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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고 로사

소설 단편

이시경 2023-10-15

ISBN 979-11-93452-01-1(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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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장미라고 다 같은 빨간 장미냐?”

오래전 일이다. 한 스승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독선적인 어법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런 내게 그녀의 의중이 제대로 전달될 리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조금 깨닫게 되었다.

빅마마, 레드 엘리트, 비탈, 마타도어, 푸에고……

모두 빨간 장미의 이름이다. 흔히 빨간 장미로 불리지만 알고 보면 각각 다른 이름을 갖는다. 그 특성도 달라 꽃잎의 빛깔, 줄기의 굵기, 가시의 정도, 심지어 향기와 수명도 다르다.

그 중 푸에고는 단연 고급 품종이다.

우리가 아는 백송이 장미의 주인공인데, 클래식한 기품으로 인해 중세 시대에는 ‘왕족의 꽃’으로 불렸다. 덧붙여, 원래 푸에고는 스페인어로 불 혹은 열정을 의미하며, 과테말라의 활화산 이름이기도 하다.

불현듯 그녀가 떠오를 때가 있다. 아마 이 소설은 그녀로부터 발화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 그녀는 내게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한 궁금증은 ‘이름’으로 이어졌다.

한 존재에게 있어서 ‘이름’은 어떤 의미일까.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푸에고는 태생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즉, 원뿌리로부터 잘려야만 시중에 출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뿌리 없는 존재가 생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온전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그 자신으로부터 발화된 뿌리를 현실에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플로랄 폼은 뿌리가 안착할 토양이 되어주며, 디자이너는 손과 발이 되어준다.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누군가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어쩌면 자신으로부터 발화될 뿌리의 역할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현실의 삶 속에서, 서 있을 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해 서서히 시들어가는 누군가에게 이 소설이 닿기를 소망해 본다. 그 이름 하나를 현실이라는 판각 위에 선명히 새겨 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이름, 푸에고 로사.

마지막 남은 단을 손질하기 위해 수호는 또 하나의 푸에고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집어 드는 것과 동시에 수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뾰족한 가시가 목장갑을 뚫고 수호의 손에 박혔다. 동시에 손에 있던 꽃을 놓쳤고 꽃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시 작업이 중단됐다. 바닥에 떨어진 꽃을 집기 위해 수호는 허리를 아래로 숙였다. 손을 바닥으로 뻗어 장미를 집으려는데 자신도 모르게 숙인 얼굴로부터 굵은 눈물방울이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러긴 했지만, 한동안 망각했던 한 아이가 바로 그 순간 수호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 아이는 태명이 로사(Rosa)였다. 로사를 임신한 산모는 임신 기간 내내 임신중독증에 걸려 하혈하며 사경을 헤맸다. 산모의 엄마는 산모를 살리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했다. 그러다 자신이 다니던 사찰의 스님으로부터 아이의 이름을 작명 받았다. 원래 아이는 태생이 남자인데 전생의 못다 한 업으로 여자로 태어나게 됐다며, 그 기운을 없애기 위해선 남자 이름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작명 받은 이름이 이수호였다. 하지만 스님의 작명에도 불구하고 산모는 아이를 출산한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장미처럼 아름다워 로사로 불린 페루 리마의 성녀 이야기는 성장하고 난 뒤에 알게 됐지만, 그것이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수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로사라는 태명은 그녀의 기억 속에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버려진 푸에고로 꽃다발을 만드는 순간 빛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웹북 『데스밸리 판타지』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 『푸에고 로사』 『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 『데니의 얼음동굴』 『내 소설의 비밀병기: 활자카메라』​ 출간​ 

 

sky_i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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