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은 되도록 쓰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하나는 작가인 내가 주인공인 소설, 또 하나는 종교와 관련된 소설. 그런 글이 별로거나 부적절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위험을 부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나와 무관한 소설을 썼고, 그걸 작가의 미덕으로 여겼다. 덕분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구효서 작가의 「깡통 따개가 없는 마을」, 이승우 작가의 「너희가 신처럼」을 읽은 후 내가 주인공으로 나서며 종교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소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이야기는 내 삶의 전반부에 걸친 테마와 연결돼 있어 더 늦기 전에 도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이 시기의 일들을 곱씹고 곱씹어 되풀이할 테니까.
가끔 미래가 현재를 구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새운 밤들도, 이 소설의 사건도 누군가 그런 일이 있도록 정해둔 것 같다. 내 인생도, 내가 쓴 소설도 그저 주어진 거라면 선택은 한 가지, 연기를 위해 나의 배역을 연기하는 것뿐이다.
“나는 내 얘기는 안 써. 내 소설은 전부 남들 얘기야.”
내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갑자기 게이가 되거나, 귀신에게 홀려 고생하기도 하고, 돈을 들고 사라진 전 여친을 뒤쫓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게이도 귀신을 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넉넉하지도 않다. 전부 남의 사연을 소설로 각색한 글이다. 물론 허락을 구한 뒤에.
“작가들의 글은 다 자기 이야기 아냐?”
희수의 질문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적어도 나는 아니야. 나는 개인사는 안 쓰거든.”
“왜? 그게 소설가의 금기 같은 거야?”
“아니야. 그냥 어려워서 그래. 사건을 만들려면 인물의 동기와 행동 유인을 알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잘 모르겠거든. 너도 그럴걸? 죽기 전에 무엇을 가장 후회할지 알고 있어?”
희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르지.”
“남의 사연은 쉬워. 이미 완성된 삶과 경험, 욕망을 서사 구조에 맞춰 조립하면 그만이야. 부족한 점은 적당히 지어내도 상관없지. 어차피 소설은 가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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