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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중편

이상욱 2022-06-16

ISBN 979-11-92211-23-7(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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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어쩌다 보니 대화 주제가 여자와 연봉에서 아버지로 넘어갔다. 그때 나와 친구들은, 각자가 각자의 아버지에게서 유사한 관계성을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넓게 보면 그것은 한 세대가 한 세대를 다뤘던 방식(혹은 태도)이기도 했다.

집단과 개인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인간은 부모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사회의 가치를 학습하고 강요받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질문은 착상되었다.

우리 세대의 가치는 어디서 기원하는가.
아버지 세대의 가치는 어디서 기원하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기를 바랐는가?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해 소설을 썼다.

초고를 쓴 게 벌써 십이 년 전이다. 여전히 저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모든 것이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그 이어짐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퇴원하고 얼마 후, 미란을 강간했던 남자가 그녀의 집을 찾았다. 남자는 공포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과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전했다. 학교를 그만둔 미란은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미란이 스무 살이 되던 해, 남자는 미란의 몸에 타박상과 몇 개의 화상 자국을 남기고 떠났다. 그 뒤로 미란은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했다. 떠나는 건 언제나 남자 쪽이었다. 무의미한 반복임을 알았음에도 멈추지 못했다.

저에겐 공백이 있습니다. 처음 그 공백과 처음 마주했던 건 중학교 때였습니다. 그전까진 막연한 어떤 것에 불과했지요. 그 공백은 노력으로 메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노력으로 메울 수 있는 걸 우리는 공백이라 부르지 않으니까요. 그 공백은 절 남자들에게 집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결핍? 혹은 보상심리? 정확히 설명할 말을 찾기 어렵군요. 남자들은 제 집착에 질려 떠나갔고, 이야기 끝에는 언제나 슬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결정적 상처를 남긴 남자는 스물다섯에 만난 중년의 치과의사였다. 영리한 남자는 그녀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상했고, 미란을 향한 격려와 질책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연인이자 아버지였다. 미란의 삶에 처음 찾아온 충족감이었다. 공백은 채워지고 있는 듯했다. 미란은 이 소중한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집착은 버려진 아이의 울음을 닮아갔다. 두려움이 그녀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가벼운 관계를 원했던 남자가 그녀에게 질리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던 날, 미란은 따듯한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과도로 팔목을 그었다. 직장동료가 우연히 연락하지 않았다면, 미란은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었을 터였다.

병원에서 깨어났던 날, 미란은 벽에 걸려있던 시계를 베개로 감싸 깨뜨린 뒤 유리 조각으로 다시 팔목을 그었다. 상처는 어제보다 깊었다. 이번에 그녀를 발견한 사람은 간호사였다. 삶이 자꾸 자신을 붙잡는 이유를 그녀는 알지 못했다. 환청과 환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중증장애인과 정신질환자, 연고가 없는 부랑자까지, 말이 병원이지 수용시설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혼란의 시기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2년 가까이 머물렀다.

생활은 단순했다. 기상해서, 인원 파악을 하고, 간단하게 씻고 아침을 먹는다. 치료 명목으로 몇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때가 되면 약이 나왔다. 약은 거의 모든 환자에게 지급되었다. 약을 먹은 이들은 몽롱한 표정으로 젖은 수건처럼 늘어졌다. 대개는 한나절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약을 피해 5층 도서관으로 도망쳤다. 미란은 거기서 책과 만났다. 대부분 전쟁 전에 출간된 것이었다. 책장에서 꺼낼 때마다 뽀얗게 먼지가 일어났다. 그녀는 창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녀가 처음 읽은 책은 <인간 실격>이었다.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단숨에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미란은 눈물을 흘렸다.

2013문학의 오늘소설 신인상 당선

2015경계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 문학공모 선정

2021년 소설집 기린의 심장출간

2021년 엔솔러지 소설집 숨쉬는 소설출간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웹북 『스탠다드맨』 『나는 소설의 신을 만났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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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ang2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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