 쾌락을 놓치지 않으려 늘 스크롤을 넘기는 습관이 이미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고 있다. 하나의 콘텐츠를 온전히 붙잡는다는 것은 이제 거의 도전처럼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소설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유튜브 영상이든, 심지어 음식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결국 끝까지 경험하게 만드는 힘이다. 대중이 끝내 읽고, 보고, 듣고, 맛볼 수 있도록 몰입감을 유도해 창작자의 의도에 최대한 근접하게 하는 것. 바로 낯선 감각의 경험을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필수적인 미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상상력은 하나의 미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질문이 남는다.  보이지 않는 인생의 덤불 속에서, 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어느새 나는 시한처럼 한 손에 당근을 쥔 채, 크리스마스 이브가 오든 말든 내가 쫓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순간, 어라?  수풀이 흔들린다. 그것은 내 의식을 앞질러 달아나고 나는 조바심을 내며 그 뒤를 따른다. 언젠가 내 손에 잡힐 거라는 확신 속에서, 보이지 않는 토끼를 쫓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어쩌면 그 길은, 작가가 독자를 위해 미리 깔아둔 토끼몰이 경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뭐 어떤가.  이미 나는 당근을 흔들며 그 길 위를 달리고 있으니.이시경
은미준 작 ‘멀리서’를 읽고 이 소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돈이 되는 일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를 따져 보게 만든다. 이는 꿈을 좇느냐 현실을 좇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돈이 권력이 되는 시대에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따른다면 가장 이상적인 삶이겠지만 이런 삶을 사는 이들은 많지 않고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소설 속에서 윤재는 에어컨 설치 보조 기사나 음식 배달 퀵서비스 맨으로 일하고, 승수는 공사 현장에서 잡부 노릇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일을 하면서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오 감독의 진두지휘 아래 연극 준비를 하려고 한다. 영어 강사로 일했던 현지는 뒤늦게야,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망에 들떠서 자신도 그들처럼 연극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삶의 목표가 돈벌이로 귀착되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돈벌이도 하면서 연극을 한다는 것은 몸이 약한 현지에게는 버거운 일일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 시행착오 끝에 적절한 요령을 터득하게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 이 세상에는 수많은 현지, 윤재, 승수 들이 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설렘에 가슴이 뛰는 인생을 살기를 응원한다. 편안하게 산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므로. 시련을 거쳐 더 성숙해지면 인생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으므로.   인상적인 사건이나 극전 반전이 없어서인지 전반적으로 밋밋한 느낌이 드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 소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도 중요하고 꿈도 중요해서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이들이 처한 현실을 잘 재현해 준 점은 이 소설의 강점이다. 작가님에게 다음 작품을 기대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눈부신아침
