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되는 무언가가 아닌, 과정 그 자체로 사유하는 인생과 우주:
‘스토리코스모스’라는 비밀
1. 읽는 이보다 쓰는 이가 더 많은 시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깜빡한 이들이 많겠으나, 우리는 무척 흥미롭고도 괴이한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의 발명과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은 SNS, 유튜브, 네이버 블로그, 브런치 등 수많은 개인 플랫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내 멋대로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세계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너도 작가, 나도 작가, 옆집 아저씨도 작가이다.
누군가는 지금을 나르시시즘 전성시대라 부를 수도 있다. 검증도 거치지 않은, 틀린 맞춤법에, 비문, 오문으로 가득한 글이 찬사를 받는다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혹은 21세기 디지털 세상 속 이야기의 데이터가 너무 많이 쌓여, ‘상투적’의 범위가 넓어져, 조금 투박하지만, 개성 있는 개인적 이야기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세상이 왔는지도 모른다. 마음의 우울과 심적 가난, 애정 결핍 등, 깊어진 개인의 힘듦과 표출 욕구 역시 이 현상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겠다. 자기의 것을 쓰는 행위는 어쨌든, 마음의 치유에 근접해 있다.
이런 글쓰기 홍수 시대는 수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우선 가짜가 진짜가 되기도, 진짜가 가짜가 되기도 한다는 것.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하여, 이 인터넷 세계 속 믿을 만한 공신력 따위는 없다. SNS 속 개인의 목소리가 역으로 공중파 뉴스, 혹은 유명 포털의 메인을 장식하는 일도 빈번하다. 수준 이하의 글이 버젓이 책이 되어 교보문고에 진열되기도 한다. 100만 원 주고 책을 자가 출판한 뒤, ‘책 출간’만으로 강연을 펼치고 다니는 책기꾼도 생겼다. 또한 종이책과 글쓰기 전선의 최후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문학은 자기들 권위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독자와의 소통은 배제한 채, 작가와 작가 지망생끼리 서로의 일기장만 훔쳐보고 있는 꼴이다.
자못 개판인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공신력의 부재가 21세기에는 자연스럽다 한다면, 이 개판이 개인의 자유이며, 아픈 이들의 치유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문제를 제기하고픈 마음이 없다. 화두를 던지고 싶지 않다. 내가 안 읽으면 그만이니까.
‘내가 안 읽으면 그만이니까,’라는 귀결이 이 리뷰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이유이다.
읽는 이보다 쓰는 이가 더 많아진 시대가 쓰는 이의 증가로만 이어진다면, 이 현상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나, 이 증가는 독서 인구의 감소와 동행한다. 대표적으로 필자가 그렇다. 읽을거리는 많아졌지만, 제대로 쓰는 이가 없다 여겨진다. 좋은 글인 줄 알고 구매 후, ‘속았다’ 생각하며 집어던진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글쓰기 홍수와 공신력의 부재, 자의식 과잉 작가들로 인한 소통의 단절은 소비자의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소비자인 필자가 오랜 시간 피부로 느낀 점이다. 쓰는 이만 늘고, 읽는 이는 없어진 세상, 이런 공급 과잉은 종국에 ‘독서’라는 삶의 가장 귀중한 요소의 멸종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듣는 이는 없고, 소리치는 이만 가득한 세상. 독서의 종말은 곧 문화의 종말을 의미하며, 나는 그게 조금 무섭다.
따라서 이 개판을 소비자, 독자의 입장에서 탐구하고 정리할 필요성을 은연중에 감지하고 있었다. 감지만 했다. 가설은 위에 적었듯 다양하니까. 다양하기에, 또 그 목소리 하나하나 모두 그럴듯하기에, 쉬운 문제가 아니니까.
나는 이 본질에 대한 이해에 쭉 목말랐고, 역행적 구조의 탐구를 원했다. 참신한, 신선한 그런 담론의 소설. 이 현상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중심을 잡아 화두를 던지는, 또 그에 대한 해소의 씨앗이 담긴 소설을 원했다. 그렇게 수없이 헤매다가, 마침내 찾게 되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리뷰를 쓴다. 책을 만난 곳은 교보문고가 아니다. yes24나 알라딘도 아니다. 독립책방도 아니다. 우연히 만난 소설집을 통해 찾게 된,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이라는 플랫폼에서였다.
