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보델레 함몰지 : 2022-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소설 단편 당선작

이한얼 2022-09-28

ISBN 979-11-92211-34-3

  • 리뷰 0
  • 댓글 3

1,000 코인

  • talk
  • blog
  • facebook

2022-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수상작

내 삶과 존재의 윤곽이 희미해지고 있을 무렵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왜 글을 쓰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 채 하얀 여백을 글자로 채우는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한때는 글재주 있다는 말을 믿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소설을 배우며 그 알량한 재주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때 내려놓고 싶었다. 내가 내지르는 것이 자갈밭에 돌멩이 하나 더 얹는 행위라면, 쓰레기장에 휴지 한 장 더 버리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라면 계속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친 듯이 읽고 썼다. 이 세상에 내가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막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횡단하는 그 사람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였다. 끝없는 사막을 걷다가 우연히 오아시스와 마주칠 때, 대상과 낙타는 잠시 희열에 젖는다. 이를테면 지금 나는 무의미의 사막에 찍혀있는 긴 발걸음을 뒤돌아보다 문득 오아시스를 만난 셈이다. 하지만 사막은 끝이 없고 쉼이 끝나면 다시 걸어간다.

어쭙잖은 재능을 믿지 않게 된 것은 천운이었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걷는 것이고 쉬지 않고 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함께 걸을 수 있는 문우들이 있었다는 것은 더없는 행운이었다. 이 행운에 감사하며 멈추지 않고 다음 오아시스와 야자수를 찾아 걸어가고 싶다.

글을 쓸 때만, 흩어지는 존재의 윤곽이 자리를 잡고, 퇴적된 삶의 지층에 의미가 새겨진다. 그러기에 겸허한 마음으로 인간과 삶을 배우고 배운 것을 죽을 때까지 내 지층에 기록하리라 다짐한다.

메리엠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샤미르의 외침이 들렸고 메리앰과 신뚝이 급하게 뛰어나가는 바람에 내려놓은 물병을 발로 찼다. 메리앰이 급하게 나를 불러 나도 뛰어나갔다. 메리엠은 음성을 낮춰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누군가 우리 뒤를 쫓고 있다고 하네요. 500M 정도 뒤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온 흔적을 발견했다는군요. 지금 당신과 나는 바로 출발하고 샤미르와 신뚝은 뒤에서 우리를 호위하며 따라올 겁니다. 서둘러요.”

우리를 쫓는 자들이 누구일 거 같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틈을 주지 않고 메리앰은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낙타를 끌고 나타났다. 급박한 순간이 되자 메리엠도 샤미르도 소리를 내지 않으며 놀랍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나와 메리엠이 먼저 출발하고 샤미르와 신뚝이 우리 뒤에서 따라오는 순간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한 대의 SUV가 보였다.

샤미르와 신뚝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메리엠은 낙타 고삐를 채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메리엠이 앞서가며 내 고삐까지 쥐고 있었고 느릿느릿 걷던 낙타는 메리앰의 고삐질로 달리기 시작했다. 낙타가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그 빠른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속도에서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막 낙타 타는 법을 배운 내가 단봉에 달린 투아레그식 안장에 앉은 채 낙타의 동작에 맞춰 척추와 골반을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 필 앞에서 달리는 메리엠의 짙푸른 베일이 깃발처럼 내 쪽으로 휘날렸다. 그 순간이었다. 두려움과 긴장이 사라지고 낙타와 나 자신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태양에 달궈진 바람이 뜨거운 숨결처럼 내 뺨과 목으로 휘몰아쳤고 낙타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지금 여기 K를 찾아왔다는 사실도, 내가 철저하게 파산했다는 것도, 그리고 다시 거기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 싫어 왔다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바람과 태양과 낙타와 메리엠만이 존재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떤 것을 생각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강렬했다. 죽음과 삶이 한 겹으로 겹친 이곳에서 오히려 강렬한 삶이 내 세포 하나하나를 관통했다. 삶은 생각과 고민과 걱정과 절망 따위로 얼룩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살처럼 쏟아지는 것이고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몰아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달렸는지, 뒤에서 죽음 그 자체가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달리는 행위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어떤 상태가 되었고 이후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무엇을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얼마나 달렸을까? 낙타가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메리엠은 낙타를 세웠다. 이미 태양의 열기는 식기 시작했고 낙타는 숨을 헐떡이며 탈진 상태였다. 메리엠은 낙타에서 내린 후 고삐를 잡았고 나도 내려 메리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내가 겪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골똘한 생각에 빠졌다.

“디크르(dhikr)라고 해요.”

갑자기 내뱉듯이 던진 메리앰의 말에 정신을 차려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당신이 느꼈던 것을 수피들은 디크르라고 해요. 우리 투아레그족은 정통 이슬람보다는 수피라는 이슬람 신비주의를 믿는 사람이 많아요. 할아버지도 수피였어요. 할아버지는 모든 것에서 신을 느껴야 한다고 가르쳐요. 신을 느끼는 것, 그것이 디크르입니다. 흔히 경문을 암송하거나 춤을 추면서 디크르에 빠진다고 말하죠. 그렇지만 낙타를 타고 달릴 때, 바람과 하나가 될 때, 우물을 팔 때, 그리고 빈사 상태가 되어 사막을 걸을 때도 디크르를 느낀다고 해요. 바람과 하나가 될 때 신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신은 모든 것이니까요.”

2022-3 스토리코스모스 신인문학상 당선

2024 종이책『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웹북 『보델레 함몰지』 『캄브리아기의 달빛 아래』 『활자중독자의 내면풍경』 출간 

 

agny@naver.com

 

 

 

보델레 함몰지
심사평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댓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