우리의 쇼타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은비 작가의 다섯 번째 작품을 읽었다. 첫 소설, 스코 신인소설상 당선작인 『창』에서부터 줄곧 신작이 나올 때마다 기대하게 된다. 박은비 작가의 소설에는 뭔가 독자를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 있는 것 같다.  만일, 스토리코스모스 사이트에 ‘작가 구독’버튼이 생긴다면, 나는 주저 없이 ‘박은비 작가 구독’을 누를 것이다.  『인류 최후 증언자의 마지막 쇼타임』 이번 소설은 제목이 제법 거창하다. ‘인류 최후의 증언자’라니, 과연 어떤 이야기일까?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줄거리를 조금 이야기해보자면, 소설은 삶의 끝자락에 선 주인공으로 시작한다. 그는 높은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지지만, 기적처럼 살아남아 어느 낯선 마을에 발을 들인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설정 같지만, 이 소설의 진짜 매력은 뒤에 숨어 있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전을 만들어내는 건, 다름 아닌 박은비 작가 특유의 상상력이다. 억지스럽지 않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딱 ‘한 스푼’의 상상력이 작품의 맛을 살린다. 읽는 내내, ‘아, 바로 이게 박은비 소설이지’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 장치가 숨어 있다 그걸 찾아내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하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아마도 조금은 공허해질지도 모른다. 내 것이라 믿어왔던 삶이지만, 정작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그저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삶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작가는 우리를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히 ‘듣게’ 한다. 깊은 공허 속에서 잔잔히 울려 퍼지는 어떤 음성을. 그 음성에 귀 기울이는 한, 우리는 끝내 무너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시경
가장 연극과도 같았던 어느 현실의 밤   제목을 보자마자,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겠거니 싶은 소설이 가끔 있다. 취향이란 편협한 요소에서 발단된 것이기는 한데, 어떤 본능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눈길이 가는 제목, 이런 이름을 달았다는 이유만으로 설레는 작품. 작가가 이 아름다운 언어의 나열을 멋지게 형상화했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 구효서 소설가의 <그녀의 야윈 뺨>이다.   소설은 서른여덟 살 어느 연극배우가 18년 만에 첫사랑과 재회한 어느 밤을 중심에 두었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예술가로서 서른여덟이 된 주인공과 미국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는 여자. 둘은 대학 시절 미팅에서 만났고, 오랜 기간 연애를 했지만 잠자리는 가지지 않았다. 뻔한 표현이기는 하나, 둘은 서로에게 순수한 사랑, 청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남녀 주인공이 환상과도 같은 대학로의 밤으로 입장한다. 돌아가며 노래하고. 서로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 공연이 있고, 관객이 있고, 춤추는 젊은이들로 가득한 거리의 정경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두 주인공의 현실은 화려한 대학로와 내내 대비된다. 남자는 이제 현실보다도 연극으로 산 기간이 훨씬 길다. 그에게는 정체성의 상실이 덤덤하다. 현실이 아닌 연극 자체가 토대가 되어 가는 연극판 속, 이제는 차라리 현실이 혼동되었으면 한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 옆에 여자는 결혼 후 야윈 뺨만이 선명하다.   현재 시점 대학로의 보여주기는 두 사람 앞에 청춘을 애달프게나마 되살려 보려는 작가의 시도로 읽혔다. 지독한 현재와 낭만적인 과거가 대조되며, 애달픔이 차오른다. 그럼에도 옆자리 테이블 넥타이 부대와 다툼하는 철없는 주인공,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고 웃는 남녀에 피식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서른여덟이 되어 하는 인생 3번째 싸움, 떼거리로 맞으면서도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로구나,’ 하고만 생각하는 주인공의 소년성이 되레 아프게 읽힌다. 이런 대비가 효과적으로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그게 독자인 내게 그대로 전이되었다.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데도, 서글픈 감정이 점점 쌓인다. 그 원인은 주인공의 현실뿐만 아니라 뭔가 미심쩍은 첫사랑의 야윈 뺨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다는 그녀는 내내 뭔가 미심쩍다. 토로하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대사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부자연하다.   