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시력을 지닌 인간은 빛의 삼원색, 즉 빨강 · 파랑 · 초록을 통해 색을 감지한다. 이 세 가지 색을 모두 합치면 흰색, 모두 제거하면 검은색이 된다. 최소단위로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수만 가지 색상을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연산색상을 사용하는 디지털카메라 원리와 다를 바 없다.
재미나 객기, 혹은 의외의 진지함이 나를 유혹한 걸까. 나는 소설이 생성되는 과정에 빛의 삼원색 원리를 적용해 보고 싶었다.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는 그러한 시도의 일환으로써, ‘화이트 & 블랙’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생성된 이야기다.
덧붙여, 소설을 쓰려는 시점에 세상에 챗GPT가 등장했다. 무지로 인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내 고유의 내적 알고리즘을 가동시켰다. 챗GPT가 흉내낼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스토리를 시도해 본 것이다.
‘눈 내리는 창신동 절벽 마을’에 사는 ‘윤슬’의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공터 구석에는 간밤에 불을 피웠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양철통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시커멓게 그을린 잿더미가 수북했다. 통 안에 꽂혀 있던 긴 쇠꼬챙이로 잿더미를 뒤적거렸다. 잿가루가 풀풀 날리자 나도 모르게 잔기침이 났다.
잿더미 속에서 타다 남은 하얀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꼬챙이로 뒤적여 보니 그것은 찢어진 노트였다. 종이에는 한 단어 한 단어가 또박또박 정자체로 적혀 있었다. 문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낙서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어설픈 필체였지만, 누군가 검정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엿보였다.
이상한 점은 종이에 적힌 글자 체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글 자모음이 개별로 분리되고 이상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최근 들어 학교에서 학생용 챗봇 사용이 자율로 허용되면서 베타 세대의 문해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또 달랐다.
그것은 오래된 원시 동굴에서나 볼 법한 상형문자와 유사했다. 흰 종이 위에 검정 잉크로 배열된 활자는 나름의 규칙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음자음, 모음모음모음, 자음모음자음모음, 혹은 마침표쉼표물음표 따위가 일렬로 나열되는 식이었다. 군데군데 개미, 고양이, 호랑이, 강아지와 같은 동물 캐릭터가 기호화된 문자처럼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는 한글 고어, 쉬운 한자, 영어 알파벳, 로마 숫자까지 한데 뒤섞여 있었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런 종이가 한두 장이 아니었다. 양철통 안을 가득 채운 모든 종이들이 다 그랬다. 한글을 접해 보지 못한 낯선 세상에 사는 사람의 소행이라면 또 모를까.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를 제대로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처럼 기이한 방식으로 언어를 해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터였다. 반면, 그것이 나름 세상과 소통하려는 어떤 의지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웹북 『데스밸리 판타지』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 『푸에고 로사』 『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 『데니의 얼음동굴』 『내 소설의 비밀병기: 활자카메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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