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안함
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작가의 말
2005년 1월, 해발 1,330m의 백두대간 만항재에서 나는 쿄쿄를 처음 접했다. 내 왼쪽 어깨 쪽으로 접속해 쿄쿄, 쿄쿄, 하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쿄쿄와 접속하기 전까지 나는 세상에서 ‘스토리코스모스’라는 어휘를 접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해 가을, 모 대학 교수실과 강의실 사이의 복도를 걸어가던 도중 ‘스토리코스모스’라는 어휘가 강렬한 에너지와 함께 다운로드 되었다. 하지만 그것의 전모를 해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그때까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다차원과 평행우주적 구성이 차용되어 있지만 나는 이 소설을 SF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쿄쿄로부터 수신한 메시지의 내용이 철저하게 지금, 여기,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3차원 매트릭스의 전모를 일깨우기 위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같은 전모를 내가 알고 썼을 리 없다.
이 소설의 영감은 주로 새벽 4시경부터 시작되는 명상과 그것이 끝난 이후에 시작되는 등산 과정 중에 다운로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다운로드가 시작되면 그것이 어떤 상황이건 나는 동작을 멈추고 집중적으로 그것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받아적었다. 새벽에 등산하다 걸음을 멈추고 한 시간 이상 받아적기를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내 주변에 그 메모장을 본 사람들이 적잖았는데 몇백 개인지 몇천 개인지 개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것을 다시 노트북으로 옮기고 소설에 대입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그 과정에 나의 작가적 욕망이 스며들어 원본이 오염되는 경우가 적잖았다. 그래서 수많은 오류 수정의 과정이 발생하고, 심지어 책의 전모가 수정을 요구당하는 아픈 세월이 바쳐지기도 했다.
2016년 거의 10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나의 받아쓰기는 완성되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는 망상에 빠져 망설임 없이 책을 출간했다. 하지만 책을 출간하고 한 달쯤 지난 뒤 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는 걸 자각하고 죽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출판권 계약기간 5년이 만료될 때까지 어느 하루도 마음 편히 보내지 못했다. 내가 쓴 것처럼 위장한 그 소설로 인해 나는 용서받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5년이 지난 2021년 6월 나는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출판권을 돌려달라고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대표를 위시한 관계자들이 작가의 심정을 넉넉히 이해해 출판권 일체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이 작품을 수도 없이 수정하고 출간 시기가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출간이 나의 무지한 작가적 욕망 때문에 참담하게 실패했다는 걸 시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의 운명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24년, 『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이 드디어 스토리코스모스에서 출간되었다. 2005년부터 시작된 기이한 가이드와 훈련을 거쳐 드디어 이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소설 때문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스토리코스모스 플랫폼에 이 작품이 자리 잡게 되는 기이한 신비도 경험하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지구상에 없던 단어 ‘스토리코스모스’가 세상에 나타나게 된 과정과 그것의 의미에 얽힌 우주적 배경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언어가 아니고 의미 또한 아니다. 요컨대 이 소설은 내가 쓴 게 아니다. 아니 내가 썼다고 말할 수 없는 소설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스토리코스모스’에서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