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후 세대의 작가이다. 전쟁을 어른들의 얘기로만 들었다. 그런 중에 피난지에서 오히려 원주민 아이들을 사로잡으며 어른들까지 멋지게 속여먹는 피난민 소녀의 얘기를 들었다. 그것을 새롭게 구성하여 전쟁 중에 쉽게 보거나 만날 수 없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냈다. 전쟁 중이지만 피난민이 오히려 통쾌한 모습을 보이는 그림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날도 나는 끼부미를 하러 가기 위해 학교가 끝나는 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루에 책 보따리를 던지고 대문을 막 나서려고 하는데, 행랑방 안에서 사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니 내가 좋지 않네?”
미주의 목소리였다. 나는 살금살금 행랑 마루 아래로 기어갔다.
“빨리 말해봐. 이 바보 천치 자식아.”
“우히히히, 좋다.”
“그럼 니 어른들한테 나한테 장가든다고 하란 말이야.”
“우히히히…….”
“웃지만 말고 이 바보야,”
“아, 알았다. 그럼 지금 장가를 가는 거야?”
“이런 맹추, 지금부터 그래놔야 내년이고 후년이고 장가를 들지. 오늘 저녁 때 그 얘기 안 하면 나 다른 데로 가버리고 만다. 알았네?”
“알았다니까. 우히히히…….”
“내가 그랬다고는 말하지 말고. 알았네?”
“아, 알았어.”
“그럼 날 한번 껴안아봐.”
“우히히히…….”
“가슴도 한번 만져보고.”
“옷 속으로?”
“그래, 이 바보야.”
“젖이구나. 우히히히…….”
“좋네?”
“그래. 참 좋다, 기분이.”
“그 얘기만 하면 치마 속에도 손 넣게 해줄게. 알았네?”
“여, 여기 말이지?”
삼촌의 달뜬 목소리였다. 저게 또 무슨 수작을 꾸미려고 하는 거지. 나는 행랑 쪽에 침을 뱉고는 아이들과 함께 양코배기 부대로 갔다. 그날은 우리가 끼부미를 해가지고 뒷내 모래펄로 돌아와도 미주와 삼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 계집애에게 보다 더 많은 것을 뺏기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88년 「문학사상」에 「낮달」을 발표하며 데뷔. 창작집으로 『첫눈』 『그 여름의 꽃게』 등이 있고, 장편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나무』 『워낭』 『벌레들』(공저) 등 여러 작품이 있다. 동리문학상, 남촌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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