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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소설 단편

박상우 20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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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전을 뒤지다 ‘자미(滋味)’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자양분이 많고 맛도 좋음. 또는 그런 음식’이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자미’를 보자 자연스럽게 ‘재미’가 떠올랐다.
재미라는 순우리말이 자미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자 퍼뜩 소설적 영감이 떠올랐다.
자미업계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최고 가치는 당연히 재미가 될 터!
자미업계에 종사하는 생산자들의 고민거리도 당연히 재미가 될 터!
재미없는 게 용서되지 않는 세상,
그 문제로 평생 고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장춘몽을 그려보고 싶었다.
재미의 뿌리에 매달린 인생의 공허, 그것이 얼마나 우주적인 것인지
소설을 다 쓰고 난 뒤에 깨치고 가슴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하나 마나 한 얘기다.

백일홍, 그것은 꽃인가 꿈인가.

좌우로 밭이 펼쳐진 길을 지나자 계곡을 끼고 달리는 좁은 산길이 나타났다. 산모퉁이를 돌자 산과 산이 여러 겹으로 중첩되는 수묵화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산 중턱에 구름이 걸려 있고 높은 허공에서 솔개 한 마리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산자락에 작은 초가가 한 채 있고, 집 앞에 이팝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 밑에 작은 평상이 놓여 있고, 평상에 농부 차림의 자명이 앉아 있었다. 마루가 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자명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루는 평상에서 내려선 자명과 말없이 손을 잡았다. 아무 말 없이 둘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두덩이 욱신거려 허허, 하고 마루가 고개를 들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딴청을 부리자 자명이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집에는 아내의 모습도 자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서도 마루는 묻지 않고 자명은 말하지 않았다.

마루가 평상에 앉자 자명이 집 안으로 들어가 술을 내왔다. 호리병 옆에 푸른 두릅이 놓여 있었다. 자명이 건네주는 잔을 받아마시자 형용하기 힘든 오묘한 맛이 느껴졌다. 가슴의 응어리가, 온몸의 독성이, 마음의 잔해가 말끔히 녹아내리는 느낌.

비로소 맑은 눈물 한줄기가 마루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명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한 잔 마셨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이내 상기돼 꽃처럼 붉어졌다.

비로소 마루의 말문이 열렸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붉은 기운 때문에 내가 여길 찾아온 것일세. 17년 전 그때, 함께 점심 식사하고 나서 주고받은 말 생각나나?”

“백일홍?”

“그래, 그것 말일세. 그것 때문에 난 지난 17년 동안 은근히 마음이 불편했었네. 이제 우리가 살날이 많이 남겨지지 않았으니 허심탄회하게 심중에 있는 말을 털어내고 백일홍의 속내를 밝혀주겠나?”

“그것에 대해 길게 말할 게 뭐가 있겠나. 인간이 항상 어리석게 살아가니 마음에 맺힌 걸 반영한 것일 뿐이네.”

“아무려나 맺힌 것이건 남은 것이건 이젠 풀어버리고 싶네. 난 그때 왜 자네가 백일홍을 선택했는지, 그게 혹시 위악적인 선택은 아니었는지, 그 뒤로 오래오래 마음에 두고 살았네. 자네가 정말 백일홍을 좋아했던 것일까, 하고 말일세.”

“그게 그렇게 알고 싶은가?”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제12회 이병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인형의 마을』 『호텔 캘리포니아』 『내 마음의 옥탑방』 『가시면류관 초상』 『운명게임』『비밀문장: 지구행성 게스트하우스 손님용 보급판』​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 『소설가』 『검색어 : 삶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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