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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에 대해 우리가 했던 말

소설 단편

이소정 2024-11-03

ISBN 979-11-93452-79-0(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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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현진건문학상 추천작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랑을 대충 할 수 없듯 사랑 이야기도 대충 쓸 수 없어 꾸역꾸역 시간을 보냈다. 막상 쓰고 보니 사랑이 무섭고 두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됐다. 날씨에 관한 이야기가 됐다.

임수정의 사랑은 언제나 수정 가능한 변수이고 임수용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상수, 절대적인 수용이다. 그 교집합에는 두려움이 있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일, 그건 언제나 유예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언제고 끝나고 말.

동시에 사랑의 대상은 언제나 절대적이다. 그러기에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초라하고 비루한 현실과 계급, 시간뿐일지도 모른다. 찰스 부코스키의 시에서처럼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다.

그래서 날씨가 중요했다. 모든 비가 생성과 성숙, 소멸의 단계를 거치듯 관계의 속성에 대해 말할 수 있어 좋았다.

“봄비는 쌀비야. 많이 오면 가을에 곳간이 그득 찬다는.”

좋은 날씨만 계속되는 날도 나쁜 날씨만 계속되는 날도 없다.
계절처럼 사랑은 가고 온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자신이 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임수용은 몇 달은 일을 했고 몇 달은 임수정의 집에서 빈둥거렸다. 낼 수 있을 땐 생활비를 냈고 없을 땐 내지 않았다. 같이 밥을 먹고 티브이를 봤지만 임수정은 애인이나 동거인은 아닌 것처럼 굴었다. 그럼에도 첫날 임수정과 임수용은 섹스를 시도했다.

옷을 벗고 누워 임수정은 생각했다. 임수용과 섹스를 하면 어떨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누굴 닮을까? 언제 있을지 모를 정규직 심사를 기다리는 마당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제정신인가 싶으면서도 나무토막처럼 딱딱한 임수용의 몸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어떤 접지 부분을 더듬고 싶은 생각을 그전에는 왜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까 궁금했고 임수용이, 임수용이란 존재가, 임수용의 세계가 미칠 듯이 궁금했다.

임수용은 임수정의 희고 둥근 모든 부분을 만졌다. 이마와 눈두덩, 양 볼과 인중, 어깨와 가슴, 둔부와 치골, 천천히 내려가 무릎과 종아리까지. 허벅지를 쓰다듬을 때 임수정은 움찔거렸다. 어릴 적 교통사고로 다친 수술 상처가 떠올라서였다. 임수용은 그런 임수정의 생각을 읽은 듯 혀로 천천히 상처를 핥았다. 이끼처럼 습하고 미끄러운 감각이 느껴졌고 임수정은 대일 밴드를 붙인 것처럼 안심하며 그곳을 기억할 것 같았다. 어떤 상처는 상처가 아니라 상처가 치유되는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임수용이 이제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나 들어가?”

임수정은 아직이라고 말하고 임수용의 손금이나 미간의 주름, 관절의 접지 부분을 접어둔 페이지처럼 펼쳐보는 상상을 했다. 지느러미처럼 부드러운 주름을 만들며 임수용의 몸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게 가능할까. 따뜻한 물속에 잠겨 평화롭고 고요하게,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가능할까. 그렇게 임수용의 세상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까. 지금이 그 타이밍이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라고 해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직……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임수용이 조용히 돌아눕자 임수정은 마음이 이상하게 뜨겁고 눅눅해서 스콜이 지나간 한낮의 대기처럼 자신을 감싸는 것 같았다.


*

한 달 후 임수정은 곧 유학을 간다는 경연지원팀 직원과는 섹스를 했지만 여전히 임수용과는 하지 않았다.

울산 언양 출생

202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앨리스 증후군」당선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밸런스 게임」당선

 

pistacho10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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