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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소설 단편

박상우 2022-07-05

ISBN 979-11-92211-27-5(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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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나의 작가적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이후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세상에 같은 이름의 카페들이 여럿 생겨나고, 나는 유명세를 치르는 작가가 되어 준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많은 걸 경험했다. 그뿐만 아니라 밀려드는 원고 청탁으로 꼬박 10년 동안 밤샘 작업을 하게 해 건강을 완전히 망가지게 만든 주범이기도 하다. 이 작품 한 편이 나의 인생 전략을 바꾸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년 동안 작가적 유명세를 치른 뒤, 그 모든 것이 다 헛것이라는 걸 분명하게 깨쳤기 때문이다.

작가로 등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설에서처럼 술을 마시러 종로로 나갔다가 21년 만의 폭설을 만나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 서울 시내 전체의 교통이 마비된 상황이라 신촌에서 한강대교를 건너 상도동까지 새벽 눈길을 걸어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눈길을 걷던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운명적인 다운로드를 받고 있었는데, 집에 당도하자마자 취중임에도 몇십 장의 16절지에다 미친 듯이 뭔가를 휘갈기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8개월 뒤 문예지로부터 소설 청탁을 받고 테이블 서랍에 처박아두었던 그것을 꺼내 읽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걸 누가 써 준 거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쓰고 10년이 지난 뒤에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를 썼다. 두 편이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내적 연결고리가 중요하므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먼저 읽고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를 읽을 것을 권한다. 샤갈의 마을에 등장하던 사람들이 사탄의 마을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그 인간적 변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안의 그들, 그들 안의 우리를 마주해야 하니까.

그때까지 이런 식으로…… 이렇게 혼자 살겠다 그겁니까?

그녀가 피우는 담배의 필터에 분홍빛 루주가 묻어나는 걸 유심히 건너다보던 우리 중 하나가 다시 물었다.

혼자 살지만 사랑을 하죠.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손을 들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재빨리 뒤쪽으로 쓸어넘겼다. 그 표정이 마치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그것 같았다.

혼자 살지 않아도 사랑은 할 수 있을 텐데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 중 하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두 눈을 치뜨면서 분노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반말을 했다.

말장난하지 마. 당신들이 지금 둘이라 그건가? 둘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셋이나 넷, 혹은 다섯이나 여섯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데? 난 솔직히 말해 당신네가 그 카페에 매번 떼 지어 몰려와 떠들어대는 걸 들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혐오했는지 몰라.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아주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계속해서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그때 우리 중 다른 하나가 재빨리 그것을 제지했다. 그런 쪽으로 얘기가 전개되는 걸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결연한 의사표시였다.

이젠 여섯이 아니에요. 보다시피 이젠 이렇게 둘만 남았어요.

그러나 그녀는 더욱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결국은 둘도 안 남는다는 걸 알아야지. 결국……

당신은 이성보다 감성이 강한 여자로군요.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꿈을 꾸듯 몽롱한 어조로 우리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제나 고달픈 법이에요.

머리를 떨구고 있던 다른 하나도 따라 중얼거렸다.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만 망연하게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무게가 더해지고 오래지 않아 실내의 모든 것들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휘몰려오거나 혹은 먼 곳으로 휘몰려가는 바람소리가 가끔 들리고 그 처연한 웅웅거림에 귀를 세우면 그때는 또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방이 적막했다.

짓눌리고 비틀린 기억의 잔상들마저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아득하게 밀려나가고 오래지 않아 남겨진 우리 둘의 의식에는 드넓은 여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비록 둘이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로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의식이 지워져나가는 와중에도 우리는 마지막 안간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따금 여자 혼자 술을 마시는 소리, 공허롭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먼 데서 오는 여음처럼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그가 보고 싶어요. 누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줄 수 없나요? 내가 그를 기다린다고……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서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잘게 부서져 남겨진 우리 둘의 등판 위로 눈가루처럼 쏟아져내렸다. 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여자가 마지막 신음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춥고 배고파. 그리고 남자와 자고 싶어……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네이버: 박상우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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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눈을 맞으며 기다린 풍경 까바Cava 20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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