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배는 폭력이 아니라 일상의 언어로 다가온다.
“넌 빨강이 어울리지 않아”라는 문장처럼.
때리지 않는다. 가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래 반복될 뿐인데 결국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나는 빨강이 가진 위력에 ‘그루밍’, 그 결과에 ‘세뇌’라는 이름을 붙여보고 싶었다.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오래 자신을 길들여왔던 한 문장을 떠올리게 하기를 바란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왔던, 혹은 그렇게 들어왔던 색 하나쯤은 기어이 걸쳐볼 수 있을 테니까.
벽에 걸린 새틴 소재의 빨간 드레스가 바람결에 하늘거린다. 전날의 검붉은 허물을 모조리 벗은 드레스는 햇빛을 받아 선홍빛으로 빛난다. 퍼프 셔링이 잡힌 소매, V자로 깊게 파인 넥 라인, 허리를 잡아 주는 밴딩, 슬림한 스커트 라인. 드레스는 매혹적인 붉은 자태로 방안을 사로잡는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두 팔을 앞으로 뻗는다.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벽에 고정된 옷걸이에서 빨간 드레스를 내려 팔에 걸친다. 그리고 화장대 거울 앞으로 가 선다. 드레스 지퍼를 아래로 내린다. 지퍼를 따라 양쪽으로 축 늘어진 허리밴드 속으로 한쪽 다리를 집어넣는다. 다른 쪽 다리도 마저 넣는다. 허리까지 올려 양팔을 각각 팔소매에 끼워 넣는다. 팔을 한껏 뒤로 돌려 지퍼를 잡고 위로 끝까지 올린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다시 화장대 앞에 선다. 거울 속에는 또 다른 내가 보인다.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처음 접하는 그 모습이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사이즈는 몸에 잘 맞았지만 아무리 봐도 낯설다.
-넌, 빨강이 어울리지 않아.
거울에다 대고 이렇게 말한다.
-넌, 빨강이 어울리지 않아.
그러자 거울 속의 또 다른 나도 똑같은 말을 한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머쓱한 마음에 드레스를 벗기 위해 지퍼를 내리려던 순간 찰카닥, 현관 밖에서 누군가 열쇠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엘리베이터 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누구인가. 곧이어 문이 활짝 열리고 현관 안으로 하영이 들어선다. 슬리퍼를 벗은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다 자신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2024『스토리코스모스 소설선 002』(공저) 출간
2026 에디터픽 시리즈01 /소설집『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출간
웹북 『데스밸리 판타지』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 『푸에고 로사』 『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 『데니의 얼음동굴』 『나는 이것을 색(色)이라 부를 수 없다』『사평(沙平)』『마망』『내 소설의 비밀병기: 활자카메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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