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자정이 넘도록 에펠탑 인근의 한 공원에 머물렀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었으나 세상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불그스름하게 물든 노을이 어느덧 옅은 핑크빛으로 물들어갔다. 당시엔 몰랐으나 그날은 파리에 백야가 찾아온 날이었다. 황홀한 백야와는 대조적으로 내 귓가에 들려온 말로 인해 나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이 소설은 그날의 백야를 배경으로 쓴 것이다.
소설을 다 쓰고 보니 당시 내가 들었던 그 한마디 말로부터 이 소설이 잉태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의식적인 지원을 받은 것처럼 각별한 애정과 열정으로 쓴 글이다. 이제 그들을 떠나보내려 한다. 빛과 어둠의 대립 구도 속에서 고통을 겪은 그들이지만, 이젠 빛도 어둠도 없는 시공간에서 안식하기를 빈다. 삼차원 세상의 온갖 환상과 세뇌로부터 벗어난 삶, 무색무취한 대자유의 고요 속에서 너와 나의 분별이 소멸된 하나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를.
벽에 걸린 새틴 소재의 빨간 드레스가 바람결에 하늘거린다. 전날의 검붉은 허물을 모조리 벗은 드레스는 햇빛을 받아 선홍빛으로 빛난다. 퍼프 셔링이 잡힌 소매, V자로 깊게 파인 넥 라인, 허리를 잡아 주는 밴딩, 슬림한 스커트 라인. 드레스는 매혹적인 붉은 자태로 방안을 사로잡는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두 팔을 앞으로 뻗는다.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벽에 고정된 옷걸이에서 빨간 드레스를 내려 팔에 걸친다. 그리고 화장대 거울 앞으로 가 선다. 드레스 지퍼를 아래로 내린다. 지퍼를 따라 양쪽으로 축 늘어진 허리밴드 속으로 한쪽 다리를 집어넣는다. 다른 쪽 다리도 마저 넣는다. 허리까지 올려 양팔을 각각 팔소매에 끼워 넣는다. 팔을 한껏 뒤로 돌려 지퍼를 잡고 위로 끝까지 올린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다시 화장대 앞에 선다. 거울 속에는 또 다른 내가 보인다.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처음 접하는 그 모습이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사이즈는 몸에 잘 맞았지만 아무리 봐도 낯설다.
-넌, 빨강이 어울리지 않아.
거울에다 대고 이렇게 말한다.
-넌, 빨강이 어울리지 않아.
그러자 거울 속의 또 다른 나도 똑같은 말을 한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머쓱한 마음에 드레스를 벗기 위해 지퍼를 내리려던 순간 찰카닥, 현관 밖에서 누군가 열쇠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엘리베이터 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누구인가. 곧이어 문이 활짝 열리고 현관 안으로 하영이 들어선다. 슬리퍼를 벗은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다 자신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웹북 『데스밸리 판타지』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 『푸에고 로사』 『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 『데니의 얼음동굴』 『내 소설의 비밀병기: 활자카메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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