박상우 소설가의 <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단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작가인 세상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위로한다. 그러면서 세상은 원래 작가로, 이야기로 이루어졌다는 역행적 구조로 거대담론을 제시한다.
2. 쓰는 이의 심리
<비밀문장>은 문필우라는 어느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이다. 모나미 출판사 직원인 필우는 서른이 되기 전까지 작가가 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결심한 인물로, 유미주의(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는) 성향이 강하다. 문필우는 자신의 ‘쓰는 이’로서의 결심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변명도 없다. 그저 ‘그래야만 한다’고 자각했다 서술한다.
문필우가 서른이 되는 시점에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니, 자살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써니마저 <제로>라는 의문의 소설을 남기고 필우를 떠난다. 완전한 혈혈단신이 된 필우는 서서히 삶의 끝을 준비한다.
그런 문필우의 앞에 문필수라는 학교 선배가 나타난다. 그는 등단 후 다섯 편의 단편을 발표한 뒤, 잠적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필우는 책 출판 회유라는 상사의 종용에 그를 만난다. ‘영혼이 없는 사람,’ 필수를 보고, 필우는 그런 인상을 받는다.
물론 곧 생을 마감할 필우에게 그를 종용할 마음은 없다. 다만 잠적한 소설가인 문필수가 궁금했을 뿐. 문필수는 후배로서 필우를 대한다. 소설이 그저 소통의 도구라는, 소설가의 길은 죽으려 환장한 인간의 길이라는 문필수의 소설론에, 유미주의적 성향 필우은 동의하지 못한다. 욕지거리를 뱉기도 한다. 필우에게 소설은 신이며, 종교이다.
선배 문필수는 그런 필우를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쓰기’에 사로잡힌 후배를 이해한다. 그러면서 소설 속 큰 역할을 하는 니체 마운틴 위 ‘초인의 집’을 넘겨줄 것을 제안한다. 그곳에서 좋은 글을 많이 쓰라며.
초인의 집은 낮은 산 정상의 공기 좋은 것에 자리한 주택이다.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필수 역시, 선배에게 대대로 물려받은 공간이다. 문필수는 네팔로 떠나 히말라야 등반가들을 돕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준비하고 있다.
필우는 ‘초인의 집’ 제의를 승낙한다. 허나 필우는 그 공간이 사라지듯, 증발하듯 ‘죽기 좋기에’ 승낙한 것뿐이다. 필우는 이미 자기 운명을 자각했다. 그는 서른이 되었다. 죽어야만 한다. 거대한 에고를 가진, 의연한 캐릭터이다.
그렇게 죽기로 한 날, 비가 내린다. 필우의 죽음을 막으려는 듯이. 허나 필우는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다. 폭우와 안개로 도로에 멈춘 택시에서 내려, 목을 매달기 위해 초인의 집으로 향한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산에 오른 필우. 그곳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기이한 에너지. 또 인지되는, 입력되는 어떠한 느낌. 열다섯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인간도, 귀신도 아닌 에너지체가 필우 앞에 있다. ‘쿄쿄... 쿄쿄..’
자살을 향해 가는 작가 지망생의 모습이 애달프다. 그 젊은 나이에 왜 꼭 그래야만 하나, 왜 작가라는 험한 산길을 선택했나, 그건 도대체 어떤 연유의 운명이란 말인가, 보는 이의 마음이 문드러진다.
소설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필우의 ‘작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자각은 여러 가지 결핍에서 시작되었다. 20대의 필우는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한 채 작가를 지망한다.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 느낀 이유만으로. 그런 운명은 에고에 의해 심어졌다 해석할 수 있겠다. 그 에고의 문제는 소설 초반 써니에 의해 드러난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쓰지는 못하는 필우의 모순. 어쩌면 강제적으로 써야‘만’ 하는, 세상과 홀로 맞장을 떠야‘만’ 하는 게 작가들이다. 가혹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솔직히, 멋지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는 이들에 대한 환상이 남은 독자인가 보다. 그들이 나라의, 이 시대의 지성에 마지않다는 믿음은 여전히 굳건한가 보다.
한국에 문필우는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쓰는 이가 더 많은 시대, 필히, ‘아, 이거 내 이야기인데,’하며 이 소설의 독서를 시작할 쓰는 이가 많으리라 짐작한다.
