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솔직히 첫 문장부터 좀 막히는 지점이 있었다. 몰입이 안 된다라기 보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소 소설에 진입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의문점을 갖고 소설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부족하나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시점의 문제와 연결되어 보인다.
팔월 극장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흔히 접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과는 사뭇 결이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일인칭 주인공으로서 기능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 밖에서 비춰지는 카메라 감독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첫 문장에 진입할 때 가져야 할 시선은, 흔한 일인칭 시점보다 한참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게 맞을 듯싶다. 읽는 독자가 시선을 주인공에 맞추기보다, 한발 물러나 소설 밖에서 소설을 비추는 (보이지 않는)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는 효과는, 철저한 객관성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토록 철저하게 객관성을 계산하고 유지하려 했을까?
부족하나마, 나름 짐작해 보기로는 아마도 그것이 주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사실, 자살이라는 소재는 다소 무겁고 어두운 주제이다. 자칫 거리두기가 실패할 경우, 대책 없는 감상에 빠지거나, 밑도 끝도 없이 독자를 끌어내릴지 모른다.
그런데 팔월극장에서는 그런 면에서, 시점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관성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중이다.
그렇게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소설이 비추는 장면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작동되기 시작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의 시놉시스와도 같다. 마치 영화를 보듯 각 장면을 따라가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샐러리맨 장면이 가장 좋았다.
샐러리맨 장면은 마치, 사형수가 집행 직전에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어진 유예의 시간, 주인공은 샐러리맨 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가방에 든 수면제와 내면에 계획된 자살이 그 순간만큼은 사라지고 없다. 주인공은 찰나의 희망을 누린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는 윤희를 만나기 직전에 안경 렌즈를 교체하는데, 그것은 삶에 대한 시선이 본격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처럼 작가가 군데군데 심어놓은 떡밥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적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팔월 극장이라는 메타포도 좋았다. 이것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확장되어 보편성을 갖는다. 이처럼 아픈 시대적 상황을 담아내면서도 치우침이 없다. 시점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주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또한 주제를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 단편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좋은 작품이었다.
부족하지만, 리뷰를 적어본다. 좋은 작품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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