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
전지적 ‘실직 경험자’ 시점으로 작성한 리뷰임을 먼저 밝혀 둡니다. 소설을 얼마간 오독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그 오독 덕에 이 작품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용케도 영어로 된 노랫말을 다 외우는 어느 팝송 리스너처럼요.
「예비공간」을 읽으며 오래전 제 실직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재취업 기간 동안 외출도 잘 안 하고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했었습니다. 그때 『변신』을 다시 봤습니다. 고등학생 때 ‘세계 명작 필독서’라는 이유로 어거지로 완독한 이후 첫 재독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고 출근 준비를 하려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해 있다, 그래서 자기 방 안에 갇혀 버린다, 동거하는 식구들이 문자 그대로 그를 ‘벌레 취급’ 한다는 설정. 세계 명작 필독서라서 억지로 읽었던 시점엔 느끼지 못했던 압도적 몰입감에 책을 쥔 양손이 후들거렸습니다.
‘이거 내 얘기네?’
재취업에 고전 중인 실직자. 이 사회에 아무 쓰임이 없는 무직, 무소득. 하루아침에 사람에서 벌레로 변해 버린 존재.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 #세계명작 #필독서 #카프카 같은 해시태그를 다 걷어내고 오로지 ‘이야기’ 자체에 완전히 몰두한 읽기 체험. 실직 후 정독한 『변신』은 제게 큰 위로였습니다.(역시나 카프카 본인도 직장 생활을 하며 소설을 썼다고 하지요.)
「예비공간」의 ‘예비공간’이 그 시절 저의 작은 방,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오도 가도 못하는 방과 겹쳐 보였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비공간」 속 주인공이 인스타그램 중독자라는 점입니다.
이 소설은 예비공간 이용자들—실직자(전직 방송국 PD), 게임 중독자, SNS 중독자—을 “외계인”으로, 그들과 정확히 대비되는 자들—멀쩡히 경제 활동 잘 해 나가는 이들—을 “현대인”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외계인 눈으로 보면 현대인들도 외계인일 테지요.
“상단에 나열된 스토리들, 화려한 띠 둘러쳐진 개개인의 행성을 검지 하나로 탐사하겠다.”는 서술로 짐작할 수 있듯, 주인공에게는 인스타그램 속 “프라하의 전경, 파인다이닝 코스, 주식 수익 인증, 갈아치운 애인과 네 컷 포토부스 사진들⋯⋯” 등속이 전부 외계/이계의 삶입니다.
“불행이 거세된 외계에 친히 좋아요를 하나하나 눌러주겠다.”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인처럼, 주인공은 자신이 갖지 못한 현대인/지구인의 삶-이미지마다 ‘하트’ 공격을 가합니다. 마치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삶들을 모조리 취할 수 있다는 듯이. 이런 손장난은, 소설 속 방송국 PD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같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리얼을 표방한 페이크’. 이를 소설은 대단히 시각적인 연출로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킵니다.
“필터가 적용된 류는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기에, (⋯) 내버려 두었다. (⋯) 아이폰을 내렸다. 거기엔 그냥 류가 있었다. 도로 올리자 류는 단번에 괜찮은 류가 되었다. 괜찮은 류에게 좋아요를 누르기 위해 그의 이마를 연달아 두 번 찔렀다.”
그렇습니다. 가상의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나 먹히는 ‘손가락 하트 공격’ 따위, 현실에선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필터가 적용된 (⋯)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 그야말로 ‘사람다운 모습’을 ‘공유’해 오는 데 실패한 주인공. 이러나 저러나 무직, 무소득의 외계인일 뿐입니다.
‘이거 내 얘기네?’
하는 생각이 또 불쑥 생겨 버리면서 순식간에 「예비공간」을 읽었습니다.
일부 게으른 기자들이 쏟아내는 ‘팩트 노체크’ 기사들과 제목 낚시, 유튜브의 과다한 ‘어그로’ 콘텐츠와 섬네일, 인스타그램의 각종 ‘자의식 과잉’ 게시물들이 전부 「예비공간」이 이른 ‘필터’와 ‘리얼 표방 페이크’의 사례 아닌가 싶습니다.
올해가 제2의 IMF가 될 것이라는 경제 전문가들의 전망을 자주 접합니다.(부디 리얼이 아니라 페이크이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현대인들은 모두 ‘변신이 예비된’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적 박탈감 유발’ 이미지들을 경계해야겠다는 각성을 문득 해 봅니다. ‘저렇게 살아야 사람다운 건가, 저렇게 안 살면 난 벌레인가.’ 하는 자격지심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겠습니다. 소설 속 예비공간에 제 발로 들어가지 않도록, 그러니까 스스로 만든 마음의 밀실에 갇히지 말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예비공간」을 통해 제 실직 경험과 그레고르 잠자의 신세를 떠올렸고, 그러다 보니 영화 ⟨맨 인 블랙⟩에 나오는 바퀴벌레 외계인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새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짤 중에, 고전 소설 제목을 웹소설 느낌으로 바꾼 게 있더군요. 가령 『인간 실격』은 ‘재벌집 폐급 아들’, 『파우스트』는 ‘S급 악마에게 집착당하고 있습니다’ 같은 식입니다.
‘그레고르 잠자가 외계인이었다는 썰 푼다’
「예비공간」의 제목을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하며 혼자 피식했습니다. 최악의 구직난, 실업 대란이라는 요즘. 저를 비롯한 모든 분들의 일상에 필터링 없이 순수 지구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날이 도래하길 바랍니다. 아무도 외계인으로 변신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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