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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사막

소설 단편

박상우 2023-04-12

ISBN 979-11-92211-79-4(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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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오래전부터 부화시켜온 ‘이미지 소설’의 결과물이다. 물리적 사막이 아니라 인성의 사막화, 인간의 사막화를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싶었다. 세계의 파편화와 사막화에 대한 인식의 심도가 결국 산문보다 시적 이미지의 경도를 불러 이런 작품을 잉태하고 오랫동안 변형 재생의 과정을 거치게 만들었다. 오래된 작의였지만 형상화 작업이 쉽지 않아 실패도 여러 차례 되풀이하고 시간도 많이 소모되었다. 이것이 최상일지 모르겠으나 내 한계로는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져 이 소설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낸다. 부디 이것이 끝이길 바라고, 이것을 끝으로 인간적이건 비인간적이건 사막의 이미지와 결별하고 싶다. 나의 영과 혼은 이미 오래전에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사막이여, 안녕!

뿌옇게 흐려진 세숫물 위로 코피가 뚝뚝 떨어지던 날 아침, 나는 벽을 짚고 서서 오랫동안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았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얼굴, 코피를 흘리는 병든 초상이 거기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던 어느 순간, 나는 이빨을 드러내고 정신이 박약한 인간처럼 웃어보았다. 드라큘라 같았다. 주먹, 그리고 부서져 내리는 거울 조각…… 사막은 적막했다.

여자가 나의 의식에 나도 모르게 끼친 영향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그날 오전의 기온이 연평균보다 5℃ 낮아진 11시 55분경이었다. 그 전날 밤 나는 그녀의 몸속에다 두 번의 사정을 했고, 그녀는 나에게 세 번의 사정을 원했었다. 모든 것이 말라버렸다고, 이제 더 이상 무엇인가를 기대해선 안 된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말없이 일어나 앉아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말은 못해도 언제나 내가 말하고 싶어 한 것은 인간적인 것이었다. 검은 모래 폭풍이 끝없이 휘몰아치는데, 그런데도 귀가 먹먹할 정도로 적막한 사막의 무풍지대. 나는 한동안 로트레아몽의 예리한 주머니칼을 생각했다.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칼이 결국 나 자신을 향하게 되리라는 걸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미친 듯 횡행하는 광기의 파편처럼 쩡, 쩡, 어디에선가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랑 따위, 그런 고상한 말 내 앞에서 하지 마.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건 당신이 스스로 길을 못 찾고 있기 때문이야. 이 사막에 아직도 사랑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얼간이가 있다니…… 웃기는 일이지만 결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야. 내 몸을 애무하고 내 몸속에 씨를 뿌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어? 내 몸속에서는 더 이상 생명이 자랄 수 없어. 내가 사막이기 때문이지. 한 줌 모래로 만나 서로 즐기고, 한 줌 모래로 다시 흩어지면 그것으로 그만인 거야.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그게 사막의 사랑법이니까.”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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