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처음으로 산책을 했다. 도서관을 목표로 걷고 오면 좋을 것 같았다. 생각이 많아질 것 같아서 이어폰을 끼고, 팟캐스트를 듣기로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며칠 전에 아내와 <애프터 양>을 보았는데,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마침 그 영화를 다루고 있었다. 진행자들의 목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영화에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ost(공교롭게도 앨범 타이틀이 ‘호흡’이었다)가 쓰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류이치 사카모토의 ost가 쓰였다는 건 팟캐스트를 듣는 중에 알게 되었다. 그의 음악을 짧게 들려주었는데, 큰 슬픔이 몰려왔다. 더는 걷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햇살은 여전히 강렬했고, 목표했던 도서관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어느 골목에서 아기 고양이를 마주쳤다. 고양이는 도망가지 않고 앞발을 다소곳이 세우고 이집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양쪽 귀가 어떤 전파를 감지한 듯 반사적으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는 잠시 이어폰을 빼고 아기 고양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도망갈 자세를 취해 나는 한발 물러났다. 고양이는 다시 그 자세로 조금은 편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양이님. 제 아기는 2023년 2월 15일 22시 06분에 태어났어요. 그리고 지금은 한 대학병원의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부디 아기가 건강히 퇴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기의 이름은……
고양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더니 낮은 담을 가볍게 뛰어올랐다. 거기에는 어미 고양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기 고양이가 어미 고양이 곁에서 배를 깔고 누웠다. 얌전한 두 마리의 고양이를 향해 가볼게요,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양이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잠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우리는 종종 이야기를 발화하면서 스스로 위로받고는 한다.
전세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집주인과 이사 날짜를 협의했다. 다음 작품에서 조명이라도 잡아 보지 않겠냐는 선배들의 제안도 뜸해지다가 완전히 끊겼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곧잘 혼미해졌다. 낮과 밤의 구분이 흐릿해져 갔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담당 교수님이 나를 연구실로 불러냈다. 강의 평가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속해 있던 극단의 창립멤버였으며, 내가 극단을 나가게 된 일을 안타깝게 여겨 품어준 분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연극을 가르칠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칠팔 호흡법 기억하고 있는가?
그건 그가 전파한 일종의 준비운동 같은 것이었기에 제자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사 초 동안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칠 초 동안 숨을 참고, 팔 초 동안 입으로 내뱉는 호흡법이었다.
내가 그 숨을 공부한 게 자네 나이 즈음이거든. 헌책방에서 고서를 고르고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온 거야. 무지렁이 같은 나는 그만 책을 들고 서점을 뛰쳐나갔지. 장례를 치르고 나서라도 그 책을 돌려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어디 간 건지 당최 뵈지 않는 거네. 제목도 기억이 안 나. 그래도 값은 치러야지 싶어 이실직고했다네. 그러자 그 집 할배가 턱 하니 '삼백육십다섯 가지 호흡법'이라는 책을 내주는 거네. 호흡법이 자그마치 삼백육십다섯 가지라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지. 어떻게든 숨만 쉬면 살아지는 줄 알았으니까. 그 책을 들고 돌아가서 공부를 시작했지. 그러다 내게 딱 맞는 호흡법을 발견한 거네. 요를 말하자면 사칠팔은 내 것이야.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정 가져가고 싶으면 사칠만이라도 가져가 봐. 그다음에 팔은 저절로 오는 수가 있거든.
2018년 진주가을문예에 중편소설 「런웨이」가 당선되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 『되겠다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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