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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길, 해골의 길, 구도의 길

에세이 선택안함

박상우 2021-10-26

ISBN 979-11-9201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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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서역西域'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서역이라는 지명 속에 엄청난 기억과 사연이 숨어 있는 것 같은 아스라함, 그러니까 그것이 내 존재의 블랙홀이거나 블랙박스 같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사로잡히곤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윤후명 선생의 『둔황의 사랑』을 읽고 완전히 매료당해 서역에 대한 동경과 흠모의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하지만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품고 있는 서역을 혼자 여행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간절한 염원이었기 때문인가. 드디어 그 꿈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졌다. 실크로드의 출발 기점이 중국의 시안(장안)이 아니라 신라의 경주였다는 걸 입증하는 프로젝트를 경상도 지자체에서 추진했고 그것을 위한 탐사1팀으로 화가 이인 형과 내가 한 팀이 되어 드디어 꿈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와 촉박한 일정, 밤기차를 이용한 힘겨운 강행군이었지만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를 두루 둘러보고 유적지를 살필 수 있어 내 인생의 서역 공부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내 전생의 인생 무대였던 듯 한없이 애틋하고 살갑게 느껴지던 사막과 폐허의 풍경을 스쳐가며,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엄청난 진동이 일어나는 걸 무시로 느끼곤 했다. 그렇게 파미르 고원 3,600m 지점의 칼라쿨리 호수에서 반환점을 찍고 돌아온 길고 험난했던 여정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고 공유할 수 있어 기쁘기 그지없다. 중요한 사진들을 첨부하면서 서역의 시간성 속으로 다시 한번 빠져들어가 '지금 이곳'에서의 내 존재성을 완전히 망각할 수 있었다. 물리적 존재성은 여기 있는데 정신적 존재성은 여전히 서역을 떠돌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내 전생의 블랙박스와 같은 서역, 그 아득한 길에서 찍은 소중한 사진들을 함께 수록한다.

5시 15분, 투루판 대바자를 한 바퀴 둘러보고 곧바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많은 일정을 소화한 탓에 배도 고프고 피로했지만 어쨌거나 힘든 일정을 끝냈다는 사실 때문에 긴장이 풀리며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인 형도 마찬가지라서 모처럼 식사를 하며 고량주를 마시기로 했다. 어떤 고량주가 좋은가 묻자 가이드 허 선생 대신 조 사장이 ‘백량애(白粮液)’가 투루판 명주라고 추천했다. 그러고는 식당에서는 팔지 않으니 자신이 직접 사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백량애를 반주삼아 식사를 하는 동안 조 사장은 내일 우리가 지나가야 할 강풍구(强風口)에 대해 걱정했다. 내일 아침 호텔에서 조식을 마치고 쿠처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40분 정도 역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 15km 구간이 강풍구라 일기예보를 잘 체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10년에 열차전복 사고가 있었다고 하니 긴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식사를 끝낸 뒤, 이인 형과 나는 조 사장이 건네는 중국 담배를 한 대씩 받아 피웠다. 둘 다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권하는 담배를 사양하는 게 실례라는 걸 여러 번의 중국여행을 통해 알고 있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이인 형과 나는 중국어로 ‘수고했다’는 말이 ‘신쿠러(辛苦了)’라는 걸 배워 그것으로 하루 일정의 종료를 선언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자 건너편에 야시장이 열리고 있어 이인 형과 나의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결국 일행은 야시장으로 건너가 양꼬치구이와 생맥주로 2차를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네 사람은 전생의 형제들이 다시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 몹시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신선한 바람, 어두워질 무렵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더해져 투루판이 고비사막 지대가 아니라 지중해의 어느 휴양도시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일행은 호텔로 돌아와 객실에서 3차를 했다. 룸서비스로 맥주를 시켜 마시며 조 사장의 요구로 조용필의 <꿈>을 되풀이해 들었다. 조용필 오리지널이 아니라 나의 휴대폰에 저장된 파일 중에 오디션 프로그램인 <위대한 탄생>에서 이태권이 불렀던 리바이벌이었는데 조 사장은 오직 그 노래만 되풀이 듣게 해 달라고 했고 또한 그것을 따라 불렀다. 그 순간엔 그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던 어느 순간, 기분이 한껏 좋아진 조 사장은 자신의 트레이닝 패션을 과시하듯 갑작스럽게 하의를 내렸다. 트레이닝 패션은 이렇게 노팬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는 걸 강조한 돌발행동이었다.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네이버: 박상우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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