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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현재로 만드는 장인의 솜씨

유안 20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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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소설을 쓰겠다고 덤비는 시기이다. 앞으로의 소설 영역은 어디로까지 확장이 되는 걸까? 문득 나는 '고유성'에 대해 떠올렸으며 그것은 한국적 소설의 원형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늘 궁금했던 점은, 왜 한국적 이야기의 흐름에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 소위 ‘단절된 공백’처럼 여겨지는 시기가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별다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고, 늘 갈증만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엄창석 작가의 소설 두 편, <해시계>와 <비늘천장>을 만났고, <비늘천장> 작가의 말에서 그 질문에 대한 첫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탈로 칼비노, 오르한 파묵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옛것을 소재로 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한국의 작가’이니만큼 우리 옛것으로 된 소설 한 권쯤은 가져야겠지, 하고 생각했다. 다만, 소설문학이 서양 근대의 산물이라서 그들의 작품은 여전히 근대성을 구가할 수 있었던 반면에 우리의 옛날은 근대적이지 않아 소설문학과 어울리기 힘들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근대 이전의 이야기를 현대의 문제로 끌고 와서 작품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소설 구상에 있어서, 미래 소설도 어렵지만 과거 소설은 다른 차원으로 어려운 것 같다. 비유를 들자면, 미래 소설이 새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라면, 과거 소설은 이미 살고 있는 집을 다시 세팅하는 것과 유사하달까. 

 

과거 소설을 쓸 때, 소재 추출까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한 차례 세팅된 바 있는 요소들을 어떻게 하면 낯설고 새롭게 세팅할 수 있을까. 방대한 배경지식뿐만 아니라 시대적 감각, 언어적 감각, 기타 등등.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해시계>는 그런 점에서 과거를 소재로 하지만 현재적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더 이상 과거의 시점에 한정되지 않는다. 낯선 차원으로 접근하여, 과거, 현재, 미래로 한정되는 시공간이 아닌, 소설 속에서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시공간이 구축된 것 같다. 그러하기에,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적용되는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부분은 주제적 의미였다. 솔직히 첫 부분에선 과거 배경이 자세히 묘사되므로, 단순히 과거가 배경인 역사 소설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적 경로를 따라가다 보니 작품 속에 ‘어마무시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것은 평소 내가 가져온 궁금증인, 한국적 이야기의 원형에 대해, 일견 첫 해갈이 되는 지점이 되었다. 

 

아, 이런 소재를 이렇게 소설화할 수도 있는 거구나!

 

값진 소설을 만난 기분에 정말 기쁘다. 작가는 ‘한국의 작가’가 되기 위해 단편 7편을 계획한다고 한다. 그 첫 번 째 작품이 <해시계>이며, 두 번째 작품이 <비늘 천장>이다. 작가의 언급대로, 꼭 <해시계>를 먼저 읽기를 추천한다. 조만간 <비늘 천장>도 읽고 리뷰를 올릴 예정이다.

 

과거로 불리는 시간의 지층을 앞장서 탐사하고, 그곳에 묻힌 소중한 이야기 원석을 현재에 맞게 재가공하여, 이야기의 스펙트럼을 활짝 열어준 작가에게 감사의 뜻 전한다. 곧 나머지 다섯 편도 만나게 되길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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