3. 구원으로서의 창작과 자해로서의 창조-선자들은 어쩌다 자신에게 잡아먹혔나
앞에 소개한 내용은 13부로 나뉜 소설 중, 3부까지에 해당한다. 작가는 속에 작가 지망생의 심리를 더없이 핍진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작가가 절묘하게 펼치는 아이러니는, 필우의 ‘작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자각이 서서히 그의 목을 죈다는 것이다. 또한 필우의 글에 대한 사랑이, 주변 관계, 실제 물질적 사랑, 일 등 다른 소중한 것들의 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일본 근현대 시대 작가들의 이야기를 잠시 덧붙이고 싶다. ‘유미주의’를 표방하던 소설가들. 그들이 하던 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었다. 유미주의 작가들은 문학에 삶을 전부 바쳤고, 그 열정을 통해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허나 그들의 작품이 아닌, 삶으로 렌즈를 넓혀 보면, <비밀문장>의 초반 아이러니와 그대로 겹친다. 대표적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등등, 그들은 모두 직접 생을 마감했다.
소개하고 싶은 것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야기이다. 서른다섯에 음독자살한 아쿠타가와는 강한 자의식으로 인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의 자살 연유는 그가 남긴 몇 편의 미완소설과 수필, 동료 문인들과의 대화로 해석되는데, ‘유미주의’ 성향이 가장 큰 이유로 뽑힌다.
아쿠타가와는 예술을 신처럼 받들며 살았다. 아름다움이 우주의 가장 높은 가치라는 믿음이었다. 그런 그의 성향은 <지옥변> 같은 소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건 20대의 아쿠타가와였다. 30대의 아쿠타가와는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하고, 예쁜 아이들을 낳았다. 가족이란 아쿠타가와의 눈에, 한없이 ‘아름다웠다.’
아쿠타가와는 그 ‘아름다움’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이 자신의 예술론과 대치되며, 완성된 작품들보다 높은 가치라는 사실이 그에게 더없는 허무감을 안겼으리라는 주장이다. 요약하자면, 20대 유미주의 청년 아쿠타가와가 30대 아버지가 된 아쿠타가와를 죽였다는 논리이다.
이 주장은 <비밀문장> 속 스토리 명상의 순환 구조, 그와 중첩된 윤회의 구조로 더욱 세밀히 해석할 수 있는데, 그건 후에 간단히 서술하도록 하겠다.(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근현대 문학 영웅 중 거의 유일하게 병으로 생을 마감한, 6권밖에 쓰지 않은-일본에서는 샌님 이미지로 독자들에게는 인기가 덜한-나쓰메 소세키를 모든 유미주의 소설가들이 소설의 신으로 우러러봤다는 것이다)
쓰기란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를 표출하고 싶은 욕구로 시작하여, 자기구원을 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일정 선을 넘으면, ‘나’를 위협한다. 이런 아이러니의 키워드는 소설을 통해 찾을 수 있다. 바로 ‘에고.’ 소설의 단어를 빌리자면, ‘나’라는 망상자아이다.
필우 앞에 나타난 쿄쿄는 이 에고란 것의 문제를 우주의 순리와 함께 설명한다. 인간은 마리오네트, 인생은 시뮬레이션. 인간에게는 존재, 자아, 영혼이 없고, 다만 퍼스널리티의 하나, 성장의 프로그램이라는 쿄쿄에, 필우는 발끈한다.
쓰는 이들 모두, 독자들 모두 똑같이 발끈할 것이다. 무언가 찾아 헤매는 구도자들도 발끈할 것이다. 내가 그저 인형이라니, 하며.
허나 이런 분노와 불신의 감정마저 작가의 의도 하에 있다고 사료된다. 여기서 작가가 독자들을 도발하면서까지 선명히 하고 싶은 것은 무분별한 에고의 위험성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나를 위한 나.’ 쓰는 자들의 자의식은 본인을 죽이기도 한다. 필우도, 아쿠타가와도. ‘나를 위한 나’는 칼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나’를 벗어날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필우도, 독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쿄쿄는 정연하게 그런 ‘나’라는 의식과 허무에서 벗어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글쓰기를 통해 에고를 없애는 것이다.
그 방법론은 3부와 4부에서 대사로 우선 제시되는데, 이 부분은 정말이지, 많이 어렵다.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전공자가 와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리라.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그 방법론은 이제부터 작가가 ‘메인서사’로 보여주니까.
