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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沙平)

소설 단편

이시경 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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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오염되면, 그곳의 모래도, 생명도 모두 오염된다. 사평이 오염되기 이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순연한 황금빛 모래가 빛나는, 그곳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썼다.

*

한강은 옛날 '사평'(沙平), '사리'(沙里)로 불린 적이 있다. (…) '사평'과 '사리'는 '서울'의 원형인 '서벌' 또는 '서라벌'과 같은 형태의 말임을 알게 된다. (…) '사평', '사리', '활리' 등은 '삶'을 뜻하는 우리말을 적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한겨레칼럼 【땅이름】 한강과 사평/허재영/2008/01.02)

눈을 뜨자 빨간 두 눈동자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슬까슬한 털의 감촉이 내 뺨에 닿았다. 나는 빨간 눈동자를 보고도 움직이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자 빨간 눈동자가 사라지며 기괴한 웃음소리가 터져올랐다.

까르르 깔깔, 깔깔깔.

나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이없게도 작고 새하얀 토끼 한 마리가 내 옆에서 배를 잡고 나뒹굴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토끼의 두 귀 윗부분이 삼분의 일 가량 뭉툭하게 잘려있었다. 비단 잘린 부분은 귀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가지런히 내민 두 팔과 땅을 디딘 두 발도 여러 군데 잘려있었다. 새하얀 털 사이로, 검정 낙인처럼 무언가에 찍힌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여긴 어디지? 또 넌 누구고?

-나? 깔깔. 보고도 모른다고? 난 래빗이라 불리는 토끼지.

-래빗이 토끼인 건 알지. 어떻게 토끼가 말을 할 수가 있냐는 거야.

-깔깔. 카페에다 글도 쓰는걸? 내가 바로 아이디 래빗이거든.

-네가…… 그 래빗?

순간 나는 카페에서 읽었던 게시글을 떠올렸다.

-당근이지! 완전 감동 먹었어. 내 글에 이렇게 공감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거든. 그 자장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설마……

-나도 신기해. 내 글이 이 정도로 파동을 일으켜 누군가를 불러올 줄은 몰랐어. 그게 공명의 힘이겠지.

-근데 네 귀는 왜 잘려있고 네 몸은 왜 이렇게 상한 거야?

-까르르, 깔깔.

내 말에 래빗은 또다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런, 저런. 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구나. 그렇게 수도 없이 수업 시간에 맘대로 날 써 먹어놓고선 말이지, 응?

-내가 널 써먹었다고?

-마지막 수업 때 고전시가 별주부전 다뤘잖아. 기억 안 나?

-아, 그랬지.

-킬러문항! 수능 기출 국어 B형, 아? A형이었나? 암튼. 40번 문항!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2024 종이책『스토리코스모스 소설선 002』​(공저) 출간​​

웹북 『데스밸리 판타지』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 『푸에고 로사』 『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 『데니의 얼음동굴』 『나는 이것을 색(色)이라 부를 수 없다』『사평(沙平)』​​『내 소설의 비밀병기: 활자카메라』​ 출간​ 

 

sky_i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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