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숙하게 박혀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어린 시절 TV에서 본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이 내게는 그랬다. 톱니바퀴에 끼어 돌아가는 찰리 채플린의 영상, 자본주의도, 산업화라는 개념도 몰랐던 내게 그 이미지는 마음속의 가시처럼 깊게 파고들어 세상을 살아가는 와중에 불쑥불쑥 되살아나곤 했다.
그때부터 이미 부적응자로서의 삶을 예비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직장, 회사생활, 사내 조직…… 분철되어 나뉜 문제집처럼 딱딱 분리되어 나뉜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영원히 풀수 없는 수학 숙제 같은 것이었다.
삶이 강요하는 주형에 나를 낑낑거리며 끼워 넣다가 마침내 포기하고 싶을 때 나는 멸종당한 생물을 떠올린다. 삶의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3억 년 전에 번성했다가 멸종한 절지동물이 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어쩌면 나와 같은 많은 고대 생물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껍질에 자신을 끼워넣기 위해 낑낑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도태되고 사라지는 것들에 여린 빛이라도 조명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캄브리아기의 달빛 아래」는 그렇게 잉태된 소설이다. 누군가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적응하고 진화하고 누군가는 부적응자가 되어 소리 소문도 없이 소멸한다. 누군가 퇴적된 지층을 뒤져 그 아득한 소멸을 오늘에 되살려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문학의 소명이라고 믿었으므로.
캄캄한 밤이 되면 캄브리아기의 바닷속을 거닐던 태백산맥의 어린 돌레로바실리쿠스를 생각했다. 시간의 무게에서 자유로운 돌레로바실리쿠스는 유연하게 체절을 움직이며 바다의 바닥을 누비고 있었다. 체절을 여유롭게 굽히며 물살을 가르고 열 쌍의 다리는 재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여 놀라운 속도로 먹이를 따라갔다. 얇고 말랑말랑한 각질은 핑크나 붉은색에 가까운 반투명질의 젤리 같았다. 해류를 타고 체절을 굽혔다 폈다 하며 유영하기도 했다. 체절은 각 단위가 부드럽게 연결되어 마치 연체동물처럼 여유롭게 흐름을 탔다. 오억 년 전의 녀석은 구피만큼 부드럽고 아름다운 생물이었다.
아내는 그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왜 귀가하지 않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오래된 시간은 먼지처럼 누적되어 두꺼운 껍질이 되어 쌓이게 마련이다. 이번에도 시간의 입자는 내 감각을 건드리며 모든 것이 예정된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나의 흐름을 타고 있었고 그녀는 그녀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시계태엽의 움직임처럼 거기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토요일,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자정이 지나 있었다. 아내는 어제부터 안 들어온 것인지 집은 휑하고 썰렁했다. 구피는 치어를 잡아먹기 시작했고 성어 두 마리는 죽어서 배가 뒤집힌 채 수조 위에 떠 있었다. 뜰채로 건져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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