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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그 연습에서 연습으로

소설 단편

이순원 2021-10-13

ISBN 979-11-9201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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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폭설 속에 대간첩 작전을 나간 사병들이 눈 속에 고립되어 며칠을 보냈다. 그 중 한 사병의 애인은 이른바 양공주의 딸 혼혈아다. 애인이 곧 미국으로 떠난다.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대간첩 작전에 성공하여 휴가를 받는 길 밖에 없다. 폭설 속에 사병들은 저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견뎌 나갈까.

“시간 잘 가는 이야기나 하지. 작은 소리로.”

“배 타던 이야기할까? 여자 배.”

“아무거나.”

“몇 달을 바다에서 헤매다 부두에 정박하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홍등가지. 결국 뱃사람들은 바다에서나 뭍에서나 배만 타고 다니는 거야. 고깃배를 타고 번 돈을 여자 배를 타며 쓰는 거지. 자네, 뱃사람들의 필수품이 뭔지 아나? 예전에는 가끔 계간(鷄姦)을 했다는데 요즘은 튜브 인형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 한번은 넉 달째 바다만 헤맸는데 어느 날 갑자기 파이프가 새는 거야.”

“왜?”

“인형이 바람을 피운 거지. 어떤 놈이 내 인형을 가지고 놀았던 거야. 그걸 인형이 내게 전염시킨 거고. 묘한 배신감이 들더군. 꼭 인형이 원해서 바람을 피운 것처럼 말이야. 홧김에 바다에 집어던졌지.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야, 마치 생사람을 수장시킨 기분이었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 없더라구. 사실, 난 그놈들이 이리로 지나간다 해도 방아쇠를 잡아당기지 못할 것 같애.”

“그럼 무엇 하러 왔어?”

“내가 빠지면 장교나 하사관들이 뭐라고 하겠어? 평소 큰소리를 치던 놈이 막상 일이 터지니 꽁무니를 뺀다고 할 것 아니야? 난 그게 죽기보다 싫었어.”

“자학적인 자존심인가?”

“빽 없는 사병이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지. 개구리 배에 채운 바람 같은 허세.”

“비참하군.”

“그것마저 없으면 우리는 더욱 비참해져.”

“변명도 비참하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지. 이 병장을 이곳으로 내몬 여자가 혼혈아라고 했지?”

“그런데?”

“남태평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끔 동남아를 들렀지. 특히 필리핀엔 그런 애들이 많아. 옛 위안부의 아들딸들이 다시 자기 몸과 웃음을 파는 슬픈 윤회가 계속되는 거야. 우리나라 기지촌과 비슷한 양상이지. 그래도 백마(白馬)는 나은 편이야. 동양인은 금발과 푸른 눈에 터무니없는 매력을 찾거든. 결국은 그만큼의 비뚤어진 열등감이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아버지의 혈족에 대해 묘한 배신감을 가지고 있지.”

아아, 기억난다. 아메로리안. 너의 절망, 너의 아픔.

1988년 「문학사상」에 「낮달」을 발표하며 데뷔. 창작집으로 『첫눈』 『그 여름의 꽃게』 등이 있고, 장편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나무』 『워낭』 『벌레들』(공저) 등 여러 작품이 있다. 동리문학상, 남촌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


lsw83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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