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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걷고 싶다고 말할 때

소설 단편

방성식 2026-08-23

ISBN 979-11-24893-05-0(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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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픽 포인트

패션을 매개로 정체성, 욕망, 알고리즘, 소비, 그리고 존재의 기생 관계를 탐구하는 현대적 호러소설. 패션 자체가 아니라 ‘옷이 인간을 입는다’는 역전된 은유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면서 상당한 문학적 독창성과 잠재력을 과시한다. 취향이 인간을 소비하는 시대, 공포의 근원이 귀신이 아니라 취향이라는 점에서 허상이 되어버린 21세기적 존재의 본질을 되짚어보게 하는 문제작이다.

작가의 말에 쓰기엔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빈티지 옷과 패션에 꽤나 미쳐 있는 사람이다. 그냥 옷을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빈티지 버버리를 사기 위해 런던 여행을 계획하기도 하고, 쉬는 날에는 후루기(古着)숍을 뒤져 시세보다 싸게 나온 매물을 찾아 전당포에 되팔기도 하는. 그러니까 내가 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진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옷을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처럼 쌓인 옷 무덤에서 프라다와 디올, 아미와 랄프로렌 같은 브랜드 옷을 골라내다 보면 마치 지하 몇 백 미터 아래에서 금을 찾은 광부가 된 것처럼 강렬한 쾌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인간의 몸은 무작위에 의한 보상을 얻었을 때 마약과 비슷한 성분의 호르몬을 분비한다는데, 나 역시 딱히 옷이 필요하거나 계절이 바뀔 때가 아닌데도 습관적으로 옷가게에 가는 걸 보면 좋은 옷 그 자체보다는 돈이 되는 명품 빈티지를 찾는 행위 자체에 중독된 것이 아닌가 싶다.

패션이라는 산업의 경이로운 점은 단순히 예쁜 옷을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입지도 않을 옷을 사야 한다고 당위를 찾게 만드는 기술이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기본템, 근본템, 하나 사두면 평생 입는 옷,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진짜 부자들만 입는 명품, FW 뜨는 패션 지는 패션 등의 호들갑 덕분에 나 또한 적지 않게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다. 이러다 조만간 글 쓰는 일을 접어두고 옷가게를 차리는 인생4막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옷이든 글이든 소비자의 욕망을 비추는 건 같으니 모쪼록 기호에 맞게 선택해주시길 바란다.

아, 구매 전에 알아둬야 할 점이 있다. 이번 글은 패션과 호러를 결합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나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준은 나를 숨 막히게 좁은 탈의실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샤넬 수석 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는 디올의 슬림 진을 입기 위해 40Kg을 감량했어요. 그분이 1930년대 생이니 그 당시에도 최소한 예순은 넘었을 거예요. 우리도 본받아야겠죠?”

별수 없다. 나는 신축성이라고는 없는 스키니 진에 가을무처럼 살찐 다리를 구겨 넣었다. 억지로 허벅지를 들이밀고 지퍼를 올리자 하반신이 진공 포장되는 것처럼 압박되기 시작했다.

“거봐요. 아주 죽여주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중년인 내가 젓가락처럼 달라붙는 바지에 헐렁한 록 티셔츠를 입으니 예술혼이나 저항 정신은커녕 나잇값 못하고 젊은 척하는 홍대병 환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준은 지독하리만치 진지한 눈으로 내 옷차림을 둘러보더니 킬킬킬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때요. 사람이 좀 변한 것 같지 않나요? 성공한 록스타들처럼 건들건들 몸이 리듬을 타고 자신도 모르게 모델처럼 삐딱하게 서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밤은 막 끝까지 가보고 싶고?”

“전혀요. 거기가 쪼여서 무지하게 창피한데요.”

내가 다리 사이를 가리자, 준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 억지로 내 손을 치우게 했다.

“시선은 시련입니다. 이 옷은 선물이고요. 대신 지금 착장 그대로 집까지 돌아가는 겁니다.”

“이걸 입고 전철을 타라고요?”

농담이 아니었다. 준은 웃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목을 쭉 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무조건 그를 믿고 따르겠다며 공수표를 날린 업보 때문에 자발적인 창피를 당해야 했다.

전철 안은 지옥이었다. 하필 주말 밤이라 객차는 밖에서 놀고 돌아가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전철 구석자리에 앉아 집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볼 생각이었지만, 중간에 한 무리의 노인들이 타는 통에 허리가 반으로 굽은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나의 툭 튀어나온 하반신을 보자 맞은편에 서 있던 커플이 입을 가리며 큭큭대기 시작했다. 내게 자리를 양보받은 할머니조차 남자는 거기에 땀 차면 사내 구실 못한다며 잔소리를 시전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못 들은 척 세상과 나 사이를 가르는 투명한 벽을 상상하며 눈물을 참았다.

집에 도착해 바지를 찢어발기듯 벗어던지자 허벅지에 뱀 비늘처럼 남은 피딱지가 보였다. 거칠거칠한 데님 소재 때문에 허벅지 안의 연약한 살이 쓸리면서 생긴 일종의 찰과상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익명 계정을 만들었다. 준의 채널에 악플이라도 박아야 잠이 올 것 같았다.

그런데 준의 채널이 이상했다. 메인 페이지는 텅 비어 있었고, 댓글창도 전부 막혀 있었다. 영상 탭을 누르자 어제까지 분명 있었던 이백 개가 넘는 영상 목록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장르소설집 『남친을 화분에 담는 방법』, 여행 에세이 『냉정한 여행』 출간 

웹북 『현관이 사라진 방』 『채찍들의 축제』 『이별의 미래』『만년필에 대하여』『셸터』​『러브체어를 찾아서』​ 출간

 

linktr.ee/bbangaa

qkdrntlr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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