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외 4인이 저술한 『인간과 상징』 에서, 융은 어느 정신과 의사가 가져온 노트의 내용을 소개한다.
그 노트는 의사의 딸이 여덟 살 때 꾼 꿈의 이미지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중 6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6> 나쁜 소년이 흙 한 덩어리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던진다. 그래서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이 된다. (카를 융 외, 이윤기 옮김, 『인간과 상징』 p.103, 열린책들, 2009)
이 페이지를 읽고,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악의가 확산 혹은 전염되는 이야기를 언젠가는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 얼굴이 검은색이었니?
고개를 젓는다.
아니오.
눈 코 입은 모두 제대로 된 자리에 붙어 있었니?
조금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이전에 만난 적 없을 뿐 우리처럼 보통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어?
예.
여기까지, 일단 미지의 생명체는 아니고 사람이긴 한가 보다.
그는 아무나 골라잡아 화풀이를 한 것 같아?
애매하게 끄덕이다가 갸웃하는 걸 보면 ‘아마도’라는 뜻에 가까울 것이다.
그를 보고 놀랐어?
이번에는 끄덕임의 동작이 없이 고개를 기울이기만 한다. 글쎄요……인가. 놀라움과는 좀 다른 감정인 듯싶은데 그걸 나타낼 말이 도출되지 않거나 자신도 확신하기 어렵다는 듯.
그를 보고 겁에 질렸니?
역시 글쎄올시다. 놀란 것도 겁먹은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왜…… 이번에도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그를 보고 왠지 모르겠고 무언지도 모르겠는 감정에 휩싸인 거야?
‘모른다’는 말에 반응하여 예.
그를 보는 순간 갑자기…… (민주는 말하면서 손가락을 한 개씩 펴 보인다) 이유는 모르겠고 딱히 두려움을 느낀 것도 아니지만 갑자기 피가 식었다, 식은땀이 났다, 손발이 저리고 숨이 막혔다. 슬펐다. 미친 듯이 화가 났다. 이중에 네가 느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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