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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서사

선택안함

김지헌 2021-07-21

ISBN 979-11-9201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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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시집을 출간했다. 다섯 번째 시집이지만 다섯 번째에 방점을 두는 일은 왠지 편치 않다. 시집 속의 문장과 시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 온전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지 아님 엉거주춤 자리를 못 잡고 기죽어 있는지 두렵기 때문이다.

노트북 안의 미완성 작품을 가지를 쳐내고 단정하게 다듬다 보면 애초에 가졌던 생각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와 전혀 다른 의도로 나가 버릴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한쪽에 밀쳐두거나 과감하게 휴지통에 버린다. 이렇게 해서 묶어내는 데도 시집이 완성되어 내 앞에 당도하면 만족스러움 보다는 부끄럽고 민망 할 때가 더 많다.

가끔은 나를 통과해 선택 되지 못하고 버려진 언어들이 직관으로 달려오기도 한다. 그럴 때 또한 반갑게 끌어당겨 도자기를 빚듯 시 한편 완성할 때도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내가 부르면 예컨대 언어가, 또는 사물이 다소곳 내 앞에 와서 마음껏 부려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한 밤중 홀로 깨어 있을 때 누군가를 호명하듯 밤새 친구 먹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는 것, 뒤란의 노각나무까지 불러들여 한 편 먹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것.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내 삶의 중심이다.

강화도로 이주해서 새로 생긴 습관 중 하나가 혼자 영화 보러가는 것이다. 38석의 작은 예술 영화관은 어느새 나의 벗이 되어 있다. 관객이 2명밖에 없어도 극장 주인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영화도 올려준다. 엄중한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별로 아쉬운 게 없다.
집 건축을 시작했다. 나무 몇 그루 심고 텃밭도 가꾸어야지. 층간 소음 신경 쓸 것 없이 늘 음악이 흐르도록 할 것이다. 비 오는 날 꽃과 나무들이 흠씬 목 축이는 거 보며 한없이 멍 때리거나 미뤄두었던 책을 실컷 읽을 것이다.

서울이 조금 멀어졌다는 핑계로, 그리고 펜데믹 상황이라는 이유로 경조사나 모임 등도 적당히 둘러대고 작은 마당을 가꾸거나 영화를 보러 가거나 그것도 시시 해질 때 노트북 앞에 앉아 시집을 읽고 흩어져 있던 언어를 불러들인다.

늦가을 마른 잎 같은
물기 없는 나를 새장 안에 가둔 채
몇 시간째 책을 읽고 있는 중
좀처럼 책장은 넘어 가지 않고
글자들은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
내가 나를 읽는 밤
하루는 지루한데 한 달은 늘 꼬리만 보인다
그사이 어린 나무는 나이테를 부풀려간다
어린 나무 자라는 속도만큼 나는 낡아 가고

충남 강경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학 졸업
1997년 『현대시학』등단. 『배롱나무 사원』 『심장을 가졌다』 외 3권
<미네르바문학상> 수상
현,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kimj28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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