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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야록

소설 중편

박상우 2021-10-13

ISBN 979-11-9201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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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겨울,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술에 만취한 여성 둘이 차도로 내려와 위험하게 손을 흔들며 택시를 잡고 있었다. 그것을 본 기사가 욕을 하며 자신의 무용담(그는 택시에서 만취 여성을 성추행하는 걸 자랑으로 생각하는 인간이었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 흥에 도취했는지 뒷좌석에 앉은 나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날 그 개자식의 무용담을 듣고 택시에서 내린 뒤, 나는 술이 완전히 깨어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뽀얀 입김을 내뿜으며 하늘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던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후로 거의 일년 반 정도 그 개자식의 무용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는 통증을 느끼곤 했다. 그렇게 힘겹게 견디다가 때에 이르러 내 속에 누적되어 있던 에너지가 무섭게 폭발하기 시작했다. 빙의된 듯이 이 소설을 썼는데, 중편소설에 다섯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켰으니 투자된 에너지는 장편소설에 버금갈 정도였다. 아무튼 이 소설을 내가 모르는 '그녀'에게 바친다. 이 땅의 숱한 '그녀들'에게.

난 화가 나면 오이군을 가지군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죠. 진짜 화가 날 때, 예를 들어 이 새끼하고 더 이상 못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남이군, 하고 불러요. 우리가 남이가? 그래, 남이군. 그런 상황이 되면 짐 싸고 미련 없이 찢어지는 거죠 뭐. 이미 두어 번 그런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질기고 더러운 정 때문에 다시 들러붙어 지금도 여전히 바퀴벌레처럼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죠.

이군의 휴대폰 번호는 010-***-5288이에요. 자신이 원해서 부여받은 번호를 입에 올리며 그는 때마다 자기 오이가 팔팔하다고 자랑해요. 그가 걸어온 전화를 받으면 나, 팔팔한 오이, 하고 말하는 거죠. 오이가 성기를 상징한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나는 그놈의 팔팔한 오이 때문에 무진장 속을 썩고 살죠. 밴드 한답시고 돌아치면 가는 곳마다 골 빈 계집애들이 몰려와 끼악끼악, 오빠! 하면서 난리 블루스 친다는 거 안 봐도 다 알고 있어요. 나도 그런 장소에서 이군을 만났으니 두말할 필요 없죠. 곱살스럽게 생긴 자식이 머리까지 뒤로 묶고 기타를 쳐대면 끼악끼악, 계집애들이 까마귀 같은 소리를 내며 오줌을 질질 싸는 거예요. 그렇게 난리를 쳐대니 그놈이 팔팔한 오이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며 여자들을 마구 무찌르고 다니는 거죠. 5288 군번을 지닌 이 대책 없는 군바리새끼를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요.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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