기억할 것은 단순명료하다. 쿄쿄에게 불신과 분노로 소리소리 지르는 필우가 의아하게도, ‘스토리코스모스’라는 단어에 가슴으로 반응했다는 사실. 그리고 쿄쿄는 어떠한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닌, 과정, 그러니까 ‘스토리’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비밀문장이다. 우주는 존재가 아닌 스토리로 이루어졌다.
4. 일기와 스토리텔링의 차이
쿄쿄와의 만남 이후, 필우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자아가 없다는, 자신은 다만 하나의 퍼스널리티에 지나지 않다는 지각 후, 필우에게 ‘자살’이 너무도 유치한 개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필우는 감정을 배제하고 쿄쿄의 말을 곱씹는다.
그 내부가 무척 복잡하기는 하나, 소설 속 가장 선명한 상징으로 설명하자면, 3차원 세계는 무대, 영계는 세계라는 무대 뒤 대기실이다. 윤회란 하나의 영체로 이루어져 있고, 현생은 영체의 10퍼센트만 쓰는 윤회의 반복이다. 그 반복은, ‘성장’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그러니 현생의 삶이란 완성되는 것이 아닌, 과정 그 자체, 그러니 스토리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필우는 확신하지 못한지만, ‘스토리코스모스’라는 비밀문장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자신의 미션이라 인식한다. 이후에 무척 중요한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이 스토리를 ‘제대로 쓰는’ 것이다. ‘스토리 명상’ 사이클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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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간단해 보이는 사이클이지만, 그 이해가 쉽지 않았다. 필자 역시 이 사이클의 이해를 위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박상우 작가의 에세이를 찾아, 도서관에서 빌려봐야 했다. (그 내용은 다음 챕터에서 이어진다)
필우는 쿄쿄의 도움과 함께 4부부터 7부까지 이 사이클에 도전한다. 그 사이클로 ‘스토리 명상’의 개념을 글로 만든다. 그리고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탄생에 관여한다. 싸한 조력자 신다경 대리와 함께. 여기서 ‘관여’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주인공 필우 역시 자신이 이것을 만들었다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우는 그저 ‘스토리코스모스’와 ‘스토리 명상’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어떠한 ‘느낌’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이 사이클이 얼마나 어렵고도 복잡다단한 일인지는, 소설의 서사에 낱낱이 밝혀져 있다. 극도의 자기 객관화라고 응축해 말할 수 있을 텐데, 이 자기 객관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이다. 스토리 명상 속 바로 보기는 ‘나’의 소멸에 가깝다.
제아무리 어려워도, ‘나’의 소멸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고 쿄쿄는 말한다. 다시 에고의 문제이다.
5. 한국인이 쓴 유일한 작법서
학부생 때 백일장에서 수상을 했거나, 선생님께 글 칭찬을 받아본 이들은 SNS 속 간단한 자기 표출을 넘어, ‘소설’ 혹은 ‘에세이’를 쓰고 싶어 한다. 표출이 표출로만 끝나지 않고, 이야기로 타인과 소통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일기가 아닌, 스토리, 구조를 갖춘 글로써,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어떻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나,’가 많은 이들의 화두가 되었다. 그게 웹소설이든, 본격이든, 장르든, 시나리오든, 글깨나 쓴다는 이들은 하나둘 작법서를 펼치기 시작한다. 텍스트처럼 내려오는 저명한 작법서들이 있다. 스티븐 킹, 데이먼 나이트, 제임스 스콧 벨, 레이먼드 카버 등.
저명한 작법서는 대개 외국 작가의 것이다. 한국에도 작법서가 있지만, 이름도 모르는 작가들, 혹은 문단 경력자들이 구색만 맞춰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웹소설의 경우, 웹소설로 성공 못 한 이들만 작법서를 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한국인이 쓴 작법서 중, 작가로서 성공한 이가 쓴 책은 박상우 소설가의 <소설가>가 유일하다. 1988년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으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고 등단한 박상우 소설가는 1999년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이상문학상 대상까지 수상했다.
간단히 말해, 한국문단의 엘리트코스를 밟아, 소위 ‘순수문학 전업작가’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한 극소수의 소설가 중, 후배들을 위해 작법서를 써준 것은 박상우 소설가가 유일하다는 말이다. 현재는 절판되었지만, 이 작법서는 실전 집필, 창작과 창조의 차이, 작가로서의 마음가짐을 적확히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소설가가 될 수 있나. 이건-<비밀문장> 속 문장을 빌려-말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작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흐름을 빌려 흐르듯 구성된다. 그렇다면 ‘되는가’가 아닌, ‘사는가’로 뒤바꾸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
‘어떻게 소설가로 사는가.’ 소설가로 사는 것. 박상우 소설가는 그 속에서 사이클 하나를 강조하고 있다. 집필뿐만 아니라, 삶에 가닿은 하나의 사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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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대목이다. 박상우 소설가는 자신의 창작론을 그대로 <비밀문장> 속 서사화했다.
