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은 누가 뭐래도 사랑을 다룬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 소설은 생각처럼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인간관계가 대부분 통속적이고 상투적인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예술의 존재 목적인 ‘낯설게 만들기’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낯설게 만들기가 제대로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라면 책 읽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독자라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그것을 읽을 게 틀림없다. 왜냐, 힘겨운 인생살이를 망각하기에 사랑만한 환각제가 따로 없으니까.
이러한 문제로 고심하던 어느 날, 벼락 치듯 사랑의 초월적 포즈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자 사랑이 너무나도 끔찍스런 공포로 형질을 바꿔 소름이 돋았다. 사랑의 초월적 포즈가 이렇게 소름 돋는 것이라니, 그 예상 밖의 반전이 너무 기막히게 여겨졌다. 통속성과 상투성이 배제된 사랑 즉 초월적 포즈를 취하는 사랑은 더 이상 마취와 환각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사랑일 수 없었다. 두려운 지점이었으나 그것에 대한 소설적 매력은 끝끝내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오래 품고 뒹굴며 형식과 리얼리티를 부화시켰다. 한판 붙어보자는 오기가 작동한 결과였다.
이제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고 낯설게 만들기의 품평을 받을 시간이 되었다.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을 소진했으나 낯설게 만들기에 대해서는 창작자로서 할 말이 없다. 내 손을 떠난 소설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랑을 낯설게 보여주는 소설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고 싶다. 소설 중의 소설, 소설다운 소설, 그것이 바로 그것이니까.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들으며 사랑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 달콤 쌉싸름한 세상을 꿈꾸어 본다.
턱수염이 잔을 들어 귀찌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그러자 귀찌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건배했다. 턱수염의 나이가 훨씬 많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반말을 쓰지 않는 걸 보면 두 사람이 절친하거나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랑 문제 때문에 만났다는 대화의 일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들이 동성애자일 가능성은 더더욱 없어 보였다. 턱수염을 기른 남자도 중후한 분위기의 남성미를 지니고 있었고 귀찌를 한 상대방도 대단히 세련된 남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가 완연함에도 불구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미묘한 탐색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황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자꾸 사랑의 문제로 몰고 가려고 하시니까 저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저를 가볍고 한심한 인간이라고 나무라신다 해도 별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지만 저는 아직 그것에 대해 별다른 확신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아니라 뭐랄까…… 저는 관계라는 단어가 편안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수많은 인간관계를 맺게 되고, 그것은 이런저런 양상으로 발전하거나 절로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관계를 아주 좋아합니다. 억지를 부리거나 무리한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 거죠. 그냥 그렇게 사는 게 편하고 좋으니까요.”
“관계…… 참 좋은 말이죠. 하지만 인규 씨가 내 아내와 유지하는 관계는 내가 보기엔 단순한 관계라고 말할 수 없어요. 나의 의견으로 말하자면 그건 전적으로 사랑이에요. 그렇게 애틋하고 그렇게 절실한데 그걸 어떻게 흔하고 흔해빠진 뭇사람들과의 관계에 비유합니까. 예를 들어 새로 이사 간 동네의 부동산업자를 알게 되는 것도 관계인데 그런 관계와 아라와의 관계가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뜻인가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관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사랑도 관계의 일종일 수는 있지만 사랑이 관계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는 거죠. 사랑이라는 게 꼭 그렇게……”
“인규 씨, 중간에 말을 잘라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건 말이죠, 내 생각으로는 인규 씨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세상을 무척이나 건조하게 살아서 그런 걸 거예요. 나처럼 십 년 넘게 결혼생활을 해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어요. 결혼생활을 통해 사랑의 환상이 스러지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지금 인규 씨 입장에서는 이런 내 말이 황당하고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건 내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니 새겨들어도 나쁠 건 없을 겁니다. 내 나이 마흔다섯입니다.”
그 지점에서 나는 맹물을 홀짝거리는 일을 그만두고 소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내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가 맨정신으로는 듣기 어려운 엽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의 여자 문제도 여자 문제이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는 근원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어 보였다. 턱수염 기른 남자의 아내와 귀찌가 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귀찌는 그것을 단순한 관계라고 주장하고 있고 남편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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