두 사람의 밤 이후, 남자 여자의 현실을 수소문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녀의 야윈 빰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어떤 마비의 흔적의 의의가 선명해지는 순간, 사무치는 감정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현실을 목도하고는 본인의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남자의 뒷모습이 애석하다. 그러나 비난할 수가 없다. 그렇게 비난할 수 없는 독자인 나마저, 애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야윈 청춘을 이리도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반가웠다. 내 편견이 오랜만에 제대로 작동한 것 같아 기쁘다. 리뷰를 마치며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야윈 뺨밖에 생각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구름
어떻게 거미까지 사랑하겠어, 엄마를 사랑하는 거지 한때 SNS에서 유행했던 질문 챌린지(?)가 있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거야?' 라고 물어보는 질문에 답변을 듣는 것이었다. 유행이 한창 돌 때는 흥미가 없었는데, <마망>을 읽고 궁금해져서 재미삼아 엄마한테도 질문했다. '엄마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 라고.  아빠의 대답은 뻔하게 예상이 됐다. '그런 걸 왜 물어보노?' 그래서 안 물어봤다. 근데 이상하게 엄마는 뭐라고 대답할 지 예상이 안 됐다.  엄마는 별 고민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모습이 변했을 뿐, 결국엔 내 딸이니까 안 죽게 잘 키울 거야'  이시경 작가의 <마망> 도입부를 읽으면서 SNS에 유행했던 바퀴벌레 질문이 바로 떠올렸다. 이 소설에서는 바퀴벌레 대신 거미로 변하지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생각나기도 했다. 당연하고 마땅했던 존재가 갑자기 낯설게 변한다면? 이 질문은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제법 클리셰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배우자가, 때로는 자식이, 때로는 부모가 낯선 존재로 변하는 이야기. 그리고 저 질문에는 두 가지의 함의가 숨어 있다고 느낀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는 메세지, 그리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줬으면 하는 소망'  <마망>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그 함의들을 가장 선명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대상인 '엄마'가 거미로 변하면서 시작한다. (왜 하필 거미일까? 라는 질문에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마망'이라는 거대한 거미 조형물을 한 번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린다) 소설 내용은 스포일러 같아서 자세히 밝히지 못하지만, 거미가 된 엄마 자영의 처지는 꽤나 비참하다.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거라고 생각했던 가족들이 사실 존재의 역할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배신감, 역할을 담당할 존재가 사라지자 바로 대체자를 들이라는 남편의 '마망' 시어머니의 모습에서 오는 분노, 소설에 묘사되는 모든 상황이 지극히 현실을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에 드는 무력감 등. 그리고 어느덧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있는 독자들에게 물음표를 선사하는 결말까지.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출발점인 질문(당연하고 마땅했던 존재가 낯설게 변한다면?)이 가진 함의 두 가지를 철저하게 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자영의 가족들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존재를 잃었고(잃다 못해 대체해버리기까지 했다), 거미가 된 자영까지는 사랑하지 못했다. (거미가 된 자영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지 못했다) 대신, 자영은 자유와 고유함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영이 자판 위를 열심히 오가며 쓴 소설이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까. 한편으로는, 이시경 작가의 다른 스타일도 엿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잘 짜여진 기존의 소설들에 비해 <마망>은 뭔가 비어 있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공백을 독자 스스로 사유하며 채워본다면 더 풍부하게 읽힐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라는 질문에 대한 엄마의 대답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에 엄마의 대답을 섣불리 예측하지 못했다. 소설 <마망>에서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들려주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며 독서를 마친다.   박은비
