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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

소설 단편

엄창석 20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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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심각하게 흔들거나 체제를 곤경에 빠뜨리는 불온한 이야기. 체제의 권력은 그런 이야기의 생산을 틀어막고, 또 그런 책을 불 싸지른다. 이른바 금서(禁書)다.

조선 후기에 이야기를 펼치던 중에 살해당한 이야기꾼이 있었다. 나는 당시의 한 기록물에서 “이야기꾼이 약방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청중의 칼에 맞아 죽었다”라는 2줄짜리 기사를 읽었다.

가련한 그자는 설낭(說囊) 혹은 전기수(傳奇叟)라고 불리는 직업 이야기꾼이었다. 근대 소설가의 원형 가운데 하나가 설낭이라고 한다면, 그자는 집필 중에 살해당한 소설가인 셈이 된다.

그의 이야기가 어떻길래 죽임을 당했을까.
거꾸로, 어떤 이야기라야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을까.

설낭의 죽음이 내게 던진 충격은 이때까지 작품을 쓰도록 내게 부추겨왔던 모든 동기부여보다 강렬하여서, 단편「해시계」의 마지막 문장에 닿기까지 그 전율이 살아 있었다.

얼마나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까. 격자창으로 햇살이 비쳐들었다. 나는 보던 책을 한쪽에 밀어놓고 조금 비틀거리며 뜰로 나왔다. 청사의 높은 추녀를 비끼며 햇살이 쏟아졌다.

마당에는 늙은 관노가 빗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관어정(觀魚亭)을 돌아서 관찰사가 집무하는 선화당까지 나아갔다. 대감이 청에 오르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을 것이다. 나는 빈 대청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축대 위에 놓인 해시계에 눈이 갔다. 앙부일영(仰釜日影). 세종 임금이 장영실에게 명하며 만들었다는 앙부일영을 본떠 만든 해시계였다. 몸체가 오목한 솥처럼 반구형이고 그것을 거북 등이 떠받쳤다. 크기는 겨우 한 아름 정도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햇살이 뾰족한 시침에 걸려서 반구형 시계판에 짧고 날카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림자에 맞물려 있는 은색 시각선이 진시(辰時, 7시)였다.

태양과 감영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둘 사이의 공간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산란하고 있을까.

나는 문득 그 공간에 편만한 무수한 햇살을 단 하나의 그릇에다 모아, 태양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해시계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지난밤 읽었던 책들과 채물음의 이야기가 내게 환각과 유비(類比)를 가르쳐 주었음이 분명하다.

나는 하늘로 열린 반구형 해시계를 보면서 세상에 편만한 온갖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로 담아내는 채물음의 입을 떠올렸다.

나는 은색 시각선에 맞물린 그림자가 움직일 때까지 오랫동안 시계판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팔을 들어서 해시계를 받치고 있는 거북 등에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다.

擧(거).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화살과 구도」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슬픈 열대』,『황금색 발톱』,『비늘 천장』, 장편소설 『빨간 염소들의 거리』, 『태를 기른 형제들』,『어린 연금술사』,『유혹의 형식』, 산문집 『개츠비의 꿈』이 있다. 한무숙문학상 수상.

 

padong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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