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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에 대하여

에세이 선택안함

방성식 2023-10-22

ISBN 979-11-93452-04-2(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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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받은 질문이 있다.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개인적이고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난해하기까지 한 질문이었다. 답변 자체도 막막했지만, 고작 등단 반년 차인 초보자가 답변할 만한 주제인지도 의문이었다. 한 문단을 쓰려면 온종일을 쏟아부어야 하는 나에게 작가로서의 삶이나 성취에 대한 구상은 언감생심이나 다름없다. 대답하기 전에 질문을 약간 바꿔야 했다.
‘어째서 나는 살고 있는가?’

조지 오웰이 말하길, 자서전이 신뢰를 주려면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밝혀야만 한단다. 본인의 과오와 미숙함에 대해 고백하는 한편, 자화자찬이나 자기 미화 같은 낯부끄러운 짓은 멈춰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자서전을 쓰는데 적합한 인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서른 넘도록 별로 자랑할 것도 없고, 과거를 돌아보면 전부 도중에 그만두거나 포기했던 것들뿐이다. 나를 사랑하는 친지들에게 상처와 곤란을 주기도 했다. 상황과 배경 탓이 아닌 오로지 나의 교만으로 인한 잘못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로 인한 환시와 환청, 타인에 대한 멸시와 그것들이 불러낸 인간적인 면의 결락에 대해 최대한 가감 없이적어 보기로 했다.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는데, 한때는 나에게 죽음을 요구하던 것들이 지금은 위협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스스로 부족함을 드러내려고 시작한 글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가서는 살아가는 이유를 되새길 수 있었다. 헤매던 와중에 찾은 약간의 위로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는 책을 들여다보는 당신과 재회한다. 작가는 무엇으로 사느냐는 당신의 질문에 나는 상징으로 남은 만년필을 제시한다. 잉크가 흘러가는 작은 통로에 불과한 공간이 나를 작가로서 살아가게 하는 기준점이 된다. 당신은 그곳에서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채 당신 곁에 있는 나라는 작가를.

노트북이나 키보드 따위는 없었다. 구겨진 공책과 약간의 먼지, 귀퉁이가 깨진 만년필 한 자루만 배낭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라미에서 나온 플라스틱 펜으로, 수동으로 잉크를 보충할 필요 없이 카트리지만 갈면 되는 단순한 구조였다. 겉모습만 보면 만년필 같지도 않은 투박한 형태였지만, 한편으로는 필기구로서의 본질에 집중한 심플함이기도 했다.

덕분에 하루에도 두세 권씩 공책을 낭비할 수 있었다. 잉크가 맺혀 축축해진 종이는 시도 소설도 에세이도 되지 못한 깜지처럼 보였고, 그 안에 담긴 문장들은 비문조차 걸러내지 못한 엉터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나는 하염없는 배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일종의 트랜스 상태였던 것 같다. 무엇을 쓰는지도 모르는 채, 나를 침범하려는 힘을 문장의 형태로 새겨 넣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툭하면 펜촉이 부러져 만년필을 다시 샀지만, 이전처럼 서운하거나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라미는 본래부터 그런 제품이다. 저렴한 가격에 부담 없이 쓰다가 버리는 펜,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구하는 펜, 만년필이라는 의식보단 실용적인 기능에 집중한 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산품 따위가 무너져가는 나 대신에 희생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안색이 나빠졌다. 지인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백혈병과 암, 당뇨 같은 무서운 질병을 에둘러 말했다. 건강검진을 받아보라는 당부에 “그런 심각한 질병은 아니야. 사실은 우울증에 걸렸거든.”이라고 고백하긴 어려웠다. 허전한 속을 털어놓고 싶었던 나는 오랜만에 외조부의 절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대략 칠 년 만의 방문이었다.

산은 유년 시절 그대로였지만, 스님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노인이 되셨다. 깔끔하게 면도한 머리 탓에 연세를 짐작하긴 어려웠지만, 내가 중학생일 적에 이미 할머니라 불렸으니 지금은 일흔이 넘은 고령일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목소리엔 여전히 힘이 넘치셨고, 눈빛도 흐리지 않아 정정해 보이셨다. 스님은 그동안의 사연을 들어주셨다. 앞뒤와 인과를 잘라먹은 감정적 토로에 흐느낌과 분노, 욕설까지 쏟아냈지만, 중간에 되묻거나 재촉하지 않으셨다. 담담하게 경청하신 다음 선문답을 던지셨다.

“얻은 걸 버리고 난 뒤에 무엇이 남으셨나요?”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장르소설집 『남친을 화분에 담는 방법』, 여행 에세이 『냉정한 여행』 출간 

웹북 『현관이 사라진 방』 『채찍들의 축제』 『이별의 미래』 『만년필에 대하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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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kdrntlr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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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1 담백하지만 다양한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글 수륙챙챙 202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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