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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소설 단편

박상우 2022-07-05

ISBN 979-11-92211-28-2(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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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읽지 않고 이 작품을 선택했다면 일단 독서를 멈추고 샤갈의 마을로 돌아가 그것을 읽은 뒤에 사탄의 마을로 진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샤갈의 마을과 사탄의 마을을 비교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사는 마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변모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샤갈의 마을과 사탄의 마을에서 생겨난 엄청난 편차가 독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변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래를 예견하고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샤갈의 마을과 사탄의 마을이 근원적으로 동일한 마을이고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이 동일 인물군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미지로 남겨진 미래가 두려운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에 출연한 등장인물군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샤갈의 마을을 떠나고 사탄의 마을을 거쳐간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샤갈의 마을이 사탄의 마을이고 사탄의 마을이 샤갈의 마을이라는 걸 발견한 독자는 그들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는 일,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

그때 X가 주머니에서 펜과 메모 패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은빛 귀고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신도 펜을 꺼내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Ω의 시선이 이윽고 낮아져 X와 은빛 귀고리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은빛 귀고리가 X보다 먼저 메모지 한 장을 뜯어내 거기다 이렇게 썼다.

―보랏빛 립스틱이 뇌하수체를 자극하는 밤, 쿠데타 소식을 접하며 당신과 섹스하고 싶은 밤!

은빛 귀고리의 메모가 보랏빛 립스틱 앞으로 전해졌다. 그것을 읽은 그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은빛 귀고리에게 펜을 달라고 했다. 잠시 뒤, 그녀의 메모가 은빛 귀고리에게 전해졌다.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아서 오랫동안 굶주렸나 보죠? 게걸스럽게!

메모를 읽은 은빛 귀고리,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입에 넣고 질겅거리며 다시 한 장의 메모지를 뜯어냈다. 그가 뭔가를 휘갈기는 동안, 물빛 원피스는 은밀한 눈빛으로 은빛 귀고리의 동작을 주시했다. 하지만 X의 시선이 자신의 이마에 꽂혀 있다는 걸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은빛 귀고리와 보랏빛 립스틱이 메모를 교환하는 동안, 검은 선글라스는 출입문 옆의 공중전화 부스를 자주 돌아보았다.

―나는 살육의 시간을 기다리는 하이에나. 살육이 스쳐간 자리는 나의 카니발 장소. 어째서 인간들의 귀에는 하이에나의 울부짖음이 악마의 웃음소리로 들리는 걸까?

―당신과 나를 위한 카발리에리의 정리(定理):두 개의 입체를 어떤 정해진 평면에 평행한 임의의 평면으로 잘랐을 때, 자른 면의 면적이 항상 같으면 그 두 개의 체적은 같다!

―보랏빛을 위한 악마의 예찬:그것은 더럽고 추악한 관능의 빛, 죽은 짐승의 살 속에서 썩어가는 가증스런 탐욕의 빛, 영원히 변치 않을 황홀한 저주의 빛, 그것 자체로 이미 승화된 오묘한 죽음의 빛.

―오, 사랑스런 보랏빛 립스틱의 노예, 내게 가까이 와요.

은빛 귀고리가 메모를 중단하고 UCLA에게 자리 이동을 부탁했다. UCLA와 헤어밴드가 옆으로 이동하고 은빛 귀고리가 보랏빛 립스틱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물빛 원피스의 시선이 은빛 귀고리를 따라갔다. 은빛 귀고리가 상체를 일으키고 보랏빛 립스틱에게 뭐라고인가 귓속말을 했다.

그 순간, 보랏빛 립스틱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개자식, 하고 은빛 귀고리의 뺨을 후려쳤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크핫,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은빛 귀고리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이 보랏빛 립스틱은 가방을 메고 재빨리 실내를 나가버렸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만류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은빛 귀고리에게 사연을 묻지 않았다. 은빛 귀고리가 카운트다운, 카운트다운, 하고 뜻 모를 말을 내뱉으며 붉은 출입문 쪽을 노려보았다.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네이버: 박상우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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