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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는 이제 이곳에 살지 않는다

소설 중편

박상우 2022-07-05

ISBN 979-11-92211-29-9(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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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여름에는 매미소리가 그악스럽게 들리다가 어느 해 여름에는 깊은 정적이 이어져 매미소리를 들으려 일부러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다. 그 많던 매미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런 현상에 대한 사유와 탐찰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삼십대였고, 주변에 불안정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정말 많은 존재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한 시절, 한 시대의 벽화를 그리는 심정으로 나는 이 소설을 썼다.

사람도, 사랑도, 지나고 보면 모두 기억의 벽화가 된다. 사라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기억은 무감동한데 신기하게도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은 공허와 여백으로 남아 자극을 받을 때마다 강렬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미지로 간 존재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그리움ㅡ이 소설은 내가 살아낸 삼십대의 시절 벽화이다.

어느 순간, 여자가 가오리에게 춥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가 아무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고 뒤쪽의 벽난로에다 불을 피웠다. 벽난로 옆에 쌓인 장작개비를 어긋나게 걸쳐놓고 밑에다 신문지를 말아 넣어 수월하게 불을 지핀 것이었다. 그러자 한여름 밤의 장작불이 꽃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갈라진 나무의 속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팬티도 젖었겠지?”

자리로 돌아온 가오리가 여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다 젖었어, 하고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에 대해 나는 아무런 궁금증도 일지 않았다. 별달리 느껴지는 것도 없고, 별달리 상관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마린에 대한 그리움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장작개비처럼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피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술잔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오리가 여자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 보았다. 젖은 몸을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의 자세가 너무 불편해 보여 다시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오리는 여자의 가슴에 손을 넣고 입술을 빨아대고 있었다. 사랑을 나누는 것이거나 처절한 몸부림이거나 미친 짓이거나, 어떤 식으로도 상관하고 싶지 않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시 눈을 떴을 때, 실내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출입구 우측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이 실내를 오가며 분주하게 설쳐대고 있었다. 주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고, 주방에서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서넛은 출입문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정신없이 출입문 밖으로 물을 퍼내고 있었다. 뒷산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마당을 넘어 이윽고 실내로 밀려들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가오리와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출입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무리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바가지, 그릇, 세숫대야 따위를 동원해 결사적으로 물을 퍼내고 있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인 것 같았다. 열려진 출입문 밖을 내다보니 마당과 도로, 논의 구분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뒤였다. 그때 허리를 굽히고 필사적으로 물을 퍼내던 이구아나가 손에 들고 있던 바가지를 바닥에 팽개치며 악을 썼다.

“안 돼, 틀렸어. 포기하고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 뒷산을 넘어가면 길이 있을 거야. 지금 나가지 않으면 완전히 고립될 거라구.”

나는 황망히 등을 돌리고 주방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주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방 우측에 작은 방문이 있어 열어보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닫고 다급히 등을 돌리자 좌측 벽면에 밖으로 통하는 작은 출입문이 있었다. 정신없이 그것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어둠과 바람과 빗줄기가 한패거리처럼 달려들며 사정없이 면상을 후려쳤다.

아.

거기, 건물 바깥쪽 벽면에 살아 꿈틀거리는 한 쌍의 검은 생명체가 있었다. 벽면에 등을 붙이고 한쪽 다리를 치켜들어 상대방의 다리를 휘감은 생명체, 벽면을 손으로 짚고 연신 허리를 움직여대는 또 다른 생명체…… 서로 다르게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흡사 우주폭풍 속에서 끔찍스런 사투를 벌이는 외계 생명체 같았다.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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