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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복제되지 않는다

에세이 선택안함

최이아 2023-11-19

ISBN 979-11-93452-11-0(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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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여러 정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하나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지 않고 여러 목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이동했다’라는 표현입니다.
전 이 문장을 ‘글을 정의로 구속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습작을 시작한 이후 한동안 소재와 배경 테두리에 얽매였습니다.
이 울타리는 누가 쳐 놓은 게 아니라 제가 세운 거였습니다.
그나마 울타리인 게 다행이었습니다.
벽이었으면 지금도 삽으로 땅을 힘차게 파고 있었을 겁니다.
울타리를 내리눌러 밟는 과정의 저를 글에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신, 제게 기회를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계단형 강의실은 건물의 반지하에 있었다. 창이 없어서 불이 꺼지면 암흑 그 자체인 강의실이었다. 답답했지만 자연대 본관에 이보다 큰 강의실은 없어서 전공 필수 과목은 여기서 강의했다. 나중에 신관이 완공되고 나서는 햇빛이 뒤쪽에서 잔잔히 들어오는 계단형 강의실에서 수업했으나 이건 이 장면 발생 시점에서 봤을 땐 미래의 일이었다.

난 여느 때처럼 계단형 강의실의 가장 뒤쪽에 앉았다. 늘 뒤쪽에 모여 앉는 이들이 있었는데 역시나 대개 학업에 큰 관심이 없고 학점은 높지 않은 무리였다. 이 무리 속에 있으면 아늑했기에 졸업은 쉽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날 역시 다른 날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수업 시작 전이었다. 일찍 강의실에 도착한 난 뒷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엉덩이는 등받이에서 떨어트리고 고개는 뒤로 젖혔다.

교실 앞문으로 학생들이 들어왔다. 이들 대부분은 앞에서부터 자리를 채웠다. 화이트보드는 깨끗이 닦여 있었고 내 교재도 하얬다.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내 교재와 달리 낡은 책상은 흠집이 적지 않게 나 있었다. 강의실 위치가 반지하인 터라 눅눅한 냄새도 났다. 손으로 코를 훔쳤다. 그러면서 내 주변에 변하고 있는 건 뭔지 골똘히 생각했다.

교수님이 들어오고 이제 막 강의가 시작되려던 때였다. 닫힌 앞문이 다시 열리더니 학생 몇 명이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이들은 서둘러 비어 있는 앞자리에 앉았다. 그중 제일 앞줄 가운데쯤에 앉은 학생에게서 뭔가 어른거렸다.

젖힌 고개를 바로 세웠다. 엉덩이를 등받이에 가져다 댔다. 눈가에 힘을 줬다.

저 학생에게서 어른거리는 건 분명 빛이었다. 앞서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강의실은 반지하에 있고 창은 없었다. 빛이 벽을 뚫을 수는 없다. 근데 이 학생의 머리 뒤에서는 정말 광채가 동그란 띠를 이루고 있었다. 너무 뻔한 설정을 끌어다 쓰는 거짓말 같아 보인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당시 내 눈에 이 학생은 자체 발광했다.

옆자리에 앉은 학우를 팔꿈치로 쳤다. 학우는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또 한 번 팔꿈치로 이 학우의 팔을 치며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학우는 이번에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심심하면 너나 나가서 놀아라. 나는 이 수업 더 빠지면 안 된다.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니’라고 눈으로 말했다.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 방금 들어온 학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굵은 웨이브가 나 있는 갈색 머릿결 주변 빛의 띠는 방금보다 조도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빛났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저분이야……’

고개를 휙휙 돌렸다. 내 귀에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뭐라고?’

내가 물었다.

‘저……분……이……야.’

이번에는 학우가 내 어깨를 쳤다.

“야, 정신 안 차려?”

학우는 필기가 전혀 없는 내 노트와 교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수업은 다시 들어도 성적이 잘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고 학우는 강조했지만, 당시 내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 같은 말만 귓가에 맴돌았다.

인간에게서 빛이 나는 설정 역시 우리에겐 익숙하다. 그렇다면 영상 콘텐츠를 통해 이뤄진 반복 학습이 도파민 과다 분비와 겹쳐 내 시야에 착시를 일으킨 것이라는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과학적 관점으로는 그 학생이 내뿜는 광자가 급격히 증가했을 수 있다.

사람의 세포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는 에너지를 생성할 때 가시광선을 발생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 가시광선은 사람의 눈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그 학생에게서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미토콘드리아의 에너지 생성이 급격히 증가했고, 이 때문에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빛을 발산했을 수 있다.

사람이 성자에게서 봤다는 후광 현상은 이 둘을 조합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자의 박애가 충만할 때 미토콘드리아는 세포가 쓰는 에너지를 크게 늘린다. 성자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차오른 이는 도파민을 마구 생산한다. 이 두 가지 상황이 맞물리면 평소에는 보지 못할 빛을 감지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건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자연적 현상의 일부라고 해석해야 한다.

인간에게서 빛을 본 일은 그 이후로는 없었다. 그때 경험한 그 영험한 빛은 자연 현상일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재차 경험한 적이 없다는 이유에서 비현실적 장면으로 꼽았다. 난 여전히 그 학생이 내게 빛을 보여준 이유를 찾고 있다.

2023년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제니의 역」으로 우수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웹북 『랩에서 생긴 일』 『당신도 조심하시오』 『푸리앙』 『현실은 복제되지 않는다』 출간 

 

eah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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