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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추스르는 여정에 대하여

김유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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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을 보고 홀린 듯 읽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의 삶이 권태롭고 지루하다면, 불안하고 정처 없어서 어떤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내 글을 읽어 달라."

 

 이 소설을 보면 권태롭고 불안하고 정처 없는 나의 의식으로부터 잠시라도 떠날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이 소설은 주인공을 따라 잠시 여행할 수 있도록 한다.

 주인공은 죄책감을 안고 스페인에 다녀온다. 분명 다녀온 이야기인데, 그 의식을 따라 독자도 함께 여행하게 만드는 필력이었다. 집에 있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과거로 자연스럽게 장면 이동한다. 그래서 그 부분을 특히 여러 번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인식조차 못 할 정도의 자연스러움이었다. 회상인데 어느새 장면이 펼쳐진다. 앞서 관련 회상을 떠올리고 대사 하나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회상을 현재 장면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딘가 에세이 같던 글이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회상을 회상으로만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부드러운 장면 전환으로 이야기를 전해듣는 느낌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듯한, 현장성이 살아나는 지점이라 좋다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집에 와서는 스페인 생각을, 반대로 스페인에서의 주인공은 스페인에 몸이 있지만 어딘가 과거에서 허덕이는 모양새인데,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과정이 전혀 지리멸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름대로 생각한 이유는 주인공의 사유 과정이 이별에 대해서 가볍게도 무겁게도 이야기하며 결국 '죽음'에 다다르는 그 중심이 있어서, 라고 보았다.


 주인공인 나는 최악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위로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더 이상 최악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괜찮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 주인공인데도,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하는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정처가 분명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의 직면이다. 불가항력으로 발생한 불행의 죄책감을 한 인간이 어떻게 직면할 수 있는가. 작가는 이 문제를 관조적으로 써 내려가기 보다는 독자가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여러번 읽다 보니, 주인공의 말이 마치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좋았다. 죄책감을 감당하기 힘들어 여정을 떠난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며, 유려한 일인칭 사용으로 독자가 그 여정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 독자와 주인공의 거리가 가깝다 못해 밀착되는 점이라 생각한다.


 "오래전에 나는 외로움에 빠져 일상이 흔들릴 만큼 허우적거린 적이 있었다. 외롭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 본문 중

 

 이 소설을 읽으며, 울컥하고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엇인가 때때로 느껴졌다. 그것은 결국 주인공의 캐릭터와 상황에 부합하면서도, 다수의 독자가 느낄 보편적 감성이 드러난 문장 덕분으로 보인다. 그래서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문장을 남발하지 않나, 반성했다. 어떤 작품을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마력은 결국 문장의 깊이에 있는 게 아닐까.


 "어디서부터 거짓이고, 진실인지 말할 수 없겠지만, 한번쯤은 털어놓고 싶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해도." - 본문 중

 가까운 이에게 아픔을 말하기 어려울 때, 오히려 낯선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픔을 털어 놓을 때의 심정. 그리고 타인에게 털어 놓기가 죄책감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지만 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말. 이 소설은 한 사람이 자기를 추스르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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