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되기까지 경험한 삶의 경로를 진솔하게 담은 신예작가 8인의 에세이집이다.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괴롭고 적응하기 힘든 삶의 경로를 소설가가 되고 난 뒤에 돌아봄으로써 소설가가 반드시 재능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생한 작가탄생 리포트를 읽을 수 있다. 숱하게 많은 직장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괴롭게 소설가의 길을 간 사람도 있고 물리적인 측면과 다르게 독특한 정신적 측면의 경로를 거쳐간 사람도 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이 인간과 인생의 문제를 다룬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들에게 재능보다 우선하여 주어지는 삶의 경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단번에 간파할 수 있게 된다. 그토록 힘들고 괴롭고 적응하기 힘든 삶의 경로에서도 그들이 길을 잃지 않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나침반이 바로 ‘소설’이라는 걸 알게 하는 책이다.
목차
만년필에 대하여│방성식 08 운다고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지만│서애라 42 사랑이 망하고 남은 것들│이 밤 96 나는 소설의 신을 만났다│이상욱 134 내 소설의 비밀병기: 활자카메라│이시경 158 활자 중독자의 내면 풍경│이한얼 188 주변인으로서의 작가│임재훈 208 현실은 복제되지 않는다│최이아 238
이 책은 소설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그들이 경험한 인생 경로를 통해 밝혀내고자 기획된 책이다. 갓 탄생한 소설가들, 아직 문학적 명성을 얻지 못한 채 힘들어하는 그들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육성을 모아 놓으면 그 결과물에서 소설가가 탄생하는 데 필요한 진정한 공통분모가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 그리고 그것을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심리적 경로와 물리적 경로 사이에서 소설가가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만 프로그램된 일종의 운명적 코드 같은 게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기획의 출발점이었다.
소설가의 일생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소설가가 되고 난 이후의 과정. 이 책에 수록된 신예 소설가 8명의 자전적 에세이는 당연히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등단이란 소설가에게는 새로운 탄생이자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독자들이 이 책에 수록된 자전적 에세이를 다 읽으면 그들이 소설가가 되는 데 기여한 건 재능이 아니라 ‘삶의 경로’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삶의 경로가 외관상으로는 본인들이 원하는 길을 간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에서도 안정과 평안을 얻지 못한 채 부유하고 방황하며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주변인의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기이한 공통점을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불안정한 삶의 경로를 거치면서도 무의식의 저 깊은 기저로부터 ‘소설을 쓰고 싶다’거나 ‘소설을 써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에 시달렸다는 공통점 또한 드러내고 있다.
인생이 캄캄하게 느껴질 때마다 백지 창을 띄워놓고 토하듯이, 때로 싸우듯이 썼다. 남몰래 꿈꾸고 은밀하게 써왔다. 습작생이란 어쩐지 수험생이나 고시생과는 다르게 내놓고 말하긴 낯부끄러운 신분이니까. 주로 좌절된 꿈과 망한 사랑 탓에 방황하며 인생을 두고두고 망가뜨리는 애송이들의 이야기였다. (……) 돌이켜보면 그랬다. 나를 숱하게 망하게 했던 것들이 나를 쓰게 했다. 사랑이 망해도 망한 나는 남았으니까.
-이밤 「사랑이 망하고 남은 것들」 일부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음악도 있고, 영화도 있고, 그림도 있는데. 그게 뭐든 소설보다 돈이 됐을 텐데. 모두가 더 좋아하고 관심을 가져줬을 텐데. 아버지에게 그런 눈빛을 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상욱 「나는 소설의 신을 만났다」 일부
직장 생활 십여 년 만에 실업급여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고용복지센터가 안내해 준 총 수급 기간은 팔 개월이었다. 그사이 소설을 쓰면서 틈틈이 재취업 준비를 해보자고 계획을 세웠다. 다른 글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소설 창작의 욕구가 피어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임재훈 「주변인으로서의 작가」 일부
인용 글에서 보다시피 소설가가 되기까지 저들이 겪은 삶의 경로는 순탄치 않고 안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무의식의 발로처럼 어려운 삶의 경로를 거치는 동안에도 소설에 대한 연결고리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경로가 한계치에 이를 때쯤 당선통지를 받고 소설가가 되었다. 그 순간의 기쁨과 희열을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소설, 인생을 버티게 하는 마지막 자존의 방패
경험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알겠지만 당선 내지 등단이라는 것은 운전면허를 발급받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면허를 받고 운전을 하거나 말거나, 차를 사거나 말거나, 사고를 내거나 말거나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소설가로 주목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오직 한 가지, 그들이 좋은 소설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될 때뿐이다. 그래서 온갖 심리적 물리적 굴곡을 거쳐 가까스로 소설가가 된 이후에도 그들은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자신을 불사르는 것이다. 오직 좋은 소설을 쓰고, 오직 그것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이 책에 수록된 자전적 에세이들을 통해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도출된다. 소설가가 되기까지 저들에게 주어진 쉽지 않은 삶의 경로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 뿐만 아니라 삶의 경로에서 얻은 인생 경험이 의식의 밑거름이 되어 소설의 질료가 된다는 것. 요컨대 그들은 처음부터 타고난 작가적 재능이 있어서 소설가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재능이 아니라 자신들을 견인하고 버티게 하는 무의식적 구원의 방패를 그들은 지니고 있었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그 운명의 방패가 칩처럼 꽂혀 있어 위기가 올 때마다 버티고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힘겹고 버거운 삶의 경로에서 쓰러지지 않고 무릎 꿇지 않을 수 있게 해 준 마지막 자존의 방패-그것이 바로 ‘소설’이었다. 소설가를 만드는 게 재능이 아니라 ‘삶의 경로’라는 걸 진지하게 되새겨보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