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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와 숙취의 굴레

PJH 202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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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신 다음 날이면 늘 후회하곤 했었다. 숙취가 문제였다. 깰 때까지 오래 걸렸고, 속이 불편했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며칠 후 다시 숙취는 찾아왔다.

꾹꾹 눌러도 어쩔 수 없이 숙취는 내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설 <숙취>는 위와 같은 숙취의 특징을 "관계"에 빗댄 듯한 소설이었다.

무시하려 해도 찾아오는 것,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 그래서 지긋지긋한 것. 화자(주인공)은 그러한 과거의 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숙취라는 요소가 인간 관계로 확장되어 사유되는 부분은 정말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숙취와 같은 관계는 비단 화자만의 몫은 아니다. 화자의 남자친구 기윤도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주사(관계)와 숙취(후회)의 굴레에 놓여있다. 그는 왜 주인공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면서도 떠났다가 돌아오길 반복할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숙취라는 일상적 공감대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삶의 반복되는 것들, 이를 테면 끊을 수 없는 관계로 나아가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취향이겠지만, 단편 소설을 볼 때 거창한 시작이나 거대한 사유를 툭, 하고 던지는 패턴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아주 작고 일상적인 화소에서 은근하게 또 은은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단편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쌀쌀해지는 가을에 가장 어울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고, 그때마다 몇 가지의 다짐을 하곤 한다. 어차피 겨울이 되면 다 잊고 또 반복할 거면서. 

이 소설을 읽고 깨달은 것은, 꼭 술을 마셔야만 숙취로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었다.

오늘도 내가 반복한 주사와 곧 찾아올 숙취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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