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 후 한참 시간이 흘러,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분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유난히 좋아하셨던 엄마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아픈 이별의 순간이 오고, 또 아픈 삶의 순간이 오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삶을 지탱시켜 주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엄마 대신 소설 한 편이 나에게 남았다.
엄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생전에 만성신부전증과 파킨슨병, 가벼운 알츠하이머, 그리고 우울증 등을 앓았다. 나는 엄마를 보기 위해 한 달에 두 번 그녀가 좋아하는 과일들을 사서 요양병원에 갔다. 가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엄마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
내가 신림동에 반지하 원룸을 얻었던 그해 겨울, 엄마가 우울증으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는 보증금이 없는 방을 찾았고, 마침내 나는 보증금이 없는, 대학동 버스정류장에서 5분쯤 걸어가면 나오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 골목길을 10분쯤 걸어 올라간 곳에 자리한 한 원룸 건물의 방 한 칸을 계약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신림동의 한 반지하 원룸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기 전 왼쪽에는 화장품 가게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삼겹살을 파는 식당이 있었다. 언덕을 천천히 올라가면 한식부페를 파는 고시촌 식당들이 몇 개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개인이 운영하는 커피전문점이 여러 개 있었으며, 편의점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언덕을 10분쯤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골목길이 작게 나 있는데 그 길의 외딴 모퉁이에 내가 사는 원룸 건물이 있었다. 원룸 건물의 바로 오른쪽 골목에는 중화요리집도 있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집 앞 중화요리집에서 짜장면이나 볶음밥을 먹기도 하고, 커피전문점에서 함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집 바로 맞은편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나는 가끔 그곳에서 김밥이나 생수, 라면, 편의점 도시락 등을 사서 집에 들어가곤 했다. 보증금 없이 월세 25만 원으로 운 좋게 싼 방을 얻었던 나는, 공용세탁기를 써야 하는 번거로움을 제외하고는 별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싼 방은 그런 불편함을 커버하고도 남았다.
함께 살기 시작한 후 석 달 정도는 엄마가 직접 국을 끓이고 밥도 했다. 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날은 엄마가 설거지를 도와주곤 했다. 엄마는 파킨슨병으로 인해 근육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직장생활을 하느라 힘든 나를 위해 애써 가사일을 돕던 엄마는 거동이 점점 불편해졌고, 걷는 것도 힘들어질 정도로 증상이 나빠졌다. 엄마는 결국 집안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 위에 누워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미안하다. 엄마가 이젠 설거지도 못 할 것 같아. 직장 생활하느라 힘든데 집안일까지 너 혼자 다 어떻게 하니. 힘들어서 어떻게 해.”
가사일을 돕지 못할 만큼 건강이 나빠지자 엄마는 나에게 미안한 목소리로 힘없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엄마를 위로했으나, 엄마는 힘이 없었고, 눈빛이 슬퍼 보였다.
가사 일에서 손을 떼면서 엄마는 손가락까지 점점 굳어져서 젓가락을 사용하지 못해 숟가락만으로 밥을 먹었고, 그래서 엄마는 중화요리집에서 외식할 때 짜장면 대신 볶음밥을 선택하곤 했다.
“젓가락질이 힘들어서 면을 먹을 수가 없어.”
생각해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젓가락질을 잘 못 하는 엄마에게 짜장면을 직접 먹여준 일이 없었다. 짜장면뿐만 아니라 내가 엄마에게 단 한 번이라도 직접 음식을 먹여준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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