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금이나 성금에 기부하기는커녕,
커뮤니티나 SNS에 검은 리본이 달린 사진 하나
업로드하지 않았고,
전쟁 책임자들을 욕하거나
지지부진한 싸움이 끝없이 계속되는
기묘하면서도 답답한 상황에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그렇지 않았나?”
라는 허망함과 무력감으로 그렇게
전쟁은 나에게 다가왔다.
전쟁은 원래 그런 거라고 가르쳤다.
이 소설을 개작하는 과정에서
나의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적인 죄악
나의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적인 나약
나의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적인 교만
나의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적인 허무
나의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그럴듯한
자책으로부터 나를 분리한 뒤에야
우크라이나를 위한 무언가를 활자로
옮길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재건에 관한 이야기다.
한없이 되풀이되는 파괴가 아닌
그보다 앞서 되살아났던 인간들의 이야기.
스러지지 않을 우리들의 의미를 남기고자
나는 이 소설을 썼다.
나는 캐시와 마주 앉아 탄산수를 마셨다. 실내 온도를 낮춰두었던 탓에 열이 오른 그녀의 몸 위로 수증기가 아른거렸다. 낯빛에도 혈기가 올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쩐지 옛날로 되돌아간 기분에 은근슬쩍 농담을 건넸다.
“미겔이랑 뭐라도 있었나 봐? 꽃을 다 보내고 말이야.”
캐시의 근황을 업로드한 SNS 계정의 주인이었다. 한때 친하게 지냈던 의대 동창이었으나 졸업 후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이였다. 캐시는 풋, 하고 웃음을 뱉었다.
“너는 걔가 친구인 줄 알지? 나한테 몰래 추근거린 줄도 모르고.”
“뭐? 미겔이? 정말로?”
우리가 결혼하면 들러리 서주겠다던 녀석이……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군. 그래서?”
“그래서 뭐?”
“그냥, 아까 물어봤잖아. 미겔이랑 뭐 있냐고.”
잠시 표정이 사라졌던 캐시가 장난스레 대꾸했다.
“말했잖아. 추근거린다고.”
“잘됐네”
비아냥이 아닌 진심이었으나,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덧붙였다.
“혼자가 아니라서.”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금이야말로 캐시의 곁을 도망쳐왔던 것을 사과할 때였으나,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대신 그녀의 말이 귓가에 닿았다.
“걱정했지?”
차분한 어조였음에도 나는 수긍하지 못했다.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변명으로 들릴까봐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쟁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소개팅 중이었어. 호텔 식당에서 고기를 썰며 취미는 뭐예요, 집안의 사업은요, 라는 둥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 그러던 중 여자가 휴대폰을 보더니 전쟁이 벌어졌다는 거야. 격전지가 보르바니아라기에 놀라긴 했지만, 솔직히 며칠 안에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유학 시절의 시시껄렁한 일화로 소개팅 상대를 웃겨주기만 했지.”
캐시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다음 날은 순환 근무라 정신이 없었지. 한나절을 꼬박 새워 집에 들어온 다음에야 캐시는 괜찮을까, 다치지는 않았을까 하고 불안해졌어. 그런데도 너에게 연락할 생각은 하지 못했어. 내게 전쟁이란 비현실적이고 막연했거든. 유학 시절의 보르바이나가 어느 정도 남아 있을 줄 알았어. 도시도, 거리도, 사람들도, 정말…… 이렇게 됐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내가 울 것처럼 보였던 걸까, 미지근한 유령 같은 손이 나의 팔을 어루만졌다.
“SNS가 잘했네. 알고리즘 주제에.”
그러더니 거미처럼 벌린 손을 깍지 껴 붙잡았다.
“한때는 나의 전부였던 사람들을 잃어버리기도 했지.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너를 포함해서.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전쟁 덕에 자유로워졌고, 그때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어. 영원할 것 같은 절망에도 끝은 있거든.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나는 그녀의 말을 이별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육 년 전에 나눴어야 했던 이별, 그때보다는 조금이나마 성숙해진 이별. 이제는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완곡한 거절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이제는 정말 헤어졌다는 실감에 눈시울이 시큰해지려는 찰나였다. 캐시의 왼쪽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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