5,000만 국민이 전부 작가가 되는 세상, 나 같은 독자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소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허나 대학 교수 자리를 거절하고, 20년 가까이 혈혈단신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박상우 소설가는 <소설가>와 <비밀문장> 속, 그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말하고 있다. <소설가>를 읽고 있으면, 박상우 소설가는 마치 ‘모두 작가’라는 개념을 오래전부터 예견한 듯 보인다.
선자로서 그가 당부하는 것은, 또한 우려하는 것은, <비밀문장>에서 서사적으로 선명해진다. 우리의 주인공 필우에 집중하면 된다. 무분별한 ‘쓰기’와 그것이 쓰는 이를 잡아먹을 뻔한 서사.
일기가 아닌 소설을 쓰고 싶다면,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면, 소통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소통’을 막는 것이 바로, 쿄쿄가 경고하는 에고이다. ‘에고’는 작가의 그늘로 독자와의 소통을 막고, 작품을 망친다. 토카르추크가 말한 ‘서술자의 심리학’이 성립되지 못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막힌 소통 속, 쓰는 이는 이유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비난하게 된다. 왜 다들 내 글을 읽지 않나. 왜 다들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신경쇠약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 구원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구도자들이, 자기가 쓴 글에 다치게 되는 패턴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글을 통한 자기구원의 키는 ‘나’가 아닌 타인과의 ‘소통’에 있다. 그러니, 에고는 작가가 싸워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 방법이 바로 ‘스토리 명상’이자, 박상우 소설가의 창작론이다. 쉽게 이해되는 말은 아니다. 스토리 명상 역시 구조적으로 따지면, 그 복잡함에 눈이 질끈 감길 정도이다. 실은 작법서나 이론서는 대부분 그렇다. ‘이게 뭔 소리야?’ 생각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 복잡함을 조금 더 즐겁게 파헤치기 위해, 다시 <비밀문장> 서사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들의 문필우.
6. 이론이 아닌, 물리적 스토리 명상의 서사
필우는 쿄쿄와 함께 ‘스토리 명상’의 이론적 이해를 끝마쳤다.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필우는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바로 보기, 바로 쓰기 단계를 끝냈다. 그 결과물이 스토리 명상에 대한 정리 글과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탄생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허나 필우는 아직 ‘자신의 글’을 쓰지 못했다. 그의 본래 미션이자, 수많은 ‘쓰는 이’들의 미션일 터이다. 8부부터 11부까지는 필우의 물리적 스토리 명상을 통한 집필에 해당되겠다.
발단은 안시연이라는 인물이다. 유명 배우인 그녀는 스토리 명상을 깨우치고, 자신의 이야기를 스토리코스모스닷컴에 올린 후 자살한다. 부친을 살해한 뒤. 이 사건으로 소설은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이 필우의 의도와 다르게, 법적 사건으로, 한 인간의 죽음으로 전개된 것이다. 또 싸한 느낌을 자꾸만 풍기던 신다경 대리, 자신의 에고와 욕망을 해결하지 못한 그녀는 조력자에서, 악역으로 얼굴을 바꾸게 된다.
<비밀문장>은 지금껏 영적 존재를 앞세운 환상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안시연 사건은 그걸 완전히 뒤엎는, 현실이 환상을 잡아먹는 구조의 흥미로운, 낯선 위기이다. 안시연 사건과 신다경 대리와의 불화는 필우를 현실의 자각 속에 감금시킨다. 동시에 실제로 감금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하던 영상이 남은, 스토리 명상의 원리를 집필한 그가 정신병원(그 정체는 그저 정신병원이 아닌, 더욱 복잡한 어딘가이지만, 이 장면은 소설적 형상화의 중대한 부분이니 직접 읽고 목도하기를 바란다. 또 배우 안시연의 스토리 명상 구조가 기가 막힌데, 이 탐미적인 이야기도 꼭 주의 깊게 읽어보기 바란다)에 갇히는 것이다.
