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가 활발하던 그 시기에, 아내의 컴퓨터에서 처음 '이석 사유'라는 단어를 보았습니다. 글자 하나하나는 분명 친숙한데, 합쳐서 써놓으니 묘한 낯섦이 느껴졌습니다. 그 당시 느낀 이질감을 잘 다듬어 하나의 이야기로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글이란 결국 누군가 읽어주지 않으면 한낱 낙서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항상 조잡한 글의 첫 독자가 되어주는 아내와 친구들에게 감사합니다.
더불어 여러모로 부족함에도 읽어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독려로 받아들여 정진하겠습니다.
“이상하지 않아?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듯 이석 사유자가 죽거나 사라지고, 본인이 인지하지 못할 사유가 발생하는 거?”
지안의 의구심에 친구는 계속해보라는 듯 관대하게 손을 흔들었다.
“원격 외골격이 도입된 지 수십 년이 지났어. 정확히 꼽아보면 벌써 63년째지. 사람들은 팡파르를 울려가며 인간 수명의 최고 기록을 하루하루 갱신하는 몇몇 노인에게만 집중하고 있어.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다육식물처럼 대중에게 길러지며 어쩌다 영생의 즐거움에 대해 한두 마디씩 하는 게 전부잖아. 진짜 눈여겨봐야 할 사람은 여기, 우리 곁에 있어. 인류 최초로 백 년 넘게 노동한 사람들 말이야.”
친구의 표정에는 노골적인 비아냥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지안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에 발동이 걸려 있었다.
“백 년이야. 백 년. 뭔가 숫자상으로 와닿지 않아?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인체의 노화는 연명장치로 충분히 막을 수 있을지라도, 인간이 최대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점이란 게 있다면 어떨 것 같아?”
“좋은 추리야. 한 이백 년 정도만 빨랐으면 노벨 생리의학상에 거론되었을 텐데 안타깝네. 상을 거머쥔 거나 다름없었을 텐데 말이야. 근데 너무 늦었어. 그런 수수께끼는 이미 풀린 지 오래야. 노동에 대한 네 추리가 맞는다면 진작부터 사람들이 무수히 죽었어야지.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모든 사람이 정보를 공유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친구는 지겹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게 거슬렸지만 지안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노동 한계가 사실이라면, 연명장치도 원격 외골격도 영원한 대안이 아니게 되는 거야. 이건 엑손에 치명적인 일급비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웬만한 국가 규모의 자본을 굴리는 엑손이 통계 수치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노동 한계에 도달한 사람들을 솎아내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사람은 기계 고장으로 인한 사고사, 어떤 사람은 갑작스러운 주소 이전, 또 어떤 사람은 구체적 이석 사유가 발생해도 집계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야.”
지안의 말을 들은 친구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기업 엑손의 청부살인이라니. 꽤 자극적인 음모론이네. 하지만 네 가설이 맞는다고 해도 엑손이 마땅히 그럴 이유가 있어? 너도 알겠지만 기업은 돈을 위해 돈으로 움직이는 집단이야. 자신들의 이익과 손실을 철저히 따질 줄 알아야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거지. 엑손쯤 되는 세계적인 기업이 인체에 숨겨진 생명과학적 비밀을 깨달았다면, 그걸 역으로 이용해 돈을 벌 사업을 구상하지 않을까?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고 다닐 게 아니라.”
친구의 지적처럼 지안이 주장에는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모든 주장이 한낱 가설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음모론자들이 다 그렇지, 라고 말하는 듯한 친구의 의기양양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유치한 음모론 소설은 이제 그만 쓰고 새롭게 한잔하며 내 이야기나 들어봐. 이번 주에 내가 카리브해에 면한 한 도시에 업무차 갔다가 끝내주는 해변을 발견했거든.”
카리브해? 남미? 업무? 잠시나마 활력을 잃고 작동을 멈추었던 지안의 머릿속에 무언가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럼 헬기 사고는?”
“뭐?”
“알잖아.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그 헬기 사고가 없었으면 지금의 엑손도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거. 정말 ‘우연하고 비극적인’ 사고였는지 교묘하게 설계된 마케팅 전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사고를 계기로 이젠 엑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됐잖아. 적절한 희생은 돈이 된다는 걸. 솔직히 말해 봐. 우연히 헬기가 추락한 거야 아니면 엑손이 마케팅을 위해 헬기를 추락시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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