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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이 사라진 방 :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소설 단편 당선작

방성식 2023-03-22

ISBN 979-11-92211-76-3(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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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내 아내의 아버지는 60년대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난 일본인으로 일본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낭만을 있는 한껏 만끽하셨던 분이다. 나훈아를 빼닮은 남자다운 외모에 젊은 시절 내내 모터사이클과 윈드서핑을 즐기셨고, 록 음악팬이라 친구들과 만든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시기도 했다. 졸업한 뒤엔 곧바로 선대로부터 이어온 가업을 계승하셨는데, 덕분에 버블 경제 붕괴로 정리해고가 일상화된 와중에도 생계 걱정은 하지 않으셨다. 건축업을 하는 부친으로부터 이 층짜리 단독주택을 물려받으셨고, 지금은 남아 있는 빚도 없어 그동안 못했던 브랜드 기타 수집에 열을 올리시고 계신다. 장모님과도 사이가 좋아 주말이면 부부 두 분이서 데이트 즐기느라 바쁘시다.

작중에서의 화자도 비슷한 말을 하지만, 근현대사의 비극과 참상, 가난을 경험했던 대한민국 부모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인생을 살아오셨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 역시 나의 부모님보다 장인어른과의 대화가 편하고 익숙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선진국이 된 양 국가의 첫 번째 세대이자 국가적 쇠락을 경험한 최초의 세대라는 점에서 장인어른과 나는 비슷한 맥락에 서 있을 때가 많다. 노력하면 성공한다느니, 돈 벌어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최고라느니 등의 구호를 외치는 대신 묵묵히 너트에 새 줄을 감아 기타를 친다. 강박 가질 필요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모두가 행운아일 수는 없다. <현관의 사라진 방>에서 등장인물 세 사람을 화해시키고 싶었던 건 나와 장인어른이 속한 두 세대 간의 불행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초고의 결말은 다카모리 씨의 주재로 주인공과 사야카 씨가 맺어진다는 결말이었으나, 뜬금없고 작위적이란 지적을 받고 지난 3년 동안 네 차례의 전면적 개작을 거쳤다. 첫 번째로 내가 알고 있다 믿어왔던 배경지식을 지웠고, 둘째로는 이루어질 가망 없는 희망적 결말을 들어냈으며, 셋째로는 작중 가장 좋아했던 장면을 삭제했다. 네 번째로 주인공이 마지막 신에서 흘리는 눈물을 없앴는데 내 딴에는 다카모리 씨와의 감정적 접점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결국 지웠다. 그러자 인물과 사건, 배경과 주제를 연결하는 인과 연이 드러났다. 내 깜냥으로 판타지에 가까운 달콤한 포장을 씌우는 건 무리였고, 스리슬쩍 발 빼놓고 건드릴 만한 소재도 아니었다. 소설 속의 나를 지워 나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세계를 꺼내는 게 최선이었다.

언젠가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쓸 수 있겠지, 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읽는 이를 의식해서라기보다는 나 스스로를 속이고 싶어서다. 아주 오랫동안 소설가가 된다는 걸 말도 안 되는 희망이라 여겨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정말 설득력 있는 뻥을 쳤을 때 나 자신을 소설가라 세뇌시킬 작정이다. 너무 이른 영광을 주신 스토리코스모스와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를 표한다.

넉 달 전의 퇴근길, 회사 근처 골목에서 심상찮은 적색 기(旗)를 발견했다. 뾰족한 가시가 돋은 열쇠 형태의 도안이었는데, 나로서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반가운 표식이었다. 설마설마하며 화살표를 따라 집과 집 사이 좁은 틈새로 들어가자, 본래는 주택의 뒤뜰이었어야 할 공간 뒤로 허름한 가건물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한 몰골이었으나, 입구에 걸린 간판만큼은 고광택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그럴싸한 물건이었다. <이자카야 아 바오아 쿠> 이름마저 쓸데없이 거창했다.

내부로 들어서자 “지크 지온”이라는 경례 구호가 맞이했다. 점원은 군복처럼 보이는 카키색 유니폼을 차려입었는데, 코스프레 매장에서 파는 기성품이 아닌 공들여 제작한 수제품이었다. 테이블 위엔 ‘우주전투기동형 F식 밀키트’라는 이름의 추천 메뉴가 붙어 있었다. 흰자로만 덮은 오므라이스에 마카로니 샐러드, 하이볼 위스키로 구성된 석식 세트로, 전화로 예약하면 원하는 캐릭터의 엠블럼을 그려준다고 했다.

스크린에선 초기 건담 시리즈의 방영분이 출력되는 중이었다. 장교복을 입은 청년이 주인공 소년의 뺨을 내려치는 장면이었는데, 건담의 조종사인 그가 적과의 교전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고작 열다섯 밖에 안 된 피난민으로, 파일럿은커녕 사격 훈련조차 받지 못한 중학생 소년이었다. 그런데도 군은 그가 건담을 몰 수 있는 유일한 남자라며 백병전에 동원했다. 각자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참다못한 주인공이 장교에게 질문했다. 싸워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려달라는 말이었다. 대답 대신 어리광 부리지 말라는 손찌검이 날아왔다. 소년은 치기 어린 반항으로 일갈했다. ‘때렸어…? 때렸겠다! 아버지에게도 맞은 적 없는데!’

“푸하하하!”

뒤이은 웃음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얗게 센 뒤통수가 내 자리 뒤편에서 폭소하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자, 만면에 미소를 띤 다카모리 씨가 들어왔다. 놀라워하던 표정 위로 반가움이 번져갔다.

“어라라? 파쿠 군이 여긴 어쩐 일이야?”

아뿔싸.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간신히 잡아 폈다. 하필이면 회사 근처를 기웃댔던 게 잘못이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술친구의 출현에 들떠 하는 것 같았다. 당연하다는 듯 잔을 챙겨 내가 앉은 옆자리로 다가왔다. 이미 주문까지 마친 뒤라 도망칠 핑계를 대기 궁색했다. 민감한 화제가 나오지 않도록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 어릴 적만 해도 지금처럼 시시한 시리즈가 아니었는데.”

그는 요즘 건담은 전쟁물보다는 전대물에 가까워졌다며, 겉으로만 화려할 뿐 진짜 같은 현실감이 사라졌다고 혹평했다. 1979년에 방영한 첫 작품이 최고라는 거다. 누구누구는 진짜 군인처럼 충직했다든가, 누구누구는 끝까지 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추억의 캐릭터를 소환해냈다.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장르소설집 『남친을 화분에 담는 방법』, 여행 에세이 『냉정한 여행』 출간 

웹북 『현관이 사라진 방』 『채찍들의 축제』 『이별의 미래』 『만년필에 대하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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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kdrntlr15@naver.com 

현관이 사라진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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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2 현관이 사라진 방을 읽고 김유 2023-12-15
1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초록달 20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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