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생존, 관계 회피라는 심리적 층위를
밀도 있게 구축한 내면 중심의 감각적 리얼리즘.
트라우마 이후의 삶을 ‘살아남음’이 아니라
‘지속되는 흔들림’으로 형상화한 밀도 높은 소설.
“너를 넘어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생존 이후의 삶을 지속되는 불안정성의 구조로 사유하며,
동시대적 고립의 형식을 정교하게 구현한 작품.
내 속의 그녀를 하나 꺼낸다. 먼지가 잔뜩 묻은 그녀가 제 얘기를 해준다. 나는 듣고만 있다. 멍하게. 공감과 불가해, 위로를 나누며 그녀가 나를 떠난다.
외롭고 싶은 사람은 없다. 홀로 남은 이의 머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른 말들을 상상한다. 기대 없이 기댔던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지,
떠나간 빈자리가 주는 상실이 얼마나 큰지 감도 잡을 수 없는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보낸다.
지원은 내가 잠든 사이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다며 사과를 요구하는 당찬 문장들에 실소한다. 서로 실수한 셈 치고 사과는 접어두자, 썼다가 지운다.
-바다에 갈 거야.
그녀에게서 답장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십 분의 일도 못 하면서 곁에 두고 싶지 않다, 내 말은 푸름이가 잘 받아주고 있다, 그러니 너는 필요 없다, 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아직 인정머리라는 게 남아 있으니까.
가만 있다가 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낸다.
-사람에게 기대지 마. 버릴 수 있는 것에만 기대. 사람에게 기대는 게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빨리 알아채길 바라.
지원은 이제 단단하게 걷는다. 어깨를 펴고 등을 꼿꼿하게 세운다. 바닥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지, 바닥을 오래 바라보면 처박힌다는 사실을 잊었다. 당당한 뒷모습으로 기를 죽이는 그녀가 자꾸 나에 대해 모른 척하고 자신과 같은 선에 올려두는 것이 부담스럽다. 나는 그녀와 같은 계단을 올라가는 게 아니다.
지원은 여전히 메시지에 답이 없다. 나는 스마트폰을 뒤집고 다시 잠이 든다.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쓰고 옆으로 돌아눕는다. 흐릿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일어난다. 옆방이 아니다. 나는 이불을 둘러쓰고 일어나 문을 연다. 문 앞에 사무를 보는 총무가 나를 보고는 코를 감싸 쥔다.
“살아 있었어요?”
당황한 목소리에 되레 눈을 찡그린다. 복도의 어두운 형광등에 눈이 부셔 도로 눈을 감는다. 무릎이 꺾이는 나를 잡는 그는 정신 차리라며 문을 활짝 연다.
총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