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조대리의 수신인

한창현 2026-11-07

  • talk
  • blog
  • facebook

김 부장이 책상 위 볼펜을 다 떨어뜨리며 고릴라처럼 달려와 "협의하고 가져왔지?" 하는 데서 한 번, "악역은 무슨, 아역 아냐"에서 한 번, "사자 파이팅!"에서 한 번 웃었다. 물 한 번 안 묻은 칫솔도 그렇고. 조 대리 보고서가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사람들 진짜 하루 종일 개소리만 한다. 그래서 한참은 조 대리 편에서 읽었다.

 

오로나민C 열두 병에서 돌아섰다. 동료들 말버릇을 받아 적던 사람이 어느새 그들이 싸울 이유를 제 손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본인은 연구가 답보 상태라 실험 변인을 조작했다고 한다. 실험 변인이라고 부르니까 훔친 게 아닌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또 뭔가. "엥? 무슨 일? 인간아." "댐! 왓 더 퍽!!!" "리터럴리, 모든 여자다." 소설에서 개소리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개소리 연구자다. 각주 2는 더하다. 자기 입에서 나온 "카르—작!"을 "해당 종의 비의미적 놀람 발화"라고 분류해 놓았다. 자기가 그 종이라는 걸 각주에서 자백하고도 모른다.

 

조 대리는 반쯤은 안다. 외계인 얘기가 "자기합리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고 쓰고, 빈 병 사건 때는 "이번에 오로나민C를​ 회수한 건 내가 아니었다"고 쓴다. 자기 얘기까지 가다가 거기서 멈춘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서 더 서글펐다.

 

식탁 장면부터는 농담으로 안 읽혔다. 아버지가 말이 없을수록 어머니 말이 빨라진다. 오늘 있었던 일, 동네 얘기, 사소한 웃음거리. 말을 안 하면 에너지가 절약된다는 조 대리의 가설이 그 식탁까지 한 번만 돌아가 봤으면 좋았겠다. 거기서는 한 사람의 고요를 유지하느라 다른 사람이 힘을 쓰고 있었다. 사자는 말이 없다. 사자가 나타나면 다른 동물들이 소리를 낸다. 소파 두 칸을 차지하고 리모컨으로 동물의 왕국을 틀어 놓는 게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남자 새끼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조 대리는 원래 말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 많다고 혼난 아이였다. 말이 많으면 사내답지 못하고, 말이 없으면 사람답지 못하다. 그 아이가 아버지한테 배운 문장을 방패로 내밀면 김 부장이 "사자는 말이 없는데, 늙은 사자는 말이 많다"고 받는다. 술자리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장에서 그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은퇴한 아버지가 가족톡에서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다.

 

팀장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화해의 음료 스무 병을 하나씩 따서 쓰레기통에 붓고 뚜껑을 닫아 도로 넣어 놓는 사람. 병까지 버렸으면 누가 다 마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빈 병을 남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욕을 읽고, 다시 팀장을 찾는다. 양쪽 얘기 듣느라 죽겠다던 사람이 그 자리가 없어질까 봐 그런 짓을 한다. 팀장은 모두의 수신인이라서 무너지고, 조 대리는 원하는 답을 주는 수신인이 없어서 일론을 만들었다. 소설을 "너 외계인이지?"로 연 것도 팀장이고, 조 대리를 가장 정확히 본 사람도 팀장이다. 둘이 같은 냉장고로 사람들을 움직였는데, 조 대리는 끝까지 그 둘을 나란히 놓지 않는다. 팀장을 분석하고 가설을 고치는 데서 보고서가 끝난다. 그래서 결말이 동료들을 너그럽게 봐 주는 장면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조 대리 자신의 손자국이 먼저 묻어 있으니까.

 

일론은 답장을 안 한다. 대신 공개 계정에 짧은 문장을 올리고 조 대리는 그걸 자기한테 온 신호로 읽는다. "완전한 침묵은 한 번도 없었다." 말의 효율을 따지는 사람이 자기한테 오는 말은 효율이고 뭐고 오기만 하면 된다. 아버지에게 일생일대의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돌아온 게 침묵이었다는 걸 알고 나면, 모두에게 열린 문장에서라도 대답을 찾아내는 그 모습이 웃기지가 않다.

 

마지막 카톡. 금리, 물 끓일 때 뚜껑, 하루 물 섭취량. 예전 같으면 조 대리가 '주요 발화 유형' 아래 분류했을 말들이다. 세 통 옆에 다 2가 붙어 있다. 아버지가 보낸 말이 아직 그대로 있다. 침묵으로 집을 다스렸던 사람이 이제 읽어 주기를 기다리는 톡을 보내고, 비밀을 털어놓고 대답을 못 받았던 아들은 그 톡에 답하는 대신 일론한테 오늘만 길게 써도 되느냐고 묻는다. 작가님, 이건 좀 너무하신 거 아닌가.

 

그런데 이 장면에서 호칭이 달라져 있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대목에서 조 대리는 아버지를 "그"라고 부르고, 한 번은 "아버지, 아니 내가 한때 아버지라고 믿었던 그"라고 부르다가 스스로 고친다. 저 사자의 아들이 아니어도 되는 알리바이가 외계인이었다. 그런데 카톡 장면에서는 "가족 창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버지다". 이번에는 뒤에 '아니'가 오지 않는다. 나는 결말의 "딱 오늘만"보다 이 빠진 '아니'가 더 좋았다. 답장은 안 했다. 그래도 고쳐 부르지는 않았다.​ 

댓글

총 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