그곳에서 필우는 좌충우돌 위기를 겪은 끝에, 조력자 딥퍼플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마침내 써야만 하는 물리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제야 시작되는 ‘필우의 스토리 명상.’ 필우는 지금껏 써니, 쿄쿄, 신다경 대리, 스토리코스모스닷컴, 감금의 이야기를 그대로 서사화하여 소설로 쓰기로 결심한다. 바로 보기, 바로 쓰기, 다시 보기, 다시 쓰기의 물리적 서사 전개이다.
박상우 소설가는 앞서 소설에서 이론적으로 소개하던 복잡한 원리를 서사에 담아 그대로 재현한다. 이론이 물질적 실재로 이월하는 낯선 기술을 창작한 것이다. 공식과 물리적 시도 사이, 모두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통해 복잡한 이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되겠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낯선 가치를 본 까닭은, 작법서와 자신의 창작 이론을 그대로 서사화시킨 소설가를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박상우 소설가를 포함, 소설가들이 쓴 작법서는 대개 어렵다. 활자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의 한계라고 할까, 천재들의 불가피한 비약이라고 할까. 읽는 이의 대부분은 이론만 놓고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허나 이 소설은 작법서임과 동시에, 이야기이다. 작법의 행위 자체를 그대로 서사화하여, 쓰는 이들에게 보여준다.
쉬운 비유를 찾자면, <비밀문장>은 문제집, <소설가>는 해설서인 셈이다.
7. 모두가 작가인 세상-스토리코스모스
필우는 소설 집필을 끝마치고, 감금에서 벗어난다. 등단도 하게 된다. 보통의 메타소설은 이즈음에서 결말을 맺는다. 허나 <비밀문장>은 다르다. 작가는 ‘완성된 것은 없다’를 확실히 한다.
필우는 여전히 혈혈단신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등단은 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없다. 사랑도, 가족도, 일도.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다시 스토리 명상이다. 문필우는 앞으로도 스토리 명상을 지속해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아픈 자기 인식과 에고의 해체, 그리고 다시 보기, 또 다시 쓰기.
필우는 작가로서의 스토리 명상을 단 하나 끝냈을 뿐이다. 아직 미션은 주야장천 남았다. 스토리는 계속된다. <비밀문장> 소설 서사에 한정해 말하자면,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다시 보기, 다시 쓰기’가 남았다. 필우가 감금된 600일 동안 신다경과 모나미 출판사는 스토리코스모스를 빼앗아 키웠다. 필우는 그것을 되찾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필우에게 찾아온 인식은, ‘모두 작가’라는 것이다. 또한 반강제적으로 쓴, ‘소설은 모두 허구다’라는 문장.
필우의 ‘스토리코스모스’ 미션에 대한 스토리는 앞서 나왔던 문필수, 써니, 신다경 대리, 딥퍼플 등의 인물들이 회수됨과 동시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허나 이 ‘대단원’은 주가 아니다. <비밀문장>의 중심 마무리는 ‘문필우’라는 인간의 계속될 스토리의 흐름이다. 소설가이자,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 문필우. 결말이란 상투적인 말은 이 소설에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완성’이 아닌, ‘과정’에 있으니까.
<비밀문장>이 무척이나 신선한 소설인 또 다른 이유는, 마지막의 작가 개입에 있다. 박상우 소설가는 직접 소설에 등장하기를 자처한다. 무척이나 도발적인 시도로, 창작자로서 겁이 날 법도 한 상황인데, 작가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 근원은 필우가 하나의 ‘스토리’라는 것으로 끝을 내야만 했던 작가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이 소설은 어쩌면 어느 결말을 맺어도,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제시하고자 하는 담론과 메시지가 이미 그러하다. 작가는 ‘완성’에 그 어떤 의의도 두지 않았으니까. 그런 결말을 위한 묘수가 12부 속 써니의 ‘건너뛰기’ 개념이고, 그와 이어지는-13부, 의도적으로 인과를 배제한-작가와 주인공과의 만남이다.
