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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의 얼음동굴

소설 단편

이시경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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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사랑의 온기에 대해 많이 생각해왔다. 사람과 사람 간에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존재하고 관계에서 조성되는 상대적인 온도 차도 존재한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 혹은 마음이 차가운 사람이라는 말은 어쩌면 그처럼 보이지 않는 관계의 온도 차를 실제 반영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 소설은 그러한 가설로부터 비롯되었다.

전 지구적으로 기후변화가 극심하다. 지구의 생래적 환경 조건이 한순간 뒤바뀌는 것은 단 1도라는 온도 차에 불과하다. 여러 차례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치는 동안 만남 자체가 불가능했던 더운 지방의 네안데르탈인과 추운 지방의 데니소바인이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한 이종교배를 통한 인류의 기원설이 최근 페보의 연구에 의해 사실로 밝혀지고 그 연구의 업적으로 그는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모든 통념과 상식이 한순간 뒤바뀐 것이다.

이 소설은 내 삶에 존재할지도 모를 사랑의 온기를 찾아가는 여정과 다름없다.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 산간지대의 한 동굴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고, 거기서 만난 인류 최초의 혼혈 데니를 통해 기억과 사랑의 온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인류학적 탐사의 결과를 소설적 서사로 엮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그 작업을 통해 나는 우리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기억의 연대, 사랑의 온기에 대해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열 수 있었다.

서로 다르게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데 필요한 온도 차는 단 1도, 그 온도 차 때문에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21세기이다.

얼마 후 자작나무 군락을 지나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듬성듬성 늘어선 자작나무들 사이로 차갑게 응달진 땅이 보였다. 그런데 그늘진 땅 위에 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데 빠직 얼음 밟히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니 바닥에 붙은 작은 얼음덩어리가 보였다. 뭘까,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흠칫 놀라게 되었다.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산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살아생전 점프하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은 것이다. 뒷다리는 땅에 붙이고 잔가지처럼 가느다란 앞다리는 하늘을 향해 활짝 벌린 채 그것은 허공에 고스란히 얼어붙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응달진 곳의 실체가 드러났다. 산 채로 꽁꽁 얼어붙은 생명은 비단 청개구리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생명이 온통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 차갑게 얼어 있었다. 몸통 전체가 통째 얼음으로 뒤덮인 새, 네 다리로 걸어가던 동작 그대로 뿔까지 얼어붙은 순록, 강인한 줄무늬의 호랑이, 잿빛 털의 여우까지.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두 다리를 후들거렸다. 데니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데니의 말에 의하면, 응달진 구역에서 얼어 죽은 생명들은 숲의 정령이 전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거나, 숲의 정령의 뜻을 거역한 채 허락도 없이 숲에 들어갔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경우라고 했다.

사실 데니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숲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얼지 않는 호수가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은 호수였는데, 풍요의 호수(바이칼 호수, 타타르어로 바이쿨/풍요를 뜻함)라 불리는 곳이었다. 풍요의 호수는 대지의 여신이 주관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의 저장소였다. 대지의 여신은 가장 인자하면서도 단호한 성품인 숲의 정령, 즉 자기 맏딸에게 이 호수를 지키는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삶과 죽음에 관한 기억들이 풍요의 호수에서 물의 입자로 전환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모든 생명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죽음이 임박한 순간이 찾아오면 저절로 이 숲을 찾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연유로 인해 이곳은 아무에게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숲의 정령의 뜻을 무시한 채 숲에 들어가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런 생명들에게는 풍요의 호수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 차가운 얼음덩어리가 되어 영원히 응달진 숲에 박제되는 것이었다.

데니는 엄마가 자신을 떠난 이후 엄마를 찾아 이 호수까지 발길이 닿았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숲의 정령은 데니의 출입만큼은 아무 조건 없이 허락해 주었다. 데니는 자신이 바람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서 그런 거 같다고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숲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이르렀다. 뻥 뚫린 하늘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거대한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잔한 물결이 이는 호수는 황홀한 에메랄드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풍요의 호수에 이르자 비로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근방을 둘러보다 적당한 크기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한동안 숨을 고른 뒤 우린 대화를 나누었다.

“데니. 그런데 굳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가 있어?”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웹북 『데스밸리 판타지』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 『푸에고 로사』 『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 『데니의 얼음동굴』 『내 소설의 비밀병기: 활자카메라』​ 출간​ 

 

sky_i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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