쇼츠 같은 다섯의 이야기 김덕희 소설가의 <디에스 이라이>를 좋게 읽어 구매한 소설이다. 단편 가격인 1,000 코인인데도 목차가 다섯이나 있어 놀랐다. 뒤늦게 작가의 말을 확인해 보니, 엽편과도 같은 짧은 ‘스마트 소설’이 모인 것이었다.   오히려 좋다. 한정된 분량으로 3막 구조, 기승전결이 담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작가로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 점점 짧아지는 미디어에 익숙해지는 요즘, 독자로서 반가운 일이다.   스마트한 소설이라는 말답게, 편리하고, 독자 친화적인 이야기집이 아닐 수 없다. 가볍고도 재미가 보장된, 그러면서 생각할 거리도 제공하는 다섯의 이야기였다. 쇼츠처럼 짧지만, 무의미한 쇼츠와 다르게 세상과 삶, 세태에 대해 독자로서 사유할 거리로 넘쳐났다.   그러니까, 재미있고 의미도 있으며, 경박하지도 않다.   가성비 좋은 소설이라고 할까. 세상의 변화에 맞춰 이런 시도가 있는 것이 흥미로웠고, 오랜만에 편하게 독서할 수 있어 좋았다.   추천을 위해 각각 이야기들의 내용과 짧은 감상만 남긴다.   수압: 집을 보러 간 젊은 남자와 수수께끼 집주인 노인의 이야기이다. 공포 구전처럼 읽힐 수 있는 이 소설은 부동산 세태를 무섭게 풍자하고 있다.   배를 팔아먹는 나라: 투표권을 정당하게 양도양수할 수 있는 법안이 발휘되고, 그걸로 일어나는 반대급부로 소설은 이어진다. 조선업 강국인 대한민국, vote와 boat의 차이, 정치적 무관심. 소설을 읽고 고개를 돌려 세상을 둘러보라. 혹 스토리코스모스 사이트에서 벗어나 네이버 메인으로 가보길. 많은 걸 느낄 수 있을 터.   별의 거짓말: 게스트하우스 사장과 그전 약속을 지키려 찾아온 젊은 여인의 짧은 재회를 그린다. 청년세대의 방황, 무심한 시대정신, 그것을 아름다운 밤하늘로 낭만적으로 은유한다. 수많은 별의 이미지가 아름답다.   초대의 매너: 갑자기 나갈 수 없는 이상한 단톡방에 초대된 남자, 모르는 사람 끼리 단톡, 이어지는 정체불명 살인극이다. 가장 분량이 길고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카프카 <변신>의 도입부라든지, 시시포스 같은 닉네임의 상징을 하나둘 살피다 보면, 작가의 효율성, 꼼꼼함과 함께 초대의 매너란 제목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또한 그 아이러니는 제로섬 게임 중인 우리 사회와 딱히 다르지 않다.   보물: 보물-인류의 고귀한 유산-을 숨긴 남자가 압수수색을 받는 이야기다. 남자의 욕망, 박과의 심리 싸움이 이어지다가, 커다란 갈등이 터진 뒤 마지막에 보물을 어루만지는 주인공의 이미지는 인간의 본성을 선연히 드러낸다.   짧은 문학이라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닌, 인생과 인간에 대해도 다뤄야 한다.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독창적인 상상을 기본으로, 문장마다 두어 개, 혹 네댓의 의미가 복무해야 하고, 쓰는 이는 극도의 절제와 계산, 전에 없던 스마트함과 효율성을 요구받는다.   이런 시대적 요구가(최소한 문학가들에게는) 약간 창작자 착취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작가가 그 어려운 일을 해 주었다. 순문학 입문자, 혹은 복잡한 공법과 진중한 담론에 지쳤거나, 날이 너무 더워 조금 가볍게 독서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reader
부조리한 실존을 근사하게라도 은유하는 이야기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집요한 작가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죽은 건가 산 건가 싶은 부조리한 삶. 소설 속 모든 인물은 당연한 듯 찾아오는 태풍을 견디는 중이다. 힘듦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악몽보다 더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 계절의 끝이자, 시작과도 같은 어느 불행의 굴레에 빠진 상태이다. 실존하는 우리 모두가 그렇다.   소설은 사시사철 붉은 단풍나무에 가로막힌 창의 풍경으로 시작된다. 남편 진우와 아내 수정, P 세 인물을 중심으로, 장모와 아랫집 여자까지 더해 여러 삶이 죽은 나무의 가지들처럼 엉키는 그림을 그린다. 수정의 암, 장모의 결혼과 이혼, 자살 기도, 아랫집 여자의 스토킹 등. 소설의 현재 이야기는 7년 전 사건을 중심으로 운동하고 있다. 물론 이런 소설이 운동하는 것은 이야기의 힘보다는 삶 그 자체로 보아야 옳다.   