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안함
활자중독자의 내면풍경
작가의 말
삶에 운명이나 정해진 규칙 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다. 부유하는 입자처럼, 복잡계의 규칙에 따라 예측 불가능한 운동과 우연한 충돌로 이루어진, 정형할 수 없는 점액질 형태의 어떤 것을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타인의 눈에 어른이라고, 혹은 이제 늙었다는 말을 들을 즈음, 내 삶에도 어느 정도 윤곽과 형태가 잡혀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충동대로, 자유롭게 흘러왔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불확정성과 불가해성의 총합은 구체적인 모양을 잡고 초점을 잡아서 삶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 흐름의 끝에는 글을 쓰기로 한 내가 서 있었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닥치는 대로 읽고, 손에 잡히는 모든 활자를 포식했지만, 그럼에도 늘 지식과 활자에 굶주렸다. 많은 것을 읽고, 많은 것을 알게 된다면 부조리한 삶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읽는 것만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삶은 누가 써주는 글이 아니라 내가 써가는 이야기. 답은 누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내가 만들어 가는 것.
긴 세월을 우회하며 마침내 깨달았다. 삶의 규칙은 내가 써가는 글에 있다는 것을. 운명은 하루하루 빈 여백을 메우는 내 키보드 소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도.
우리 모두 무한한 우주 속에 부유하는 입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창조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사유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