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오염되면, 그곳의 모래도, 생명도 모두 오염된다. 사평이 오염되기 이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순연한 황금빛 모래가 빛나는, 그곳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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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옛날 '사평'(沙平), '사리'(沙里)로 불린 적이 있다. (…) '사평'과 '사리'는 '서울'의 원형인 '서벌' 또는 '서라벌'과 같은 형태의 말임을 알게 된다. (…) '사평', '사리', '활리' 등은 '삶'을 뜻하는 우리말을 적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한겨레칼럼 【땅이름】 한강과 사평/허재영/2008/01.02)
눈을 뜨자 빨간 두 눈동자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슬까슬한 털의 감촉이 내 뺨에 닿았다. 나는 빨간 눈동자를 보고도 움직이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자 빨간 눈동자가 사라지며 기괴한 웃음소리가 터져올랐다.
까르르 깔깔, 깔깔깔.
나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이없게도 작고 새하얀 토끼 한 마리가 내 옆에서 배를 잡고 나뒹굴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토끼의 두 귀 윗부분이 삼분의 일 가량 뭉툭하게 잘려있었다. 비단 잘린 부분은 귀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가지런히 내민 두 팔과 땅을 디딘 두 발도 여러 군데 잘려있었다. 새하얀 털 사이로, 검정 낙인처럼 무언가에 찍힌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여긴 어디지? 또 넌 누구고?
-나? 깔깔. 보고도 모른다고? 난 래빗이라 불리는 토끼지.
-래빗이 토끼인 건 알지. 어떻게 토끼가 말을 할 수가 있냐는 거야.
-깔깔. 카페에다 글도 쓰는걸? 내가 바로 아이디 래빗이거든.
-네가…… 그 래빗?
순간 나는 카페에서 읽었던 게시글을 떠올렸다.
-당근이지! 완전 감동 먹었어. 내 글에 이렇게 공감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거든. 그 자장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설마……
-나도 신기해. 내 글이 이 정도로 파동을 일으켜 누군가를 불러올 줄은 몰랐어. 그게 공명의 힘이겠지.
-근데 네 귀는 왜 잘려있고 네 몸은 왜 이렇게 상한 거야?
-까르르, 깔깔.
내 말에 래빗은 또다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런, 저런. 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구나. 그렇게 수도 없이 수업 시간에 맘대로 날 써 먹어놓고선 말이지, 응?
-내가 널 써먹었다고?
-마지막 수업 때 고전시가 별주부전 다뤘잖아. 기억 안 나?
-아, 그랬지.
-킬러문항! 수능 기출 국어 B형, 아? A형이었나? 암튼. 40번 문항!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2024 종이책『스토리코스모스 소설선 002』(공저) 출간
웹북 『데스밸리 판타지』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 『푸에고 로사』 『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 『데니의 얼음동굴』 『나는 이것을 색(色)이라 부를 수 없다』『사평(沙平)』『내 소설의 비밀병기: 활자카메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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