이런 소설은 감춰진 서사보다 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것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인물의 심적 회로를 따라가는 것에서, 그 깊은 맛이 우러난다. 염세적이든, 낭만적이든, 실존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부조리하다. 속에 연결된 듯 보이는 인과는 우리 실존의 덧없음을 선명히 할 뿐이다. 해피엔딩도 반복되면 슬픔이 되고, 인간 사이 오해와 불소통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며, 우린 그걸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 죽지 않는 이상.   이 소설에서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는 끝내 제시되지 않는다. 사건의 전말은 발설되지 않고 살짝 비치고 끝난다. 그게 되레 이 소설의 희망으로 작동하는 건 흥미로운 아이러니였다. 이유는 어쩌면 제시되지 않아야만 한다. 그게 차라리 우리를 살리기도 하니까.   진우의 작은 의지와 함께 소설은 마무리되고, 질문은 독자에게 넘어간다. 어떤 빛의 가능성 정도의 인상으로. 그러니 터널 속에서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허나 작가의식의 돛은 어떤 빛에, 뭔지 모를 희망을 향해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비겁함에도 아이에게 사랑한다 말하는 진우와 바스락대는 소리가 전부 위로인지도 모른다는 문장, 또 앞을 꽉 가로막은 단풍잎에서 시작된 소설이 종국에 아이들의 단풍손에 도달하는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서, 부조리한 삶에 대해 독자로서 직접 곱씹고 자문하게 되었다.   부조리는 계속될 것이다. 삶은 이미 그 자체로 부조리하니까.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 진우처럼 ‘살아야 할 이유 같은’ 무언가는 계속 생겨날 것이다. 억지로라도 만들 수 있기도 하다. 독서 후 이런 ‘빛과 같은’ 마음이 내 속에서 피어나는 경험은 값진 것이었다.   끝으로 이 소설은 부조리극의 성격을 띠는 여타 작품들처럼 잡지식을 끌어다 모아 분위기를 잡지 않았다는 점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덧붙이고 싶다. 쓰는 이의 정성과 절제되고 잘 계산된 장면만으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작가의 선명한 개성과 깊은 예술성으로, 집요하고도 의연한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구름
진실에 가닿는 작은 흔적들 되도록 배제했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이기는 하나, 독자 입장에서의 소설적 기본값은 아름다운 문장과 서사적 긴장, 그에 따른 재미에 마지않을 것이다.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집중하고, 예기치 못한 반전에 놀라고, 여운이 남는 결말을 맞이한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는 아름다운 문장과 묘사, 사건과 장면, 이후에 문득문득 깨닫게 되는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사유. 그게 활자 서사 예술의 기본이고, <북두칠성의 복사점에 관한 사적 견해들>은 그런 기본을 상기해 주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주희라는 아이가 ‘그들’이라는 존재에 의해 사고를 당한 이후를 그린다. 주희의 부모, 숙부와 숙모까지 네 명의 어른이 가평의 오래된 별장에서 ‘그들’로부터 주희를 보호하는 것이 표면적 서사라 하겠다. 어른들은 경고하듯 주희에게 주입한다. ‘그들’은 사납다고, 어떤 흔적과도 같은, 불안이 묻은 존재라고. 배후에는 할머니의 묘한 죽음이 깔려 있다.   독자로서 독서의 시작은 이랬다. 재난과 재해에 대비하는 어른들을 보며 ‘그들’이라는 환상적 요소가 섞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식 소설이겠거니. 허나 어른들 사이 부딪는 태도, 스산한 묘사,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이 없는’ 별장의 공간으로 빨려 들수록, 독자로서 묘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불안이 고조될수록, 읽고 지나친 퍼즐 조각 같은 요소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숙모의 사고, 할머니의 죽음, 사고로 잃은 주희의 기억, 상속에서 제외된 어른들 등. 종국에는 머릿속에 수놓인 퍼즐 조각들이 북두칠성처럼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다.   인물들이 일제히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독서 내내 고민하다가, 끝에 그 답을 발견하는 일은, 충격적인 비밀의 폭로를 목도하는 일은 커다란 카타르시스였다. 작가는 이미 가장 큰 단서를 초반에 심어두었고,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 놓았다. 