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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릅아줌마 이야기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김유 202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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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이 남다른 것은 무엇보다 현장감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두릅아줌마 이야기>의 인물들은 마치 현실에 있는 것 같다. 극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실제로 곁에 있는 인물 같은 생생함과 친근함이 있다. 그 이유는 인물에 대해 지리멸렬한 설명 없이 간단명료하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각 인물에 대한 설정 덕분이다. 간략하게 몇 문장으로도 각 인물을 명확하게 독자에게 인지시키는데, 단편 소설 안에 여러 명의 배경이 나오는데도 전혀 헷갈리지 않는다. 

 나, 어머니, 두릅아줌마, 그녀의 남편, 큰딸, 아버지, 이야기에 들어가면 두릅아줌마의 어린 시절 할머니, 그녀의 남편과 함께 이인조 심마니를 한 사람. 이렇듯 무척 많다. 그러나 모든 인물이 읽으며 쉽게 각인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 쓰기 전에 완벽히 만들어 놓아야 가능하지 않나 싶다. 작가에게 각 인물의 비하인드를 물어본다고 해도 다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인물과 인물이 가진 배경은 현실적이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잘 '만들어졌다'기보다 보편적으로 있을 법하다. 다 읽고 나면 분명 존재했던, 하는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소설 속에서 톱니바퀴 맞물리듯 유기적 결합을 맺으며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 덕분에 살아가고. 그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이 소설은 그 와중에 색다르고 각별하다. 전혀 단순하지 않고, 뻔하지 않다. 뻔한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걸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주인공과 소재 덕분이 크다. 

 특히 주인공의 인류애 넘치는 성격은 독자에게 호감을 주면서도 독특함을 지닌다. 우리는 주인공 같은 오지라퍼, 혹은 정체불명의 이타심을 가진 이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하며, 실제로도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 세상에 분명 존재하는 이들이며(나도 비슷한 성향이다(?)), 그런 성향이 두릅아줌마의 서사와 맞물려 작위성을 소멸시키고, 주인공과 두릅아줌마가 서로에게 가졌던 신비로운 인류애적 체험을 독자에게 선사하고 납득하게 한다. 게다가 그것을 엄마라는 인물을 한 번 더 거쳐서 보여준다. 이 소설이 비슷한 주제의 소설 중 특히 세련되며 문학적인 지점이 이것이다. 

 독자가 의미를 알기 어렵게 숨겨둔 소설도 많을테지만, 이렇게 우회적으로, 마치 크루아상처럼 겹겹이 쌓았음에도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여 소설이 끝날 때는 직관적으로 깊은 감동을 준다. 문학적이면서도 독자에게 친절하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소설가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 두릅아줌마가 두릅을 따게 된 과정, 모습에서 두릅아줌마의 마음을 대리 체험할 수 있다. 소설 전반에 감정과 관련된 언급 없이 모든 인물의 마음을 독자가 느낄 수 있다. '두릅을 따는 아줌마'라는 소재와 그녀에게 '신발'을 선물한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며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구성으로 색다른 재미를 준다. 

 

 비슷한 분량의 단편 소설인데도 유독 풍성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도 그러하다. 소설을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는 많겠지만, 작가의 전작도 그렇고 <두릅아줌마 이야기>가 그러한 것은 고심하여 썼음이 분명한 색다르면서도 알맞은 어휘 덕분이다. 흙감태기, 울력, 예지랑날. 이와 같은 어휘들이 소설의 정겨운 분위기를 더해주며, 활자 예술인 소설로서의 가치도 높여준다.

 사투리 억양 섞인 대사가 재밌기도 하지만 장면 자체가 재미있는 요소도 많았다. 병원에 있는 두릅아줌마에게 엄마가 하는 말이나, 그들이 '머리 대학'이라는 미용실 '동기'라는 것 등. 맛깔나고 정겨운 요소가 소설 곳곳에 있다. 어떻게 보면 슬픔으로 뭉뚱그리는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이야기는 전혀 단순하게 처리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작가가 가진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며,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심정을 작가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관하여 이 소설은 교본과 같다.

 

 엄마와 두릅아줌마, 두릅아줌마와 그녀의 아들과 나. 두릅아줌마의 남편과 주인공의 아버지, 이 모든 관계를 단편 안에 쌓으면서도 전혀 헷갈리지 않고, 모든 인물이 소설 속에서 명확한 기능을 하며 유기성을 가진 끝에 감동을 준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독자에게 와닿는 모든 게 자연스럽다. 

 이 소설은 일인칭 시점인데, 주인공은 신발을 두릅아줌마에게 왜 선물한지 모른다. 끝까지 그걸 모르는데, 독자는 왜 줬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독자는 주인공이 어떤 마음으로 신발을 선물 했는지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인칭 시점인데도 정작 주인공은 기억도 잘 안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신발을 선물한 그 마음에 대하여. 또 두릅아줌마가 주인공이 환하게 보였던 걸 엄마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당사자인 주인공은 길에서 두릅아줌마를 만났던 일화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설명할 수 없는 걸 독자는 알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독자는 주인공이 신발을 선물한 마음과, 두릅아줌마가 주인공이 환하게 빛나는 게 왜 그렇게 보였는지 알 수 있다. 주인공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걸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화자 설정, 주인공의 일인칭 시점이 좋게 다가왔다. 독자는 알지만 정작 주인공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감동이 배가 된다.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걸 이렇게 쓸 수 있는 게 바로 문학이구나 싶었다. 작가가 이룬 성과가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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