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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 : 2023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소설 단편 수상작

김근하 2023-11-01

ISBN 979-11-93452-05-9(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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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바닷가로 산책하러 자주 갑니다. 그곳에는 햇빛과 바람과 파도와 모래뿐만 아니라 문장들이 바다에 떠다니고 있거든요. 해풍에 잘 마른 문장을 건져내기 위해 매일 단단하게 다져진 모랫길을 따라 걷고 또 걷습니다. 파도에 다져진 모랫길은 얼마나 단단하고 야문지요. 그 모래의 시간을 생각합니다. 수없이 파도에 협박당하고 싸우며 견뎌낸 시간을.

파도가 얼마나 지독한지 모래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갈 때마다 모랫길이 달라져 있거든요. 모랫길처럼 단단한 문장의 근육을 키우고 싶습니다. 눅눅하고 비릿한 문장을 햇빛에 잘 말려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좌절감에 무너져 허우적거리는 긴 시간일지라도 다시 버텨 보려고 합니다.

나만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산책하다가 다리를 다쳤는지 꼼짝도 못 하고 물가에 앉아 있는 갈매기를 보았어요. 처음엔 죽은 줄 알았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살며시 눈을 떠 바라보는 눈빛이 순했습니다. 안아서 다리에 낚싯줄이 걸렸는지 확인하려고 했지만 겁이 나 만지지 못했어요. 가지고 있던 옥수수알갱이를 앞에 놓아주었더니 입에 대지 않고 쳐다만 보더라고요.

밝은 주황빛 부리를 가진 그 갈매기를 보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쓰였습니다. 밤새 파도가 달려와 갈매기의 날개를 적시지 않을까.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았을까. 다음날 바로 바다로 달려갔습니다. 갈매기가 보이지 않더군요. 어디로 갔을까요. 파도가 삼켰을까요. 아니면 친구들 곁으로 날아갔을까요.

다락방에 나 자신을 감금하고 그곳에서 책을 읽고 소설을 쓰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단조로운 시간이었지만 늘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불안 혹은 좌절이라는 이름 앞에서도 나 자신을 믿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버티는 데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내가 쓰고 싶은 것과 내가 쓸 수 있는 문장이 크게 차이가 났습니다. 그래도 버티다 보니 이런 운수 좋은 날이 찾아왔네요. 그리고 힘든 길을 함께 발맞춰 가자고 하네요.

저의 부족한 글 뽑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제 앞에 큰 등불을 밝혀 주셨습니다. 현진건 선생님의 아호인 빙허처럼 큰 빈터에 문장을 채워나가겠습니다.

노인정 지하에 있는 관리실로 내려간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묻는 직원에게 나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내의 이야기를 꺼낸다. 아파트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 여자 직원은 앉으라고 손짓한다. 촬영한 화면 보관 기간이 한 달 정도라고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출장에서 돌아온 지 보름밖에 안 지났으니까 아내의 모습이 방범 카메라에 찍혔을 것이다.

직원이 저장된 날짜를 찾아 영상을 뒤로 돌리기 시작한다. 화면이 빠르게 지나간다. 낮이 밤으로 이어지고 아이들이 모였다 흩어진다. 가끔 놀이터에서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젊은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도 보인다. 하지만 아내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그다음 녹화 장면을 빠르게 돌리자 희뿌연 화면 속에 두 명의 여자가 놀이터로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잠깐만요.”

직원이 손을 멈춘다. 아내와 옆집 여자가 분명하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무엇인가를 꺼내 마시기 시작한다. 여자가 말한 맥주인 모양이다. 놀이터에서 술을 마시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것만 빼면 아주 평온한 모습이다.

두 사람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 돌아갈 줄 모른다. 한참이 지나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별다른 징후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내의 일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관심 없이 지나쳤을 풍경이다. 다른 녹화 분 영상에서는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직원이 화면을 가리킨다.

“아까 그분들 같은데요?”

누가 아내인지 구별이 안 된다. 한 사람은 폴댄스를 추듯 그네 기둥을 잡고 빙그르르 몸을 돌고 한 사람은 그네에 앉아 발을 깔딱거린다. 기둥을 잡고 춤을 추는 사람은 물결처럼 이리저리 출렁인다. 몸을 흔들며 방범 카메라 쪽으로 다가온다. 얼굴 윤곽이 흐릿하다. 아내다.

아내는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쳐 입은 옷 스타일을 선호한다. 춤을 추듯 바닷속의 수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신발을 벗어 던진 아내가 돌부리에 발이라도 걸렸는지 넘어진다. 그네에 앉아 있던 여자가 달려와 아내를 일으켜 세운다. 아내가 쓰러지듯 여자에게 안긴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춤을 춘다.

나는 뚫어지게 화면을 바라본다. 부부 동반으로 노래방에 갔을 때도 나와 블루스조차 추지 않던 사람이 옆집 여자의 품에 안겨 춤추는 모습이 낯설다. 아내는 온몸이 슬픔으로 가득 찬 씨방 같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춤을 추던 두 사람은 지친 듯이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아내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나는 멍하니 화면을 지켜본다. 그때 누군가 다시 화면 속으로 뛰어 들어온다. 아내는 그네에 올라타더니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높이 치솟는다. 화면 가득 아내의 얼굴이 비친다.

순간 놀라 몸을 뒤로 젖힌다. 아내가 방범 카메라를 향해 무슨 말인가를 한다. 나는 모니터에 귀를 가까이 갖다 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몇 번을 되돌려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외로워, 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2000년 신라문학상 대상 수상

200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sobi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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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1 음소거된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초록달 202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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