호불호가 딱히 없을 긴장과 반전. 재미였다. 모두 이따금 숨을 참게 되는 이 소설을 즐길 수 있으리라. 그렇게 몰입하다가, 소설이란 매체의 기본값마저 되뇔 수 있으리라.   더 이상의 스포일러보다는 소설의 낯선 공법에 대해 조금 들여다보면 좋겠다. 재미가 보장된, 하나의 진실로 모여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으나, 그 구성은 도식적 뼈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가는 그 전통적인 구조에 적확히 자신의 의식을 이식하고, 그런 재미의 흐름에 공명의 흐름을 중첩하는 세련된 방법론을 취했다. 표면은 이면을 은유하는 사적 방법론이며, 진실 또한, 작가의 의식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실체가 소설 초반에 무엇이었나 기억해 보고, 소설 종국에 무엇이 되었나를 목도해 보면, 이 소설의 본질을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전반에 끼얹어진 불안과 진실로부터 도망치는 무수한 작은 몸짓들의 합일을 통해, 어떤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작가의 필력이 뭐랄까. 대단히 압도적이다. 우아한 문장과 화려한 묘사, 하나하나 손으로 꾹꾹 눌러쓴 듯한 문장들. 이런 작가는 최근에 더욱 귀하다. 언어만으로 아름다움을 달성하는 일, 그게 활자 예술의 특권이고, 영상이나 음악 같은 여타 다른 매체와 구분될 수 있는 소설이 지켜야 할 부분이라 느낀다. 어느 장을 펴도 아름다운 문장, 어느 부분을 읽어도 리듬이 느껴지는 문단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이야기, <북두칠성의 복사점에 관한 사적 견해들>이 내게는 그랬다.   보기 드문 문장가의 소설이었다. minimum
적응이라는 억압과 도태되고 사라지는 것들  되도록 배제했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남자는 실업 후 1년을 무직으로 지내다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런데 그는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아내가(당연한지도 모르지만) 더 시끄럽다. 소설은 그의 재취업에 따른 아내와 주변의 반응에 집중함으로 되레 남자의 존재를 조명한다. 정체 없는 인간. 세련된 방식의 도입으로 빠지듯 독서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대단한 실의나 우울에 빠진 인간처럼 보이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저 피로한 중년남자. 지나가다 한 번 볼 듯한 사람, 너무나 일상적인 한 폭의 그림 속 인물3 같아 되레 애정이 가는 인간. 헌신적이되, 그 탓에 도구처럼 사용되는 서글픈 남자.   그런 남자가 삶을 떠돌다가, 노인을 만나며 사건이 벌어진다. <캄브리아기의 달빛 아래>는 일상적인 인물과 이야기를 극히 낯설게 그려내는 소설이다. 구피와 삼엽충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작가는 소설을 위해 강으로 떠밀려 간 구피와 멸종당한 종을 불러온다. 종은 어쩌다 멸종을 맞게 되는 걸까. 기후 변화, 포식자, 지형학, 자연재해, 이유는 다양하겠으나, 역사는 이 모두를 망라하여 간단히 ‘적응에 실패했다’고 정리하곤 한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어떨까. 우리도 멸종위기종과 다를 바 없이 수많은 것들에 치이며 살고 있다. 주인공 남자로 예를 들면, 다니고 싶지 않은 회사, 돈 문제, 남편 노릇, 사랑이 식어가는 아내, 쌓이는 시간과 죄어 오는 남의 정체성까지.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끼인 현대인은 멸종을 앞둔 동물과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른다. 적응해야만 하는 시스템 속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인간은 사라질 뿐이다. 소설은 그런 우리의 현실을 극히 낯선 알레고리를 통해 그런 다시 보게 해준다.   소설 속 남자는 노인을 통해 화석이 된 캄브리아기의 돌레로바실라쿠스와 구피를 번갈아 보게 된다. 이어서 자기 자신을. 종국에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환상적인 어느 합일이 이루어진다. 시간의 두께가 부드러워지며, 소설의 경계도 부드러워진다. 층위는 무너져 내리며 우아하게 융합한다. 압도적인 하나의 이미지가 완성되고, 남자는 어느 달빛 아래 서게 된다. 진정한 탈피, 라는 말이 떠오른다. 감탄이 나오는 마무리였다.   결말이 참 재미있는 소설이라 읽은 후 후회가 남지 않는다. 아주 먼 두 요소를 중첩하는 작가의 층위가 새로웠고, 예상치 못한 결말이 압권이었다.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읽다가, 작가의 의식을 함께 사유하다가, 끝에 뒤통수를 맞는 이런 소설을 만나면, 독자로서 늘 기분 좋은 뒷맛을 챙기게 된다.    minim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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