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사랑은 돌이킬 수 없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처럼 세월이 흘러간다. 유리창에 내 얼굴이 그렇듯이 무심하게.
달리는 기차의 유리창을 선연하게 비추는 건 무심한 노르망디의 햇빛이군요. 또한 거기엔 나의 무난한 얼굴이 있습니다. 햇빛은 사심이 없습니다. 빛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쪼입니다. 반짝이는 과거를 데리고서 말이지요. 지나간 시간도 육체가 있어 우리와 함께 늙어갈 것입니다. 주름이 지고 헐거워지겠지요. 부디 건강하고 편안하시오. 내 시간의 얼굴, 나의 루이즈.
그녀가 와인과 치즈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크리스털 잔의 양각된 무늬가 밤하늘의 별처럼 도드라져 반짝였다. 잔에 붉은 포도주를 부었다. 그녀와 나는 잔을 부딪쳐 서로의 별을 가볍게 비볐다.
그럼, 이제 누님은 랭보와 발레리와 내통할 수 있겠군요.
웬걸? 읽을 수는 있지. 그렇지만 내가 딱딱한 사회과학을 오래 해서 그런지 시에 몸을 부벼봐도 흥분이 안 된다, 하하.
나도 그녀를 따라 크게 웃었다.
옛날얘기 하나 더 해도 돼요? 누님이 혼자 괴로워했던 대상은 대체 누구였소?
인제 와서 그걸 알아서 뭐에다 쓰려고. 지난 일인걸.
다가가 루이즈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매끄러운 소파에 다리를 미끄러지듯 밀어서 그녀의 다리 사이에 밀어넣으면 되었다. 쉽고 자연스러웠다. 포도주 때문인지 이방이라는 분위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팔 년이라는 시간의 거리 때문인지 편안했다. 그녀도 예전처럼 무심했다.
당신이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나는 그녀의 옆구리에 이마를 붙이며 속삭였다. 별로 취하진 않았고 다만 루이즈의 갈비뼈 사이로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나도 네가 좋아 보이네. 뭐랄까, 세상에 무난하게 안착한 느낌. 무난해야 마음이 편한 거 같아. 내게 이 집을 빌려준 아노라는 프랑스 친구는 모든 걸 가졌는데도 늘 위태위태해.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신경안정제에 젖어 살지. 아노의 집은 파리 근교의 샤또야. 프랑스엔 아직 왕족이나 백작의 후손들이 성에 살아. 휴가를 즐길 샤또 하나쯤 갖고 있든지. ‘상층 연구’에 관해 석사논문 쓸 때 지도교수가 소개해줘서 아노의 가족들을 알게 됐지. 아노의 엄마가 지도교수와 친구였거든. 샹젤리제에는 그들만 출입할 수 있는 바가 있는데 거기서 새벽까지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곤 했어. 아노의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도심을 가로질러 축축한 안개 낀 산길을 달리면 환상이야. 그리고 아침에 대리석 욕조에 몸을 담그고 목욕 가운을 입은 채 시중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식사할 때 기분 죽이더라. 성에서 열린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도 봤지. 모델들과 같이 아노 엄마의 헬리콥터를 타고 말이지. 나 처음에 걔네들 부럽더라. 근사하게 사니까. 근데 알아갈수록 그 친구들에게 동정이 갔어. 그들은 텅 비었어. 처음부터 모든 걸 갖고 태어나 이뤄야 할 게 없어. 갖지 못해 버둥거려야 할 것도 없고. 그러니 소중한 순간도 없어. 모든 것이 그냥 흘러가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지루한 인생이랄까. 그러니 할 일이 있고, 이뤄야 할 게 있는 삶도 나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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