박상우 소설가는 끝까지 독자들과 소통한다. 마음껏 쓰라고, 마음껏 살라고, 당신의 배역을 즐기라고, 자기 스토리를 펼치라고, ‘주인공은 너라고.’ 그리고 문필우도, 써니도, 박상우 소설가의 스토리마저도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소설 속 스토리코스모스닷컴마저 그렇다. 내가 <비밀문장>을 읽은 곳이 바로, storycosmos.com 플랫폼이다. <비밀문장> 속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의 스토리도 현재 진행형임을, ‘지금’임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절묘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8. 어쨌든 써야 한다면
서두에 밝혔듯, 이 리뷰는, ‘내가 안 읽으면 그만이니까’하는 나의 에고로부터 출발했다. 이 에고로 인한 불소통이 수많은 문제의 시발임을,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무섭게 인지했다. 그리고 그 단절과 맞서는 것은 이렇게 소통하는 것뿐임을 인정했다.
읽는 이보다 쓰는 이가 더 많은 시대는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우주는 스토리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완성되는 것이 아닌, 그저 과정들로 가득한 그런 곳. 21세기 인터넷 세계가 그 내면 구조를 선명히 수면 위로 올린 것뿐이다.
스토리 명상(글쓰기이자, 삶)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반복 지속될 것이다. 허나 그 과정으로 우주가 이루어졌다는 ‘스토리코스모스’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소통을 통해 쓰는 이들도, 읽는 이들도 조금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내 것’과 ‘타인의 것’이 다름없다는 것을 깨우친다면, 더욱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원활히 서로 소통한다면, 글쓰기 홍수 시대에 하나의 방주가 태어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스토리를 가졌다. 무언가 쓰고, 완성하고 싶은 욕구, 이따금 과잉되기도 하는 자의식을 가지지 않은 이는 없다. 허나 그 스토리 과정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그 순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완성에만 몰두하는 일은, 죽음을 완성하려는 노력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또한 그런 에고로 완성된 글은, 나 같은 독자, 혹은 미래의 작가 자신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죽으려 작정한 인간의 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떠한 성공이든, 완성이든 쟁취한다고 해도, 순환의 원리 속 칼날은 언젠가 자신을 향할 터이다. 문필우와 다르게 아버지로서의 ‘나’를 견디지 못한 아쿠타가와처럼.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는 절대 틀린 문장이 아니다. 허나 <비밀문장> 소설을 읽은 후에, 인간은 씨앗임과 동시에, 방대한 우주임을, 스토리 그 자체임을 이해한다면, 앞으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자기 목소리는 다르게 자기 귀에 닿을 것이다. 그게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나는 독서 후 독자로서, 문필우처럼 쓰는 모두를 응원하게 됐다. 써야‘만’ 하는, 죽으려 작정한 길을 기꺼이 자처한 그들을-문필우라는 주인공과 내적 친밀감이 가득한 지금-제대로 존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쓰는 이들은 여전히 시대의 지성이다. 또한 죽으려 작정하고 가는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의 길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순고하고도 순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모두의 이야기가 다시 궁금해졌다.
한국의 수많은 문필우들에게는,
‘빨리빨리 한국인은 소설을 읽지 않는다,’ ‘요즘 시대에 누가 글을 읽나.’
이런 말은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거짓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 싶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 웹소설, 여러 수준 이하 일본 로맨스 작가들의 글이 10-20대들 사이 붐을 일으킨 것만 봐도, 그 사실은 명확해진다. 또 최소한 나는 독자로서 쭉 문학을 읽어 왔고, 앞으로도 읽을 것이라는 진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니, 제대로 써달라. 독자와 소통해달라. 이런 하잘것없는, 그 어떤 공신력도 없는 리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멋진 글을 보여달라. 에고로 인해 당신의 소중한 목소리가 파묻히는 것을 피해달라. 몇십 권이든, 몇백 권이든, 구매해 읽어 줄 테니.
그 키는 소통과 과정에 대한 집중이며, 방법은 <비밀문장> 소설 속 낱낱이, 흥미진진하게 서사로 펼쳐져 있다. 그러니 조금 어렵더라도 읽어 보시기를 당부드린다. 독자든, 작가든, 소통과 스토리란 것의 이해를 위해. 어렵다면 나처럼 도서관에서라도 <소설가>를 구해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그럼 모두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가능한 무언가는 아픈 비밀이 아니다. 다만 모든 과정 자체를 응원하는 따스한 위로이다. 그 가능한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작가의 문장을 빌린다.
뜻하는 대로 펼쳐지는 우주
뜻하는 대로 펼쳐지는 사랑
뜻하는 대로 펼쳐지는 당신
판타 레이, 스토리코스모스!
그대의 삶은 이미 그대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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