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와 야가, 혹은 바바야가의 슬픈 사랑 이야기
여기,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한 존재가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의 존재성 안에 둘 혹은 셋으로, 그 존재성이 달라지기도 한다. 바로 끝도 없이 펼쳐진 눈의 평원, 러시아 슬라브 족의 민담에 등장하는 바바 야가이다. 바바는 할머니, 야가는 마녀 혹은 마귀할멈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바바 야가는 마녀를 통칭하지만 때론 바바와 야가를 따로 분리해서 둘 이상의 마녀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바 야가는 유럽의 마녀들과는 달리 빗자루가 아닌 절구통을 타고 다니며, 커다란 닭다리가 달린 집(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닭다리 달린 성의 모티브라고 함)에 살며, 아이를 잡아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바바 야가가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외모 때문에 남들로부터 놀림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바바 야가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숲속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화이트리스>에서 다루는 소재는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만의 독특한 이야기 세공법을 통해서, 이 소설은 어디서도 접해보지 못한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로 변모한다.
‘바바와 야가’이거나, 혹은, ‘바바야가’이거나.
이 소설에는 바바와 야가로 불리는 두 존재가 등장한다. 장소적인 배경은 서울이며, 그들이 사는 곳은 불안정한 거주 공간이다. 흔한 사랑 이야기이다. 그런데 잘나가는 사랑이라면 소설의소재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프니까, 이야기가 되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내재했을 것이다.
그런 바바와 야가의 사랑 이야기가 투명하고도 슬프게 와 닿았다.
한번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묘하게 독자를 매료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러시아 마녀가 걸어놓은 주문에 걸려든 것처럼,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다른 빛깔로 와 닿는다. 첨엔 바바와 야가라는 두 존재의 이야기로, 그 다음엔 바바야가라는 한 존재의 이야기로, 또 뒤돌아서면 실제 바바야가라는 마녀의 이야기로 계속 진화를 거듭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솔 작가님의 ‘절묘한’ 심사평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순수 문학이지만 판타지성이 극대화된 작품처럼 와 닿았다. 그로 인해 주인공의 감정이 원석 그대로 투명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아픈 것을 있는 그대로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절제함이 좋게 와 닿았다.
다만, 그러한 절제함이 때론 문장에서의 결락으로 작용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재차 읽다보니 오히려 그러한 결락들 또한 이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이야기의 판타지성을 자극하여, 이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요소로 작용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사뭇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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