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 오는 C사의 택배 기사는 아침 열 시쯤에 문자로 택배를 어디로 받을지 물어본다. 매번 문 앞에 놔달라고 답장을 보내면서 항상 궁금했다. 하루에 수백 개의 답장을 받을 텐데 그걸 어떻게 관리해서 집집마다 원하는 위치에 택배를 가져다주는지. 택배 회사에서 제공하는 시스템이라도 있을까?
답장을 깜빡하면 굳이 재촉하지 않고 알아서 문 앞에 놔둔다. 배달된 물건이 식품이면 잊지 말고 냉장고에 넣으라고 배달 후에 따로 문자를 보내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면 또 궁금해진다. 이런 꼼꼼함은 기사님의 노하우와 개인기인가, 시스템의 도움인가?
집 앞에 도착한 C사의 택배차를 가끔 본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호수별로 물건을 분류하고 배달한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함께 일하는 부부일까? 여자는 이쪽 단지의 배달만 돕는 아르바이트는 아닐까? 이렇게 또 궁금해한다.
이런 시답잡은 의문을 가지는 동안 그들의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인지, 혹시 남편이자 아내인지, 설마 아버지이며 어머니이기도 한지는 궁금해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가족이다'라는 생각은 보통 상대와 나 사이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나 떠오른다. 배송 완료됐다는 물건이 문 앞에 없을 때라든지, 경비실에도 없을 때라든지, 그래놓고 기사님과 연락이 되지 않을 때라든지.
그래서 나는 C사의 두 기사님을 보며 그들이 누군가의 아들이과 딸이고, 남편이며 아내고, 아버지이자 어머니라는 생각을 해볼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을 본 지 몇 년이 되도록 그들이 가져다주는 물건은 지금까지 한 번도 예상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택배>를 읽으며 새삼 두 사람을 떠올려본다. 그들도 어묵 두 개씩을 먹고 출발했을까. 집 앞 편의점에서 햄버거를 데워 먹었을까. 주민과 시비가 붙은 적이 있을까. 혹시 이 집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어떨까.
'황은 이제 좋은 소식이 듣고 싶었다.'라고 한다. 그러나 어쩐지 황이 좋은 소식은 듣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한 가지, 앞으로는 황이 매일 새 마스크를 꺼내 쓰기를 바란다. 코로나 시국에 어느 예민한 고객의 지적같지만, 그게 아니라 '누군가의 OO'을 향한 작은 응원이다.
총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