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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소설 단편

구효서 2021-09-02

ISBN 979-11-9759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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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의 글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구절을 읽었던 것 같다.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매일 매일 죽는다. 그 사람들의 영혼이 일제히 하늘로 올라가겠지. 하늘로 올라가는 영혼들의 부력을 이용해 전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런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서였을까. 어느 날 문득 가을날의 쓸쓸함을 원료로 무언가를 작동시킬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조금은 과잉된 가을날의 쓸쓸함이 해마다 나에게 찾아왔으니까.

쓸쓸함 혹은 넘치는 적막감은 정확히 매년 9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 박박 깎아 선득선득해진 머리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혼자서 입영열차에 몸을 실은 날이었다. 그해 가을과 겨울 5개월 동안 나는 육군 제2하사관학교의 장기 훈련병이었다. 자고 깨면 하는 일이 총 쏘고 달리고 구르고 얻어터지는 것이었다. 쓸쓸하고 춥고 슬프고 배고팠다. 33개월 군 생활을 하면서 10.26, 12.12, 5.18을 겪었다. 연일 계속되는 살인적인 폭동진압훈련과 인권 사각지대였던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 관리병으로 투입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 나이의 남자라면 피해갈 수 없었던 거여서 나만 특별히 더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랬던 것인데 전역 후 가을만 되면 매번 감당하기 힘든 소슬함이 뱀처럼 기어와 발목을 물었다. 어김없이 9월 5일이었다. 그 남아도는 가을의 쓸쓸함을 연료로 무언가를 가동시킬 수는 없을까 생각 끝에 쓴 글이 단편 <가을비>, <빈 가을에>, <당신의 바다는> 등이다.

살구나무 이파리는 노란색도 아니고 붉은색도 아니었다. 그 중간쯤의 색깔. 손톱에 들인 봉숭아물 빛깔이었다. 그 이파리들을 투과한 햇빛이 빈 나무 벤치 위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작은 새의 시체 위에 떨어져 내리는 가을날의 양광(陽光)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했던가. 이미 무기물이 되어버린 것이었으나 가을볕에 물든 나무 벤치는 가을과 햇빛과 살구나무 어깨 뒤로 펼쳐진 조락(凋落)의 원경 때문에 썩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 나무 아래 빈 벤치…….”

은주는 사실 그 나무 벤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정화는 목을 늘여 창밖을 바라보았다.

벤치 위로 살구나무 이파리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았고, 그것은 이내 바람에 불려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은주는 벤치 위에 남아 있을, 남아 있을 것 같은 온기, 혹은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텅 비어 있었으나 벤치의 오른쪽 한 귀퉁이에 서려 있을 것만 같은 기운. 은주는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벤치가 어쨌다는 거예요?”

“그곳에 앉아 있던 여자. 못 봤어?”

은주가 물었다.

“못 봤는데요. 누군데요?”

은주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누군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작년에도 이곳에 한 번 왔던 여자야. 그 왜 오렌지색 재킷을 입었던…….”

“아, 키 크고 까만 스타킹을 신었던?”

“알고 있었구나.”

“그럼요. 내가 그 여잘 모를 리 있나요? 어제 저녁에 체크인 했어요.”

“어제 저녁?”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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